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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광수 교수를 애도하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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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5일 전 연세대학교 마광수 교수가 자살하였다는 뉴스를 듣고 무척 충격적인 마음을 금할 수 없었다. 마광수 교수와는 몇 차례 서신도 교환한 바 있으며 “즐거운 사라“ “나는 야한 여자가 좋다“, 그리고 “가자 장미 여관으로” 등의 작품이 외설문학으로 한국의 미풍양속을 위반하였다는 죄목으로 실형언도까지 받고 교수직에서 해임되는 등 한때 한국 문단에서 뿐만 아니라 한국사회 전체에 커다란 화제가 되기도 하였다. 


 마광수 교수의 문학과 외설논쟁에 관한 나의 생각을 소개하면서 시대를 앞서간 지성인 마 교수의 명복을 빈다. 


 마 교수의 “즐거운 사라“는 그 내용이 “성“에 대한 지나친 묘사로 한국의 미풍양속을 해치는 반도덕적인 작품으로 이는 외설(음란)문학이라는 이유로 법의 심판을 받은바 있다. 문학에 있어 외설(음란) 시비는 어제 오늘에 있어온 것도 아니며, 문학에 만 극한된 것도 아니라 조각, 미술 등 예술 전반에 걸쳐 오랜 세월 동안 논란의 대상이 되어 왔고 그 문제는 오늘날에도 계속 되고 있다. 


 세계명작으로 널리 읽혀지고 있는 “챠타레이 부인의 사랑”도 외설문학으로 판금되기도 하고 세계적인 화가로 자타가 공인하는 미켈란젤로, 라파엘로, 티티안의 그림, 그리고 로댕의 남녀의 육감적이고 애로틱한 조각상 등도 음란 시비에 휘말리기도 하였다. 


 이처럼 예술에 있어서의 외설(음란)문제는 정도의 차이는 있을지언정 어느 시대 어느 곳에서나 있어왔다.
 일본에서는 마 교수의 “즐거운 사라”를 한국에서 판금되고 있는 문제의 소설이라는 광고를 앞세워 대대적인 판매선전을 하면서 문학 평론가나 일반 독자들은 이 정도의 작품으로 작가를 외설작가로 법적 제재를 가하는 것에 대해 아직도 한국은 문학적으로 미개한 나라가 아닌가 하는 평을 하고 있다.


 그러나 한 나라의 문학수준을 외설시비나 성의 노출정도의 차이로 판가름한다는 것은 문학가치의 기준을 혼동하고 있는 것이라 생각한다. 외설이란 반윤리적, 반도덕적인 것, 다시 말하면 그 사회의 독특한 습관이나 풍습의 규범에 반하고 역사나 민족성에 의해 특정지워지는 것이다. 


 만약 성의 노출 정도가 문학적 예술가치의 후진성과 선진성의 기준이 된다면 아직도 남미나 아프리카 오지에서 나체로 원시생활을 하고 있는 원주민들이 가장 문화적으로 앞섰다고 하는 역설이 성립되는 것이 아닌가.

도덕이란 사람이 지켜야할 행위의 절대 규범이지만 한 시대가 만들어낸 습속이기 때문에 절대 불변의 가치가 아니라 시간과 공간의 변화에 따라 언제나 변화될수 있는 것이다. 따라서 일본과 한국에서의 마광수 교수의 문학에 대한 예술적 가치 기준도 다를 수 있는 것이다. 


 마광수 교수는 한국사회의 “성“ 문제는 쓰레기통에 뚜껑을 덮은 양상을 뛰면서 속으로 썩고 있다며 한국도 문학가의 문학에 대한 개념이 바뀌어야한다고 주장하고 있다. 


 이처럼 허구와 상상을 바탕으로 인간의 원초적인 삶을 표현하는 문학과 현실을 기초로 하는 실증법 사이에는 갈등과 이율배반적인 요소가 있게 마련이지만 문학이 도덕, 윤리를 선도한다든가 도덕, 윤리가 문학을 규제한다기보다 서로 조화를 이루면서 보다 높은 차원의 발전을 모색해야 한다. 


 문학에 있어서 성의 문제를 문학에 대한 억압수단으로 이용하지 않도록 신중을 기해야 하며, 한 시대와 그 사회의 도덕, 윤리관을 확실히 찾아 창작 활동이 위축되지 않도록 노력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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