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3년도 신춘문예 입선작-수필 가작 허정희 '꺾어 신은 운동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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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정희

 

강의를 마치고 후문으로 향한다. 정문에는 집으로 돌아가는 버스가 없었다. 아침부터 흐리던 잿빛 하늘이 눈이 되어 흩날린다. 후문으로 가는 길 위로 며칠 전부터 내린 눈이 수북하게 쌓여있고, 쌓인 눈이 눈더미가 되어 내 발길을 막아 선다. 길을 막아선 눈더미에는 누런 흙탕물이 묻어있었고, 지난날의 오가던 우리들의 발자국이 그대로 남아있었다. 내리던 흰 눈이 눈더미에 남겨진 흔적을 지우려 진눈깨비로 변해간다. 왠지 모르게 온종일 눈이 올 것 같아서 서둘러 집으로 향한다.

겨울날 집으로 돌아가는 길은 허기진 탓인지 늘 춥고, 걸음을 아무리 빠르게 움직여도 제자리인 것 같아서 겨울날의 버스정류장은 더 멀고 낯설게 느껴진다. 오가는 버스들이 찬바람을 몰고 와 정류장에 내려놓고 정신없이 사람들을 채우고 횅한 큰 소리를 내며 쉴틈없이 어디론가 급히 떠난다.

멀리서 집으로 돌아가는 버스가, 내리는 어둠과 눈 사이로 희미하게 다가온다. 늦게 나타난 버스를 원망스러운 눈초리로 쏘아보다가 어쩔 수 없는 마음에 이끌려 얼어붙은 발을 몰아 차로로 떠밀어냈다. 버스의 번호판 옆으로 사람들이 갑자기 몰려오고, 서로가 먼저라고 우기면서 섞인 무리가 다가서는 버스를 향해 달려간다. 마치 이 세상에 하나밖에 남지 않은 버스인 것 같아 나도 달렸다. 사람들에 떠밀려 버스의 맨 끝자리에 서서 흔들리는 몸의 중심을 버티려 남은 힘을 모아 다리에 힘을 주다가 버스길 건너편에 서있는 한 사람을 보았다. 조금 더 가까이 보려고 얼어있던 발꿈치를 들어 앞에 선 사람을 밀어내고 버스의 천장에 달려있던 손잡이에 몸을 실어본다. 서리 낀 차창 사이로 그가 보였다. 그는 흰눈이 덮인 길 위에서 운동화를 꺾어 신고 서 있었다. 추위에 얼어있던 심장이 멈춘 것 같아 눈을 껌벅거려본다. 꼼짝도 할 수 없었다.

휘청이던 기억이 그가 있던 곳으로 나를 데리고 간다. 그리움이 느닷없이 퍼붓는 눈처럼 밀려온다. 차오르는 눈물을 참으려 가슴 깊이 묻어둔 시린 숨을 몰아 내쉬어본다. 주저앉고 싶은 생각에 주위를 둘러보니 버스 안에 나 혼자 덩그러니 서있었다.

그리고 그가 내게로 걸어왔다. 뿌연 현실 속에서도, 사회정의를 외치던 시위대 속에서도, 진압을 피해 후문으로 향해 달리던 무리 속에서도, 그리고 나를 만나러 올 때도, 그는 운동화를 꺾어 신고 있었다. 프랑스 대혁명의 민중이 되어, 가슴속에 품은 그의 신념이 이루어질 그 날을 위해 쉬지 않고 계속 달리고 있었다.

온종일 교정을 뒤덮었던 매운 최루탄연기도, 무자비한 군화의 발길질도, 끌려가는 친구들의 아우성이 실린 트럭도, 달리는 그를 막을 수 없었다. 그가 높게 달린 깃발이었고, 그 깃발은 힘차게 펄럭이고 있었다.

오월의 축제가 끝나던 날 그런 그가 미치도록 화가 나서 왜 운동화를 꺾어 신는지 물어보지도 못한 채 헤어지자고 했는데, 아무런 대답 없이 바라만보던 그가 버스의 느린 움직임을 따라 내게서 멀어져 간다. 멀어지는 그가 눈이 되어 찬바람에 휘날리더니 기억 저편으로 사라져간다.

