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흔적을 찾아서(34) 갈멜산(Mount Carmel)-신들의 결전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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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한 나라가 약한 나라를 침공하여 속국으로 만들든지, 아니면 정략 결혼을 통하여 세를 불리며 또 다른 인접의 나라들과 대치하던 일은 중세시대 말기까지 만연하게 이어져 온 약육강식의 역사였습니다. 이런 경우, 약한 나라에서 강한 나라를 섬긴다는 증표로 삼는 것이 강한 나라에서 섬기는 신의 신전을 약한 나라에 세우는 것이었습니다.

유대나라가 북 이스라엘과 남 유다 왕국으로 분열된 후, 북 이스라엘의 7대 왕인 아합은 이스라엘 왕들 중 제일 악한 왕이라고 평가받는 왕이었다고 합니다.

그러니 북 이스라엘 왕국의 국력은 매우 약하여질 수밖에 없었겠지요.

그래서 아합은 자기의 안전을 보장받기 위하여, 그 당시 오늘날의 스페인에까지 이르는 거대한 지중해 세계의 패권을 휘어잡은 지중해변 동쪽 끝의 도시국가 연합체인 페니키아의 공주, 이세벨과 정략적인 결혼을 하였습니다. 그리고는 페니키아의 신 바알의 신상을 북 이스라엘 안에 세울 뿐만 아니라 바알의 아내라고 사람들이 생각하던 아세라 신상도 만들어 놓았습니다.

북 이스라엘을 개국하던 초기에 여로보암이 금송아지 우상과 제단을 만들어 놓고, 하나님이라며 섬기게 하였었기에 금송아지 우상을 떠나 바알을 섬기는 일 역시 그리 힘든 일은 아니었을 것입니다.

더군다나 금송아지를 섬기는 동안에도 하늘이 무너지지도 않았지만 막상 페니키아를 섬기지 않으면 경제, 군사적인 위협을 당할 수 있다는 두려움 때문에 “여호와 하나님이 신이 아니라는 것도 아니고, 또 계시지 않은 분이라고 부정하는 것도 아닌데, 바알을 함께 섬긴다고 문제가 있을까?”라고 자위하며 하나님을 떠나 있을 때, 3년 동안 비도 이슬도 내리지 않는 큰 가뭄으로 온 나라가 황폐하여 백성들이 신음할 때 여호와의 말씀이 엘리야에게 임하여 엘리야를 앞세우신 여호와 하나님과 바알과 아세라를 섬기는 선지자들과의 싸움이 있었던 곳이 바로 여기, 송아지 우상이 있던 텔 단에서 남서쪽으로 약 130km 떨어진, 갈멜산 이었던 것입니다.

싸움터로 오르는 완만히 경사진 산비탈에는 올리브 나무가 무성하고, 목초지에서는 소들이 한가로이 풀을 뜯는 모습이 참으로 목가적인 풍경이었습니다.

"저 소들이 제물로 바쳐졌던 소들의 후예인가?" 서로 농을 주고받으며 비탈길을 올라가니 정상에는, 1868년에 세워진 '므흐라카' (Muchlaka, 불의제단)라 불리는 갈멜 수도원이 자리를 잡고 있었습니다.

로마의 역사가 타키투스(Tacitus)가 "동상도 신전도 없이 오직 제단과 예배만 있는 산"이라 하였다는 이곳에….

수도원 옆 평평한 단 같은 곳에 서니, 낭떠러지 아래로 멀리 기손 시내가 흘렀다는 평야가 보였습니다.

그리고 지금 우리가 서 있는 이곳이 열왕기 상 18장에 기록된 그 옛날, 엘리야가 혼자서 외롭게 싸우던 그 정상의 자리라는 박목사님의 설명을 들었습니다.

1 대 450! 이세벨이 섬기는 바알의 선지자들 450명과 숫자로 볼 때에는 도무지 승산 없는 싸움입니다. 민주주의 원칙인 다수결로 결정을 하여도 이건 너무나도 자명한 결과일 것이고…. 더군다나 이세벨이 섬기는 이방신의 선지자들에게 하나님을 섬기는 모든 사람들이 다 죽은 후이니 말입니다. 그래서 엘리야는 숨어 다녔었나 봅니다.

