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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량해전, 어떻게 이겼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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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전국 상황


 임진년, 흉흉한 소문이 조선 장안에 돌았다. 선조는 일본의 의도를 알아보려 사신을 파견했으나 보고가 엇갈리고, 선조는 “설마…”로 판단 하셨는지, 준비가 없었다.


 1592년 4월13일, 일본 각지역 다이묘에서 출발한 군선이 대마도를 거쳐 부산 앞바다에 닻을 내렸다. 500여척이다.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100년 통일전쟁을 끝내고 팽창된 군사력을 동원, 약육강식의 이론대로 이웃나라 약탈 전쟁을 시작한다. 조선의 남해관문, 부산진 첨사 정발은 당일 병사의 훈련 삼아 절영도에 사냥을 나간 참이었다. 사냥중 급보에 접한 첨사는 “다시 확인해보라”고 했으나, 다급히 사냥을 멈추고 입성한다.


 그날 저녁, 항복을 권하는 밀사가 접근했으나 이를 물리치니, 다음날 새벽 왜군이 상륙한다. 오전 성은 함락된다. 그로부터 왜군은 북상, 20일 만에 (5월3일) 선조가 떠난 한성에 무혈입성한다. “풍전등화”. 일본의 뜻은 조선의 항복이었으나, 선조는 평양을 거쳐 의주로 패주하면서, 항전을 계속한다.


 2. 해군상황

 

 원래, 조선의 골칫거리였던 왜구의 노략질이 전라도 연안보다 경상도 연안에서 심했던 관계로 평시 경상해역 해군 세력이 전라 해역 해군의 2배가 됐다. 이에 따라 건조, 보유, 훈련하고 있어야 할 전선의 수도 2배가 됐어야 했으리라. 그런데, 왜란 2개월 전에 부임한 원균이나 그 전임자가 직무유기를 했는지, 도무지 경상해역에 준비가 없었다. 다행히 왜란 14개월 전에 전라 좌수사에 부임한 이순신 제독이 있어 왜군이 침략하리란 소문 속에 실로, 전비태세 전반에 걸쳐 만전에, 만전을 기하고 있었다.


 부산 해역 방어를 책임진 경상우수사 원균의 요청에 따라 이 제독은 예하의 판옥선 24척을 이끌고 지원 출전한다. 원균의 4척이 합류하여 28척으로 외선 26척을 분멸하는 첫 해전(옥포해전, 5월 7일)을 치른다. 그리고 8월 24일까지 4차례 출전을 통해 10전 10승, 왜란 첫해에 왜선 320척을 분멸(부수고, 태우고, 가라앉힌다)한다. 조선 전선은 한척의 손실도 없다. 조선 땅에서는 왕이 계속 패주하고 있는데, 너무나 대조되는 이를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까.

 

1. 이순신(성웅) 제독의 준비


 자고로 준비된 자가 전장(Battlefield)을 지배한다. 성경 이야기 같이 하느님 군대가 싸움을 대신해 주지 않는 한, 승리는 장비, 인원, 전술에서 준비된 자의 것이다. 조선 해군의 완승이 어떻게 가능했는지 조-일 해군을 보자.


 가) 장비


 조선의 주 전선인 판옥선은 고려시대부터 이어오던 맹선을 보강해서 임진 100여 년 전에 이미 개발됐다. 맹선에 1층을 더 올려 3층으로, 1층에 노 젖는 군사를 두고 2층, 3층에 총포, 궁수의 배치 공간을 넓혀 화력을 증강 시켰다. 선체 길이는 20-30m, 쌍돛대, 노군 100여명, 사수 20여명, 총포수 30여명(포 16문)으로 총인원 130~160명이 탑승했다. 배는 소나무로, 두께 13cm(12~17cm)가 되어, 삼나무 두께 9cm의 왜선보다 튼튼했고 주 추진 동력이 되는 노와 돛은 왜선의 좌우 16개(외돛)에 비해 판옥선은 좌우 10여개 (쌍돛)를 장착했으나 기동력이 오히려 우수했다. (왜란중 도주하는 왜선을 추적 격파하기를 42척)


나) 인원


 선상근무는 육상근무보다 힘들고, 평시에도 위험부담이 많아 선원 보충은 항시 어려웠다. 첫 출전 때도 출항전일 도망병을 잡아 목을 베어야 했다. (영국, 넬슨 시절에도 런던 밤거리에 술주정군, 불량배를 잡아 선원으로 쓰곤 했다) 그러나 전쟁 중에는 왜군을 피해 이순신 진영으로 모여드는 피난민이 많아, 선원 보충에 보탬이 되기도 했다.


다) 전술


 왜 해군은 그 뿌리가 왜구, 해적이었고 일본통일 전쟁은 육상중심이었기에 해군이 발전할 소지가 없었다. 임진년 10번의 해전을 보아도, 왜선이 조선 해안에 도착하면, 우선 상륙, 해적 행위(약탈)가 시작됐고, 이 제독은 이런 상황에서 공격을 시작했다. 왜 해군의 주 전술은 승선 육박전(칼, 조총) 이었으나 이 제독은 왜선의 접근을 허락지 않고 유효 사정거리를 유지하며 인마 살상용 편전, 불화살, 장전 등 포를 집중 사격하여 전장을 지배했다. 