유난히도 눈이 많이 내리고 겨울이 긴 도시에서 두 번의 겨울을 만났다. 꿈은 구름같은 시간 속에 바람을 타고 알 수 없는 곳에다 나를 내려놓는다. 일찍 찾아오는 긴 어둠은 꿈과 만나 늪을 만들고, 그 늪에서 겨울앓이가 시작되었다. 마치 독한 감기에 걸린 것처럼 아무리 약을 먹어도 낫질 않는다. 긴 겨울이 지나간 그 자리엔 힘들게 애쓰지 않아도 봄은 오는데, 그 때의 그 봄은 얼마나 고단하고, 멀리 있었는지…

겨울이 시작되는 날 산책길에서 앞서가는 남편은 운동화를 꺾어 신고 있었다. 꺾인 운동화를 닮은 그의 어깨는 세월에 눌리어 내려앉았고, 드러난 발꿈치처럼 휑한 그의 정수리가 겨울바람에 도드라져 보였다. 힘겹게 흔들리는 흰 머리카락이 시간 속에 남기고 간 자국이어서 내 마음도 흔들렸다. 가슴 깊숙이 묻어두었던 울음이 가늘어진 그의 다리에 기대어 숨죽여 울고 있었다.

젊은 날의 눈들이 바람을 타고 날아온다. 날아온 눈이 길 위에 하나씩 쌓여간다. 그가 걸어간 발자국이 눈길을 열어가고, 길이 된다. 그가 걷는 이 길이 누군가의 길벗이 되어 가는 길이 외롭지 않기를 바라면서 꾹꾹 눌러가며 걸어간다.

집으로 돌아와 외투를 벗어 걸고 뒤돌아보니 그가 벗어놓은 운동화가 현관 옆에 쭈그리고 앉아있었다. 운동화를 들어 꺾어진 뒤축을 당겨 한쪽으로 닳아버린 운동화를 바로 세워놓고 한참을 바라보았다. 운동화 속에 그와 내가 있었다. 먼 길을 걸어온 우리들의 토닥거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쭈그러진 주름이 웃으며 걸어 나온다.

 

(수상 소감)

 매년 신춘문예 모집광고를 신문을 통해 만나면서도, 일상에 쪼들린 자신에게 나와는 먼나라 이야기라고 다독이며 신문지를 마음속에 차곡히 쌓아두었습니다. 우연한 인연으로 한 여인(엄아가다님)을 만났습니다. 그녀의 진심 어린 정성이 저를 감동시키고, 문예교실로 한 걸음 다가갈 수 있었습니다.

글쓰기가 내 일상의 최우선이 되어야 하고, 다독, 다작, 다상량을 알려주는 수필강론, 이야기를 이야기하라던 소설강의는 나를 다시 들여다보는 계기가 되었음에 진심으로 감사 드립니다.

응모작 ‘꺾어 신은 운동화’는 1980년 대학시절을 보낸 우리들의 모습이었고, 그 시대를 살아낸 우리들의 이야기였습니다. 살면서 우리는 자신의 삶이 무엇에 의해 꺾어지는 순간을 만나 상심하고, 꺾어야 하는 상황에 좌절하고, 꺾여진 채 살아가기도 합니다.

마지막 구절에 나오는 꺾어진 운동화를 바로 세우듯 우리를 세워 내일을 살아가길 응원하는 마음으로, 용기 내어 마음속에 쌓여있던 신춘문예광고를 끄집어내 응모하게 되었습니다.

이젠 꺾이지 않고 이야기를 이야기해도 된다는 허락으로 받아들이고, 그 허락주신 캐나다한인문인협회에 감사 드립니다.


 

심사평 / 김영수

 

 

 신춘문예 수필 부문에 접수된 응모 작품 중 총 20편이 심사 대상에 올랐다. 작품의 과반수가 수준이 엇비슷하여 심사하기가 쉽지 않았다. 이번 심사에서는 작가적 잠재력 발굴이라는 점을 염두에 두고 고심 끝에 4편을 선정하였다. <꺾어 신은 운동화>를 가작에, <고요 속에 핀 꽃들의 순간>과 <만남>, <그 사람> 3편을 입선에 올릴 수 있어 기쁘다.

<꺾어 신은 운동화>, 화자가 일과를 마치고 허기진 몸으로 집에 가는 버스를 기다리는 정류장은 춥고 낯설다. 그 버스를 놓치면 집에 돌아가지 못할 것 같아 우르르 몰려가는 무리에 섞여 버스에 오른다. 성에 낀 차창 밖에 운동화를 꺾어 신은 ‘그’가 보인다.

