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wanghyunsoo
마인즈프로덕션 대표
블로그 ( 오늘 방문자 수: 152 전체: 273,087 )
임진강의 뭇 새들 자유로이 넘나들며 날건만
Hwanghyunsoo

 

1995년 1월, 일본 고베로 출장을 갔었다. <아시아 문화예술진흥 연맹(FACP)> 총회가 그곳에서 열렸는데, 한국에서는 각 언론사의 문화사업 담당자 등 20여 명이 참석하였다.

FACP는 한국, 필리핀, 홍콩, 일본, 대만, 싱가포르 등의 공연 기획사들이 중심이 되어 창립한 국제적인 공연 예술 협의체로 매년 회원 국가별로 돌아가면서 총회를 개최하였다.

아시아 지역 공연 예술가들의 협의 및 정보 교환을 하는 자리였지만, 당시만 해도 미국이나 유럽의 공연 프로그램을 일본의 공연 기획사가 아시아 지역 투어를 먼저 유치한 후, 가까운 한국, 홍콩, 대만으로 재 판매하는 창구 역할을 했다.

그들이 판매하는 프로그램은 주로 베를린 필하모니 오케스트라나 뉴욕 필하모닉, 빈 필하모닉 등 세계 정상급 클래식 연주 단체였다. 그러한 연주 단체들을 초청하려면 출연료도 만만찮지만, 60여 명이나 되는 출연자들의 항공료 및 숙식을 제공해야 하기 때문에 한 나라에서 단독으로 초청하는 것은 엄두가 안 났던 시절이다. 그래서 FACP는 대개 대형 연주 단체가 일본 공연이 끝난 후, 가까운 나라로 순회공연을 조정하는 일종의 마켓이었다.

1995년 일본 고베 FACP 총회가 잊혀지지 않는 이유 중의 하나가 ‘고베 지진’이다. 당시 총회 일정은 4박 5일이었는데, 출장에서 돌아온 3일 뒤에 고베 지진이 일어났기 때문이다. 그때 함께 출장을 갔던 동료들 사이에선 “하마터면 우리 모두 줄초상 날 뻔했다”는 농담이 오갔을 정도로 위기 탈출을 안도했던 분위기였다.

출장 당시 느꼈던 고베는 깨끗하고 차분한 이미지를 지닌 도시였다. 1950년대 고베에는 일본에서 오사카 다음으로 한인들이 많이 살았다고 한다. 그래서인지 거리를 걷다 보면 흰 저고리에 검정 치마를 입은 여고생들을 쉽게 볼 수 있었다.

타국에서 한국인을 본다는 것 자체만으로도 반가웠지만, 한편으로는 ‘저렇게 입고 다니면 일본인들이 해코지하지나 않을까?’하는 우려도 들었다. 그런 조선학교는 조총련, 그러니까 북한의 지원을 받는 학교였다.

스스로 소수자로의 정체성을 세우기 위해 조선인임을 상징하는 흰 저고리를 교복으로 입고 다녔다. 지금은 북한의 경제가 어려워 세가 많이 줄어들었지만, 1960~70년대만 하더라도 일본 전역에 150개 학교에 학생 수도 수만 명에 달했다고 한다.

내가 출장을 갔던 1995년만 하더라도 조선학교의 차별이 심하던 때였다. 당시는 북한이 KAL 기를 폭파하기도 하고, 범인 김현희가 재일 조선인이라는 설도 있었다. 또한 북한이 핵확산 방지조약을 탈퇴하고 ‘핵을 보유하고 있다’는 추측이 돌던 때이어서 일본 내 극우 단체를 중심으로 조선학교에 대한 노골적인 공격이 시작되었다.

하물며 조선 여학생 교복을 칼로 베거나 물리적 폭력을 가한 ‘치마저고리 칼질’ 사건이 있을 정도로 재일 조선인에 대한 적개심이 깊었던 시절이다.

 

 

고베에 거주하는 한인들은 합성 피혁 신발 산업에 종사하거나 한국 음식점, 식자재점 등을 운영하고 있었다. 소위 ‘케미컬슈즈’라고 불리는 합성 피혁 신발은 일본 경제 성장에 편승하여 판매가 급증하였고, 그 제조 공정의 하청을 한인들이 맡아서 일을 하게 된다.

1970년대 초에는 조합 기업이 304개, 총 종업원 수가 6,700여 명이었는데, 그 중 절반 이상이 한인들이었다. 하지만, 고베 지진 이후 한인 신발 공장의 80%가 조업을 할 수 없을 정도로 큰 타격을 입었다고 한다.

