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흔적을 찾아서(56)-고린도 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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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덴에서의 전도사역에서 큰 성과를 거두지 못한 바울은 결국 고린도에 이르러 “아굴라”라 하는 본도에서 난 유대인을 만나 1년 6개월이라는 비교적 긴 시간동안 장막 만드는 일을 하며 안식일마다 복음을 전파하여 교회를 설립할 수가 있었습니다. (행18:1-11)

교회가 어느 정도 정착되며 성장하게 되자 사도 바울을 시기하던 유대인들로부터 고소를 당하였으나 아가야의 총독, 갈리오가 재판장이 되기를 원치 않자 유대인들의 폭거가 시작되어 브리스길라와 아굴라 부부와 함께 고린도를 떠나 에베소에 들려 그들을 남겨두고 안디옥으로 돌아가며 2차 선교여행을 마친 후, 떠난 3차 선교여행 중 에베소에 3년동안 머물면서 고린도에서부터 들려오는 여러 문제들에 대하여 고린도 교회에 보내는 처음 편지가 “고린도 전서”인 것입니다.

지난 회에서 설명 드린 것처럼 그 당시 고린도는 그리스에서 가장 활발한 상업 중심지로서 국제적인 도시요, 아가야 지방의 수도였습니다. 그러니 여러 인종들이 모여 살며, 자연스레 동서 문화의 생활 습성과 또 여러 신들을 믿던 그네들의 종교가 서로 뒤엉켜 혼잡을 이루었던, 인구 60만명의 큰 도시이다 보니 심한 빈부의 차이와 부유층의 퇴폐적인 생활로 악명이 높은 곳이 되었지요.

고린도에서 들려오는 여러 가지 문제들 중 제일 큰 문제는 교회의 분열이었습니다. 바울파, 아볼로파, 베드로파, 그리고 그리스도파, 네 그룹으로 나뉘어져 서로 분쟁하며 마음과 뜻이 나뉘었는가 하면, 성적으로 타락한 교우들이 많았으며, 우상숭배와 제물에 대한 이견의 문제와 교우들 사이의 빈부 차이에서 오는 성찬식 문제 등에 대한 구체적이고 사목적인 대답을 해 주어야만 하였던 것입니다.

이 서간에서 다룬 문제를 살펴보면, 그리스의 스핑크스 때문에 오이디프스 콤플렉스라는 말이 이 땅에 생겨나서인지, 고린도 신자들 중에는 아버지의 아내를 취한 사람도 있었고(고전 5:1), 음행을 하고, 우상 숭배를 하고, 간음을 하며, 탐색하거나 남색(고전 6:9)하는 사람들이 많이 있었던 것 같습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결혼, 이혼, 독신 등 성윤리를 고린도전서 7장을 통하여 자세히 설명해 주었고, 그 외에도 교우들 간에 분쟁이 생겼을 때, 소송하는 문제(고전 6:1-8), 우상에게 바쳤던 제물을 먹는 문제(고전 8:1-13), 성찬의 집례시 부자들은 그들이 가져온 음식을 배불리 먹고 가난한 사람들은 굶은 사례도 있었기에 올바른 성찬례를 가르쳐 주었습니다.(고전 11:17-34)  

우리는 흔히 고린도 전서가 첫번째 편지라고 말하고 있으나 이 편지를 쓰기 전에 보낸 편지가 하나 더 있었음이 고린도 전서 5장 9절에 나타나지만 이 편지는 보존되어 있지 않다고 합니다. 이 편지를 보낸 후 고린도 교회 집사들이 바울을 모셔가려 에베소에 오기까지 하였으나 이 들로부터 들은 사정을 기초하여 편지를 쓴 후 디모데에게 직접 전달하게 한 편지가 현재 우리가 읽고 있는 “고린도 전서”인 것입니다.

그러나 디모데가 돌아와 고린도 교회가 회개하지 않았다는 보고를 듣고, 바울은 고린도 교회의 심각성을 인식하고 자신이 직접 고린도에 가서 수습하려고 고린도를 방문하였으나, 고린도 교회는 바울을 영접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더 큰 다툼과 분열이 생기게 되자 바울은 다시 에베소로 돌아와 “번민과 비통한 마음을 안고 울면서” 매우 격앙된 어조로 편지를 썼는데 이것이 고린도 교회로 보낸 “눈물의 편지”라고 알려 졌으나(고린도 후서 2:4), 편지를 보낸 후 후회를 하였다고 고린도 후서 7장 8절에 쓴 것을 보면 이 편지 또한 보존되지 못한 것 같습니다.