‘그’는 화자를 데리고 먼 기억 속으로 돌아가, 자신이 화자의 마음에 ‘높게 달린 깃발’이던 때를 환기하는 역할을 한다. 화자의 시선을 따라가다 보면 그 끝에는 늘 ‘꺾어 신은 운동화’가 있다는 것을 발견한다. 독자는 이제 그 ‘꺾어 신은 운동화’가 은유하는 것을 짐작하며 그 운동화의 주인을 유추하기에 이른다. 하지만 그가 왜 운동화를 꺾어 신는지 묻지도 못하고 그는 아무 대답 없이 바라만 보는 것으로 기억의 문은 닫히고 만다. 그의 잔영이 버스와 함께 멀어지며 그때의 봄이 얼마나 멀리 있었는지 회상하기에 이른다.

집에 돌아와 현관에 놓인 뒤축이 꺾인 운동화를 보며 화자는 다시 생각에 잠긴다. 세월을 고스란히 이고 있는 운동화는 더는 옛날의 그 운동화가 아니다. 그 안에서 ‘우리’가 되어 있는 그와 화자 자신을 본다. 뒤축 꺾인 운동화라는 소재로 현실과 과거를 이동하며, 함축된 표현미로 창의적 구성을 시도한 점이 이 글의 묘미다. 열의를 갖고 정진하여 성장하는 작가로 거듭나시기를 기대한다.

<고요 속에 핀 꽃들의 순간>은 화자가 템플 스테이에 참여하는 사람들을 위한 봉사자로 일하면서 겪은 경험을 토대로 이야기를 풀어놓은 글이다. 심신이 피폐했을 때 찾아간 절에서 스님들과의 생활을 통해 위로받고 치유되는 과정을 자연스럽게 펼쳐간다. 절에서 보낸 시간은 감사와 겸손을 배우며 세상 만물이 하나로 연결되어 있음을 깨닫는 계기가 된다.

일상 속의 소재를 발굴하여 글의 흐름을 부드럽게 이어갔으나 단순한 스토리의 열거보다는 주제를 최적화하는 소재를 변별하여 사용할 때 글이 조화를 이룬다는 점을 말씀 드린다. 글의 말미에서 산사 체험을 통해 자성의 시간을 갖고 자연과 함께하는 고요 속에 자신을 만나는 작가의 모습을 그리며 마무리 한 점이 돋보인다.

<만남>은 만남이라는 평범한 소재로 화자만의 개성있는 작품을 빚어낸다. 어머니와의 만남을 시작으로 병원에서 근무하며 수많은 만남과 헤어짐을 경험한다. 코로나 팬데믹 사태를 겪으며 유리창을 사이에 두고 마스크를 낀 채 만나는 부모와 자식의 애타는 모습을 이야기하며, 화자의 젖은 마음을 무리없이 서술하여 공감을 얻는다.

아들을 잃고 스케치를 시작하며 그림을 통해 아들과 함께하던 시간을 복기하려는 이웃의 어머니는 아픔을 넘어서려는 몸부림이다. 그 밖에도 많은 만남이 희망의 끈이 되어 ‘삶의 알맹이를 끌어낼’ 수 있기를 염원하는 화자의 마음이 읽힌다. 독자는 사실에 관한 묘사보다는 작가의 내면세계를 궁금해 한다. 진솔한 경험과 사유의 힘이 결합된 글로 보다 많은 독자의 공감을 얻는 작가로 성장하시기 바란다.

<그 사람>은 함석헌선생의 ‘그대 그런 사람을 가졌는가’를 서두에 놓고 말문을 연다. 화자 인생에도 ‘그 사람’이 등장한다. 삶이 바닥까지 내려갔을 때 물불 가리지 않고 도와준 크리스가 그 주인공이다. 주저앉은 삶을 일으키기 위해 외곽 지역으로 거주지를 옮겼을 때 사람 못지않게 큰 역할을 한 것은 자연이다. 평화로움과 여유와 아름다움을 보며 모든 것을 내려놓았을 때 비로소 찾아온 희망의 빛을, ‘무릎 꿇는 순간 보게 된 터미널의 끝’이라고 화자는 표현한다.

작가 자신이 역경을 극복하고 일어선 것에 만족하지 않고 자신처럼 외롭고 힘든 처지에 있는 이들을 돕는 ‘그 사람’ 되고자 새로운 삶을 시작한다는 희망적인 글이다. 수필의 묘미라 할 수 있는 수미상관식 구성이 주제를 부각시킨다. 감동과 울림을 줄 수 있는 다음 글이 기대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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