그리고 한인들이 주로 하는 사업이 야키니쿠 라는 불고기 식당이다. 야키니쿠(소육 ?肉 やきにく)는 한국의 고기구이 문화를 말하는데, 숯불을 피워 석쇠 위에 고기를 구워 먹는 것으로 고베를 찾는 외지인들이 꼭 한번 들려 먹는 맛집들은 주로 한인들이 운영하고 있었다.

이러한 재일 조선인들의 이야기를 다룬 영화가 있다. 2005년, 일본의 주요 영화상을 휩쓴 <박치기>다. 1968년 교토. 히가시 고와 조선고의 불량배들은 늘 사이가 좋지 않았다. 조선 여학생을 희롱하는 사건으로 그들은 마주치기만 하면 피 튀기는 패싸움을 했다. 시간이 지날수록 왜 싸우는지는 모르는 채 사이는 점점 악화된다.

그러던 중 진보적 성향의 고등학교 선생 권유로 주인공 코우스케가 조선고에 친선 축구 시합을 제안하러 간다. 거기서 플루트를 부는 경자의 모습에 코우스케는 첫눈에 반한다. 경자에게 다가가기 위해 금지곡인 북한 노래, ‘임진강’을 배우고 한국어를 공부한다. 코우스케의 순수한 모습에 경자도 마음을 열어가지만, 일본 학생들과 조선 학생들 간의 싸움은 점점 더 치열해진다.

 

영화 속 ‘재일 조선인’들은 불행의 연속이다. 일본 내 조선인들의 불투명한 정체성과 북한을 고국이라 여기면서도 선뜻 귀향선을 타지 못하는 고민 등이 답답하게 묘사된다.

코우스케에게 경자가 "나와 결혼하면 국적을 포기할 수 있어?"라고 묻는 장면은 모든 재일 조선인들의 고민을 대변하는 듯하다. 민감한 소재로 아픈 감성을 담아낸, 일본 영화의 깔끔하고 단정함이 오롯이 살아 있는 영화이다.

영화 속에 흐르는 노래 ‘임진강’은 그런 점에서 매우 의미 있는 메시지를 던진다. ‘임진강’은 일본에서 1968년에 <더 포크 크루세더스(The Folk Crusaders)>가 리메이크해 발매했으나 조총련이 저작권 문제를 제기해 바로 금지곡이 된다.

 

"임진강 맑은 물은 흘러 흘러내리고/ 새들 자유로이 넘나들며 날건만/ 고향 남쪽 가고파도 가니/ 임진강 흐름아 원한 싣고 흐르느냐/ 북녘의 대지에서 남녘의 하늘까지 날아가는 물새들아/ 자유의 사자들아 누가 조국을 반으로 나누어 버렸느냐/ 누가 조국을 나누어 버렸느냐"

 

이 노래의 원작은 북한 국가를 지은 월북 작가 박세영이 작사한 것이다. 그러니까 북한 노래인데, 그래서 남한에서도 민주화 이전까지는 불리지 못했고, 북한에서는 서울 출생인 박세영이 ‘내 고향 남쪽 땅 가고파도 못 가니'라는 실향의 아픔을 담았다며 한동안 금지된다. 어쩌다 보니 남북한, 일본, 세 나라에서 나란히 인기를 얻고 금지곡도 되고 다시 해금이 된다.

이 곡이 일본에서 인기가 있었던 것은 재일 동포들의 고향이 임진강 아래인 남한 출신이 많았다는 점이다. 그래서 ‘임진강’은 재일 동포 사회에서 ‘재일 아리랑’이라 할 정도로 꾸준히 사랑 받는데, 소프라노 전월선과 박영일, 김연자 등이 불렀다. 한국에서는 양희은, 임형주, 적우, 김연자 등이 불렀고, 드라마나 영화의 테마송으로 삽입되었다.

노래 ‘임진강’은 해금됐지만, 휴전선을 가로질러 흐르는 임진강을 자유로이 넘나드는 건 여전히 뭇 새들뿐이다. ‘임진강’ 노래가 만들어진 것이 1957년 이었으니 64년이 지났는데도 임진강은 아직도 자유롭지 못한 강이다.

희망은 때로 생각지도 못한 곳에서 피어난다고 한다. 똑 같은 노래를 부르면서 왜 이념 타령만 자꾸 하는가? 좋든 싫든, ‘임진강’에서 남북이 만나 평화의 희망을 찾아보았으면 좋겠다.

 

 

 

<저작권자(c) Budongsancanada.com 부동산캐나다 한인뉴스, 무단 전재-재배포 금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