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흔적을 찾아서(64)-에베소(3) '셀시우스 도서관과?유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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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베소 유적지 중에서 가장 아름다운 건물을 꼽으라면 단연 지금은 파사드(Façade 건축물 정면)만 남아있는 셀시우스 도서관이 될 것입니다. 비록 부서진 채 앞면의 일부만 남아 있지만, 정교한 조각으로 이루어진 도서관의 조형미는 절로 감탄이 나오게 만드는 건물입니다. 저 역시 사진으로만 보아오며 언제인가 실물 보기를 동경하여 오던 건축물이었으니까요.

그 당시 세계에서 제일 큰 이집트의 알렉산드리아 도서관과 장서 20만권을 가진 버가모에 있는 도서관과 함께 세계 3대 도서관으로 약 1만2000여권의 장서가 보관됐었다고 합니다.

당시 책이라는 것이 양피지 아니면 파피루스였기에 습기에 약한 책들을 잘 보관하기 위하여 이중벽을 만들었을 정도로 잘 지어진 건축물이었습니다. 그러니 이 도서관에서 많은 학자들이 공부하며 학업에 정진하였었겠지요.

그 당시, 최고 엘리트였던 가말리엘의 문하생인 사도 바울 또한 에베소에서 보낸 시간들이 모두 3년 남짓 된다고 성경에 기록되어 있기에, 이곳에서 많은 도서를 열람하며 강론도 하였을 것이라는 가설 때문인지, 어떤 사람은 이곳이 사도 바울이 근거로 삼았던 두란노 서원의 자리라고도 하고··· 어떤 사람은 아니라고도 하고···.

확실한 기록이 없으니 목청 큰 사람의 주장이 이길 법합니다마는 그게 무슨 대수이겠습니까?

셀시우스 도서관은 아시아 지역을 담당하던 총독 셀시우스(Celsus)의 아들이 아버지를 기리기 위하여 AD 117년~135년에 걸쳐 지은 건물이니, 이 때에는 사도 바울은 물론 사도 요한 마저 다 주님의 품으로 돌아간 후일 터이니 말입니다.

이 도서관에 있던 장서들은 AD 262년, 고트(goth)족의 침략으로 다 소실되었고,

그 후 4세기에 이 지역을 강타한 큰 지진으로 내려앉아 매몰되었던 것을 1903~1904년 오스트리아 고고학자가 에베소 유적지를 발굴한 후 1970~1978년, 독일 고고학자 볼커 미카엘 스트록카(Volker Michael Strocka)의 “에베소 건축물 재건운동”에 의해 그나마 일부분 남아있던 유적들을 근거로 파사드(Façade 건축물 정면) 형체를 복원하여 지금의 모습으로 아름답게 복원되었다고 합니다.

그러나 여기서 조금 더 집고 넘어가면 좋을 것 같아 소개해 드립니다. 사도행전 19장에 바울이 에베소에 와서 선교하는 일이 기록되던 중, 9절에 “어떤 사람들은 마음이 굳어 순종치 않고 무리 앞에서 이 도를 비방하거늘 바울이 그들을 떠나 제자들을 따로 세우고 두란노 서원에서 날마다 강론하여” 라고 나와 있습니다.

두란노 서원은, 영어로 School of Tyrannus인데, 영어나 라틴어 권에서 티란누스(tyrannous)는 '폭군'을 뜻하기 때문에 오해의 소지가 있습니다마는 여기에 나오는 “티란노스(Tyrannus)”는 헬라 사람의 이름으로 “sovereign, 주권자”를 뜻하는 단어라고 합니다.

그 당시 티란노스는 자기 집에 “서원(school)”이 있는 철학자이거나, 사상가로 추정되고 있는 인물로, 9절에 쓰여진 대로 바울은 자신을 배척하는 회당의 “복음의 훼방꾼들”을 벗어나 이 곳에서 제자들을 따로 세우며 날마다 강론을 하였을 것이라고 합니다.

본문에 언급한 제자들은 2차 전도여행을 매듭짓고, 시리아의 안디옥으로 귀환하던 바울이, 잠시 기항한 에베소에서 복음을 전했을 때, 주님을 영접한 사람들과,

그들을 위해 바울이 에베소에 체류하게 했던 브리스길라와 아굴라 부부로부터 주님을 영접한 사람들, 그리고 3차전도여행을 시작해서 에베소를 다시 찾은 바울을 통해 새롭게 주님을 영접한 사람들을 다 아우르는 여러 사람들이었을 것입니다.

