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동렬 교수 송년휘호- “벌써 한 해(2019)가 가는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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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른 밤에 둥긂은 단 하룻밤
인생의 뜻한 일도 저러하려니
(三十夜中圓一夜 / 百年心事摠如斯)

 

 

 위는 중종-선조 때의 대학자 송익필의 시 <달밤> 후절. 손종섭의 한글 번역이다. 


 열닷새를 두고 하루하루 조금씩 커져서 힘들게 이룬 보름달도 잠깐의 축복에 지나지 않음을 인생살이에 비추어 애석해하는 시구(詩句)다.


 사람은 저마다 꿈이 있고 소망이 있다. 열심히 살아서 앞으로 뭐가 되겠다, 저마다 무엇을 이루고 싶은 작은 꿈이랄까 소원으로 가득 차 있다. 마음은 꿈의 창고. 그러나 그 바라던 것을 어느 정도 이루어 "이제 좀 살만하게 되었다." "이제는 전처럼 아등바등 않고 살 수 있게 되었다."는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갑자기 태풍처럼 불어닥친 재난이나 불행은 우리를 휩쓸고 가버린다.


 평생을 하루 같이 알뜰히 쌓아 올린 공든 탑이 일순간에 와르르 무너지는 불행은 너무나도 자주 볼 수 있는 광경. 신의 저주, 아니면 운명의 질투일까. 인생을 밤길 가듯이 조심조심 살펴 가며 살아왔는데 재앙은 태풍처럼 기다렸다는 듯이 눈 깜짝할 사이에 우리를 삼켜버린다.


 이 인생살이 기승전결(起承轉結)을 송익필은 보름달에 비유했다. 한시(漢詩)는 한 구절만 명문 글귀가 되면 그 나머지 글귀는 따라서 명문 대접을 받는 경우가 많다.
 이 송익필의 <보름달>도 그렇다. 이런 시구(詩句)는 "못 둥글어 한이나 둥글긴 더뎌, 어찌타 둥글자 이내 기우나?"(未圓常恨就圓遲 / 圓後如何易就虧)가 전구(前句)가 된다. 


 우리는 이런 갑작스런 비극에 저항해서 싸워볼 의연함은 없다. 그저 그 비통함에 눈물 떨굴 뿐이다. 운명 앞에서는 누구나 순한 양(羊)이 되는 것을.


 달의 운명을 보고 송익필은 인생의 허무함을 느꼈지마는 달을 두고 자기의 심사를 털어놓은 시인들은 옛날이나 오늘이나 많다. 우리 문학 여명기의 시인 김소월은 "이제금 저 달이 서름인 줄은 예전엔 미처 몰랐어요"하고 몸부림치지 않았던가. 


 그 달의 운명도 알고 보면 서럽기는 마찬가지일 텐데. 아무리 달이 커졌다 작아졌다 해도 우리는 그 달빛 아래서 목선(木船) 가듯이 고물고물 열심히 살아갈 뿐이다. 


 2000년 밀레니엄이 온다고 난리를 치던 것이 바로 어제 같은데 벌써 2020년이 온다고 야단이다. 20년 세월이 어찌 태풍보다도 빠를 수가 있단 말인가. 기해년이 경자년으로 바뀐 것 뿐인데.


근하신년.

 

2019년 세모에 陶泉散人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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