바울은 에베소에서 디도가 가져올 소식을 애타게 기다리고 있었으나 “은장색 소요사건”으로 인해 에배소를 떠나지 않으면 안되었습니다. (행 19:23-20:1)

바울은 에배소를 떠나 마게도냐를 거쳐 오순절 안에 예루살렘에 도착할 계획을 갖고 드로아에 도착했으나 아직 디도가 오지 않아 심령이 편치 못한 마음으로 다음 행선지인 마게도냐(빌립보)에 가서야 드디어 디도를 만나 “고린도 신자들이 회개하고 바울을 영접하게 되었다”는 기쁜 소식을 듣게 되어 걱정과 슬픔은 기쁨과 감사로 변하게 되었습니다. (고후 7:6,13-16)

바울은 기쁨과 감사에 넘쳐 다시 편지, 지금 우리가 읽고 있는 “고린도 후서”를 쓴 후 디도가 이 편지를 가지고 고린도 교회로 돌아가 사역을 하게 되었습니다. (고후 8:16-24)

그래서인지 특별히 고린도 후서는 사도직에 대한 편지라 할 수 있을 정도로 사도직의 본질과 역할을 잘 설명해 주고 있습니다. 이런 상황을 감안하면 바울은 모두 4번에 걸쳐 편지를 보냈으나 2개의 편지가 남아 있지 않아 결국 남은 두 편지가 전서와 후서로 기록이 된 것인가 봅니다.

이렇듯 말도 많고 탈도 많았던 고린도 교회의 자취는 고린도 유적지에 남아 있지 않아, 신 고린도에 있는, 사도 바울 기념 교회(The Church of Saint Paul at Ancient Corinth, Greece)로 갔습니다. 1858년의 지진으로 구 고린도와 신 고린도로 나누어진 후에 지어진, 별로 오래 되지 않은 건물이라는 듯이 교회는 깨끗하게, 조금은 현대식으로 지어진 “희랍 정교회”입니다.

교회 정면 문 위의 공간에는 두 사도의 모습이 모자이크로 그려져 있는데, 한쪽은 열쇠를 들고 있는 사도 베드로의 모습이고, 다른 쪽은 편지들을 손에 들고 있는 사도 바울의 모습입니다. 두 사도들이 이곳을 다녀가셨지만 한번도 이곳에서 함께 만난적이 없었기에 서로 맞은편에 세워지게 되었답니다.

입구의 오른쪽 벽에는 사도 바울의 유명한 고린도 전서 13장이 그리스어로 대리석에 기록되어 벽에 붙어있고, 맞은편에는 제 1대 담임교역자 사도 바울을 비롯하여 현재까지 89대 담임 교역자의 이름이 기록되어 있는 대리석이 붙어있습니다.

교회 안에 들어서자마자 천정 빼곡히, 한치의 빈틈도 없이 그려진 성화들이 눈을 어지럽힙니다. 그 성화 하나 하나가 다 의미가 있고 뜻이 있어 그것을 그리는 사람들에게는 물론 보는 사람들에게도 많은 감동과 감화를 주었을 터인데, 올려다보는 나의 눈은 매우 현란하다 못하여 어지럽기까지 하니 이 무슨 조화일까요?

눈에 보이는 예수님의 상이나 사도들의 모습 또한 성지 순례를 하며 들렸던 교회들 마다 다르니, 결국 우리가 마음에 가지고 있는 예수님의 모습은 우리들의 마음에 따라 바뀔 수가 있다는 말일까요?

너무나도 변화가 많은 천장화이기는 하지만 그려지는 형식, 즉 모든 돔의 정 중앙에는 예수님의 초상을 그리고, 이 기둥에는 사도, 이 벽면에는 교부들처럼 그 위치는 교회의 교리로 정하여 모든 교회가 같게 되었다 하더라도 그려지는 예수님은 한 분인데 그 모습들이 모두 다르게 그려졌기에 내 마음 속의 예수님을 그림위에 투영하며 한참을 올려다 보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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