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wanghyunsoo
마인즈프로덕션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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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디오 시그널에서 찾은 ‘마음에 담았던 음악들’
Hwanghyunsoo

 

지난 토요일에 2박 3일로 저 멀리, 포인트 필리(Point Pelee) 국립공원으로 캠핑을 다녀왔다. 포인트 필리는 캐나다 온타리오 주 남서부 윈저(Windsor)에서 50Km 남동쪽에 있는데 캐나다 최남단, 그러니까 한국으로 치면 ‘땅끝 마을’ 쯤으로 이해하면 된다.

5대호 가운데 하나인 이리 호수(Lake Erie)가 바다처럼 보이는 곳으로 이 호수의 물이 흘러 나이아가라 폭포로 떨어진다. 토론토 노스욕(North York)에서 자동차로 4시간 20분 정도 거리에 있지만, 휴게실을 들르면 실제로는 5시간 정도 소요되기 때문에 하루 코스로는 엄두가 나지 않는 곳이었다. 벌써부터 포인트 필리는 꼭 한번 가보고 싶었는데, 함께 여행한 친구 부부가 4개월 전에 캠핑장을 예약해 놓아서 갈 수 있었다.

캠핑장이지만 우리 부부는 텐트에서 잘 장비도 없고 해서 차박을 했다. 밴(van)의 가운데 의자를 뜯어내고, 뒷자리를 접어 넣으니 훌륭한(?) 잠자리 공간이 만들어졌다. 여행기간 동안 필요한 침구류, 먹을 것, 입을 것, 땔 것 등을 챙기니 자동차 반쯤 가득 찼다. 함께 간 친구가 ‘캠핑을 하려면 반 이삿짐이야’ 했던 말이 떠올랐다.

그곳으로 가는 동안 무료함도 달랠 겸 아는 선배가 준 음악 시디(CD)를 틀었는데, 곡이 무려 235개나 들어 있었다. 내가 살면서 한번쯤 들어본 노래를  전부 집어넣은 것 같은 느낌이었는데, 전문가가 MP3로 편집해서 총시간이 10시간 정도 되는 어마어마한 분량이었다. 그러다 보니 그동안 시디를 끝까지 들을 수 없었는데, 이번에 여행을 오가며 전 곡을 마스터하게 됐다.

“여보, 이 곡이 무슨 노랜 줄 알아?” 아내가 라디오 시그널로 자주 듣던 음악을 맞춰 보라고 한다. “음, 이거 ‘박원웅과 함께’ 시그널 아닌가?” 했더니, “아니지 이건 ‘2시의 데이트’ 폴모리 악단의 엠마뉴엘(Paul Mauriat – Emmanuelle)이지”라고 한다.

“그런데, 박원웅 씨 죽었다고 했지?” “응, 한 4년쯤 됐나? 라디오 조정선 피디 페이스북에 떴던데…” “박원웅 씨는 원래 피디로 들어왔다가 디제이가 됐잖아. 그런데 그렇게 나이가 많지 않을텐데 돌아가셨네. 무슨 병이래?” “나도 모르지, 갑자기 돌아가셨대” 하며 쳐다봤다.

아내도 같이 MBC에 근무했기에 이런저런 방송가 사정에 관심도 많고 기억하는 것도 많다. 차 안에는 ‘김기덕의 2시의 데이트’와 김광한의 ‘팝스 다이얼’의 시그널 뮤직도 이어져 흘러나왔다.

“라디오 프라임 타임인 저녁 8시에 ‘황인용의 영 팝스’와 ‘박원웅과 함께’가 한판 붙었는데, 기타 줄 소리에 맞춰 인사를 건네는 황인용이 이겼지” 했더니, “밤에는 이종환의 ‘밤의 디스크쇼’나 이문세의 ‘별이 빛나는 밤에’를 들었는데… 이 시디 계속 들으면 ‘별이 빛나는 밤에’ 시그널도 나오겠다. 그지?”