다시 셀시우스 도서관으로 돌아가, 정면에는 3개의 출입구가 있고, 출입구 사이 벽에는 섬세하게 조각된 4개의 여성상 조각들로 장식되어 있습니다. 정면을 바라보는 위치에서 왼쪽부터 각각 지혜를 상징하는 소피아(Sophia)상, 미덕을 상징하는 아레테(Arete)상, 지성을 상징하는 에노이아(Ennoia)상, 그리고 지식을 상징하는 에피스테메(Episteme)상들로 아름다운 여신들의 석상입니다.

이 여신상들은 다 복제품이랍니다. 진품의 일부는 최초 발굴자의 권리 주장으로 오스트리아의 비엔나 박물관에 있고, 남은 부분은 터키 이스탄불 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다고 합니다.

“왜 하필 여신상이었을까요?”

흥미로운 것은 이 도서관 바로 건너편이 그 당시의 유명한 유곽이라는 것입니다. 길을 건너 조금 더 내려오니 길바닥에 박힌 자그마한 돌 판이 나옵니다. 케말이 그 돌에다 물을 부으니 선명하게 나타나는 발자국과 또 여자의 모습, 그리고 동전의 모습. 이게 세계 최초(?)의 광고판이랍니다.

내용은? “당신을 사랑해 주기 위하여 도서관 앞에서 기다리고 있겠어요.”라나…. 유곽의 광고랍니다.

‘지라시’(‘광고 전단’이라는 일본 말의 잔재. 근데 이런 건 ‘지라시’라고 하는 게 뉘앙스가 좀 나을 것 같습니다. ㅎㅎ)를 뿌리는 게 아니라 대리석 돌 판에 새겨진 광고입니다. 그래서 2000년이 넘도록 생생히 그 내용을 전해주는 광고이니 그 본전은 몇 백 곱을 뽑고도 남았을 겁니다.

그때에도 도서관에 오는 사람들은 거의가 남자였던 모양입니다. 남자들이 가는 곳에 따라붙는 여자들! 필요와 공급의 원칙은 그 때에도 벌써...? 하긴 창세기에 나오는 이야기이기도 하니 무슨 설명이 더 필요할까요?

당시 인구 숫자에 끼지도 못하는 여자의 존재였건만, 그런 여자들이 아내가 되고, 자식을 낳아 어머니가 되면, 남편들을 옴짝달싹 못하게 만드는 파워를 가지게 되어 있으니, 그 파워 역시 그때에도 벌써 있었던 것이 아니겠습니까?

그러니 바람기가 일반적인 그 당시 남편들도 아내에게 “잠시 유곽에 갔다가 올게!” 라며 떳떳이 갈 수 있는 게 아니라 “나, 도서관에 갔다 올게!”하고 거짓말을 해야만 하였나 봅니다.

남편이 공부하러 도서관에 가겠다는데 아내가 무슨 토를 달아 제재할 겁니까?

마치 자녀들이 놀러 나가는 거 같은데도 도서관에 간다면 아무 소리 못하는 요즈음의 부모들처럼 ….ㅋㅋㅋ

아마도 집요한 아내들은 “그래요? 나도 같이 갑시다!” 하고 함께 따라 도서관으로 왔을지도 모르지요. 그리곤 옆에 앉아 요리책을 보던지, 소녀경(素女經)을 읽던지…. 이런 아내들의 남정네는 도서관에서 책을 펼친들 그게 머리에 들어왔을까요? 마음은 바로 창 밖 건너편 콩밭에 가 있었을 텐데··.ㅋㅋㅋ.

한 가지 재미있는 것은 그 광고판에 새겨진 발의 크기로 성년과 미성년을 구분하였다는 겁니다. 발 크기가 그것보다 크면 들어올 수가 있고, 그것보다 작으면 집에 가서 젖 좀 더 먹고 오라고 말입니다. 얼마나 재미있는 착상인가요!

내 발은 분명 그것보다 크기에 들어갈 자격(?)이야 넘치지만 이제는 허물어진 유곽의 입구를 찾을 수가 없으니 문고리를 잡을 수도 없고…. 오호, 통재로다.

광고판의 아낙은 아직도 예쁜 아낙인 채로 나에게 손짓을 하는데, 옆에 선 부인은 나의 손목을 잡아끄니....ㅎㅎ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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