 비록 500여척의 왜 해군이 참전했으나 제해권을 확보한다는 개념은 아직 없었기에 육군수송(상륙)이 끝나면 왜선은 각기 소속별로 흩어져 조선연안 해적 행위에 몰두함으로서, 이 제독은 매 접전시 왜선보다 적지 않는 척수로, 거의 무방비 상태의 왜선을 공격하는 상황이 됐고, 판옥선 1척이 왜선 1척을 분멸시키는 데는 1-2시간이면 족했을 것이다. 고로 매 전투는 2-3시간을 넘지 않았다. 제대로 해상 전술이 적용된 경우는 한산대첩시 학익진과 안골포 해전시 장사진(일렬종대) 뿐이다. 이로 보아 이 제독의 주 전술은 근접 포위 집중 사격이라 할 수 있다. 왜군은 완패를 경험한 후 조선 해군과 해전을 금지한다. 추후, 전선을 대형화, 다량화하고 야간 기습으로 판옥선 1척당 5-7척의 왜선을 배치하여 공격한다는 전술을 택한다. 그리고 그 첫 해전이 칠천량 이었고, 왜의 새벽 기습 전술이 주효했다. 

 

명량해전


 조선해군 160척이 왜군의 기습으로 파멸됐음을 이 제독은 백의종군 중 득문한다. 수군통제사의 중책을 다시 받고 이 제독은 전라우수사 배설의 전선 12척이 남았음을 하늘의 뜻으로 알고 이로서 불멸의 결전을 다짐 하셨으리라 생각된다. 왜 해군은 비록 조선 해군의 주력을 수몰시켰으나 이 제독 예하의 10여척이 있는 한 해상병참선의 안전을 기할 수 없음을 잘 아는 터여서, 끝까지 추적에 나선다. 성웅도 이를 잘 알고 있었다. 성웅으로서는 살아남은 십여 척에 국운이 달려있음을, 그래서 추적 함대를 피해 소함대를 어떻게든 보존코자 서쪽으로, 서쪽으로 진영을 옮긴다(회령포에서 어란포, 다시 진도 벽파진으로).


 이는 열세한 함대를 보존, 결전의 때를 기다리는 현존 함대의 전략이며, 성웅의 생존 전략이고, 치밀한 계획이었다. 성웅은 다시 한번 해전에 유리한 위치를 선점코자 명랑해전 전일 함대를 벽파진에서 우돌목 서편, 전라우수영으로 옮긴다. 성웅은 십여척의 세력으로 수백의 왜선을 퇴각시킬 결전의 장을 찾아 기다리고자 했던 것이다. 


 그간 모든 해전은 경상도 해역에서 있었고, 왜선은 전라도 해역에 진출할 일이 없었으나 성웅을 추적하며, 전라도 지역의 육전을 지원하면서(남원성 전투에 동원) 전라도 진도에까지 이른다. 추적과 피신의 두달이었으나, 9월 16일, 성웅의 정탐선이 “많은 적선이 명량을 통과해 우리 함대로 접근하고 있다”는 보고가 있자, 결전의 때가 온 것을 안다. 


 성웅은 “적은 숫자로 많은 적을 막기 위해서는 좁은 길목을 택해야” 하는데 그곳이 명량 우돌목 임을 이미 알고 남해의 서쪽 끝단, 진도에서 기다리고 있던 참이다. (우돌목: 폭 300m, 길이 2Km, 조류 최대 21Km/H) 300척의 왜 추적함대는 전선(세키부네) 133척을 앞세워 우돌목으로 진입한다. 조류는 왜군에 유리했다(서향). 초기, 우세한 세력이 성웅의 선단을 포위하려는 듯 했으나 오후 1시 조류가 바뀌면서(동향) 왜선단은 조류에 밀려 협수로로 밀려들어가는 형국이 됐다. 성웅이 기다리던 순간이 왔다. 조선 해군은 조류를 타면서 접근, 준비한 전술대로 왜선을 향해 비오듯 화살과 총포를 쏜다. 편전과 장전으로 사살하고, 지.자.현 총포로 격파하며, 불화살로 불질러 버렸다. 오후 2시 왜선은 31척을 잃고 퇴각한다. 이때도 왜군이 시도 하려했을 승선 육박전은 없었다. 조선 해군의 주 전술대로 근거리 집중 사격으로, 우돌목 좁은 수로에 역조로 밀려, 전열이 흐트러진 왜선을 격파했다. 명량해전은 왜군이 협수로를 등지고 배진함으로 스스로 협수로에 몰리는 우를 범했고, “이 순간을 이 장소에서” 기다린 성웅의 승리였다. 활과 포의 특성상, 다수의 전선이 좁은 간격으로 밀집해 있으면 앞에 위치한 전선에, 뒷배는 조준 사격이 불가하다. 뒷배의 조준선(Line of fire)이 앞배에 가리게 되기 때문이다.


 반면, 성웅은 비록 소수이나 일렬 횡대진형 임으로 활과 포의 직선(조준) 사격에 방해가 없다(포위 전술의 이점). 이것이 13척으로 133척을 맞서 31척을 분멸시킨 불멸의 명량해전 설명이다. –성경을 가까이 하는 사람의 눈에는 하느님이 함께 하신– 그리고 그다음 해전, 노량에서 성웅 이 제독은 전사한다.

 

 같은 조선의 수군이었으나, 지휘관에 따라 결과가 달랐다. 같은 조선 민족이었으나, 이순신 밑에서는 연승을, 육상에서는 연패를 보였다. “명량해전: 어떻게 이겼을까?“의 답을 찾고자 하니, 정답이 눈에 선명히 보인다. 그것은 “지도자론”이었다. (참조: 이순신 평전, 이민웅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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