“그런데, 이종환 씨도 돌아가셨지? 그 분은 독특한 목소리 톤으로 에코 잔뜩 넣어서 시 낭송도 많이 했잖아” “그럼, 김광한도 죽었는데…” “임국희 씨는 살아 계시나? 그 분은 커피를 좋아해서 아침마다 친한 후배들하고 정동 회사 앞 다방에 몰려다니고 했는데, 최신 팝보다는 올드 팝 위주로 많이 틀어 주었지.”

차 안의 대화는 이렇게 이어지고, 우린 1980년대의 시간 속에서 노닐고 있었다.

 

지금은 인터넷이 발달해서 마음만 먹으면 원하는 음악을 마음대로 들을 수 있다. 하지만, 1980년대만 하더라도 음악을 제대로 접할 수 있는 매체는 라디오 밖에 없었다. 그래서 원하는 곡을 내 것으로 만들려면 카세트 테이프나 LP 레코드 판을 사야 했다.

그렇지만 가난했던 시절에 카세트테이프를 사는 것조차도 호사로운 일이어서 오로지 라디오에서 좋아하는 노래가 흘러나오면 닥치는대로 녹음을 했던 시절이다. 그래서 라디오는 지금의 스마트 폰 만큼이나 분신 같은 중요한 존재였다.

 라디오 음악 프로그램은 시그널뿐만 아니라, 오프닝 멘트가 감칠맛이 있었다. 오프닝 멘트는 디제이가 직접 쓰는 것은 아니고, 대개 작가가 써주었다. 작가가 원고를 넘긴다고 그냥 쓰는 것이 아니다. 멋진 말로 시작해야 청취자들이 다이얼을 돌리지 않기 때문에 피디와 디제이는 작가가 써준 글을 또 고치고 다듬었다. 청취자들은 좋은 말들을 녹화해서 음미하고 또는 그 글을 베껴 재 활용하기도 했다.

영화 한 대목을 옮겨 쓴 오프닝이다. “안녕하세요 FM 영화음악입니다. 살다 보면, 그러니까 우리 삶이 다하기 전에 꼭 용서를 구해야 하는 일들이 생기죠. 그런데 그 기회를 놓쳐버릴 때도 있습니다. 아마 그 사람도 그랬는지 모르겠어요. 그의 참회가 어떤 참회인지, 또 누구를 향한 참회인지, 저는 모릅니다. 하지만 그의 참회가 그 누군가에게 들리기를, 더불어서 나의 참회도 함께 빌고 싶다는 마음입니다. 오늘은 영화 <결혼은, 미친 짓이다>의 대사로 시작합니다.”

또 다른 오프닝이다 “요즘 나뭇잎의 색을 보면요. 싱그럽다는 표현이 딱 어울리는 파릇한 연둣빛입니다. 너무 연하지도 너무 진하지도 않게 그렇게 잎은 꽃이 진 뒤에 더 빛을 발합니다. 잠깐 나타났다 사라지는 화려함보다는 오래 보고 길게 볼수록 더 가치가 돋보이는 것들이 있거든요. 우리 주위에 한결같은 배경이 되어 주는 많은 것들에 대해서 한 번 더 생각해보게 됩니다.”라는 시적인 표현도 있다.

 

 

학창 시절, 한밤중에 라디오에서 흘러나오는 음악과 오프닝 멘트에 취해 본 경험이 다들 있을 게다. 혹시 내가 보낸 사연이 나올까 귀를 기울이던 그 시간은 좀처럼 잊혀지지 않는다. 라디오는 손으로 쓴 편지처럼 아날로그적 감성을 갖고 있고, 그 이름에서조차 낭만이 묻어 있는 듯하다. 그래서인지 이번 ‘포인트 필리 여행’ 중에 들은 라디오 시그널은 그동안 마음에 담았던 음악들을 다시 찾은 귀한 시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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