여호와의 지시대로 숨어 다니던 엘리야를 하나님이 부르셨습니다. 그래도 인간적인 두려움과 조심성은 있어, 친분이 있는 오바댜를 통해서 아합을 만나는 일을 주선하곤, 하나님의 말씀대로 바알의 선지자들에게 도전장을 내었지요. “누가 진짜 신인가?”를 가리자고….

가리는 방법은 각을 뜬 소를 제물로 바쳐 태우는 방법에 서로가 합의를 하였습니다.

숫자가 많은 바알 사제들에게 먼저 그들의 신을 불러 보라고 하였지요. 한나절이 지나도록 외쳐 불러 보고, 자해를 하기도 하였으나 그 단 위에 각 떠 올려진 소는 탈 생각을 하지 않았습니다.

일단 서로 믿을 수 있는 신을 가리는 싸움을 하기로 한 이상, 이제 그 수적 열세에 두려워해야 할 엘리야가 아니지요. 그래서 그네들을 비웃고 조롱하기도 하였습니다 (왕상 18:27).

저녁 소제 때가 될 때까지 응답이 없으니 이젠 엘리야의 차례가 되었습니다. 불로 태워야 할 각진 송아지에 물을 부으라고 명합니다. 태워야 할 각진 송아지에 물을 부으라니? 물하고 불은 서로 상극인데….

얼마나 많이 부었던지 그 물이 도랑에도 가득 찼다고 합니다(왕상 18:35). 그리곤 하나님께 간구를 하였지요(왕상 18:36). 결과는 뻔한 게 아니겠습니까? 여호와 하나님의 불이 그 도랑에 찬 물까지 다 말려 버리셨다니까요….

이 결과를 본 군중들이 바알의 선지자 450명을 기손 시내로 끌고가 다 죽여 버렸습니다. 한 사람도 남김없이…. 그러니 아합의 부인인 이세벨이 길길이 뛸 수 밖에….

그래서 싸움에 이긴 엘리야가 오히려 19장 2절에 와서는 현상 붙은 사나이로 전락하여 숨어 다니게 되었습니다. 엘리야의 하나님에게 환호하며 바알의 사제들을 죽이던 그 사람들은 다 어디로 갔는지…? 왜 또 태도를 돌변하여 바알을 믿어야만 했는지…?

알 수 없는 것이 사람 마음이요, 어느 곳에서 불어올지 모르는 것이 바람이고 보면, 밟으면 밟혀야 하는 민초야 그 바람에게 운명을 내맡기는 수밖에 없었나 봅니다. 두려움에 광야로 도망가 로뎀나무 아래 앉아 탄식하며, 하나님께 죽기를 바라는 엘리야의 인성!

도대체 인간의 믿음의 한계는 어디까지 일까요? 얼마만큼 하나님의 능력을 보고 체험해야만 하는 것일까요? 결국 호렙산을 다녀 오고 나서야 하나님의 음성을 들을 수 있게 된 엘리야가 되어 하나님의 일을 하다가 회오리바람을 타고 하늘로 오르는 영광된 인성을 마치게 되었습니다(왕하 2:11).

여호와 하나님을 믿는다고 하면서도 예수님의 이름 위에 세워진 그 교회에 누군지 이름 모를 신까지 끌고 들어와 믿음의 자유를 외치고, 진리의 길은 하나뿐이 아니라고 우겨대는 현대의 신학자와 목사님들!

2021년 새해 벽두, 전 세계가 이목을 집중하던 미국의 의사당에서 기도를 하던 의원이자 목사라는 사람이 기도 말미에 A Men에 이어 A Women을 읊조린 것을 과연 어떻게 이해를 하여야 하려는지….

하나님의 세미한 음성을 들은 엘리야가 절실히 필요한 요즈음인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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