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wanghyunso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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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곧, 대통령 되실 분이시다”
Hwanghyunsoo

 

 신입사원 시절, 주위에 글 쓰는 선배들이 많이 있었다. 1980년, 언론통폐합으로 동아, 경향, 신아일보 등 신문사에서 온 선배들부터 잡지사 출신 기자, 피디와 작가들이 함께 근무를 했었다. 이렇게 다양한 이력을 가진 선배들과 생활하며 그들에게 들은 ‘풍월’은 아직도 잊지 못할 기억 조각들이다.  

 그중에 천금성이라는 작가가 있었다. 천금성은 1941년에 일본 오사카에서 출생해 해방과 동시에 귀국, 경남고등학교를 마치고 서울대 농과대학 임학과를 졸업한다. 그 뒤 1967년에 한국 어업 훈련소를 수료해 원양어선에 승선해 조업활동을 한 특이한 경력을 가졌다.

 1968년 첫 인도양 항해 때 쓴 단편 소설 <영해발 부근>을 1969년도 한국일보 신춘문예에 응모하는데, “혹시 당선되면 바다 위에서 연락이 안 될지 모르니 ‘당선소감’을 함께 써 보낸다”며 동봉해 보내는데, 그 글이 당선되어 문단에 첫발을 내딛는다. 또한 배를 탄 지 2년 만에 선장 자리에 오른 그는 1978년까지 12년간 줄곧 외항선을 타면서 바다 체험의 폭을 넓혀갔다.

 그 뒤, 배에서 내려 글쟁이로 살아 보려고 책도 내고 경향신문에 <표류도>라는 해양소설을 연재하지만, 그다지 큰 주목을 끌지 못한 채 10개월 만에 막을 내린다. 신문 연재를 끝내고 1979년 말부터 잇따라 불어 닥친 정치적 소용돌이 속에서 천금성 역시 길을 잃고 헤매고 있었다. 어쩔 수 없이 ‘다시 배를 타야겠다’는 생각을 굳혀가고 있던 중에 중앙정보부장 특별보좌관으로 재직 중이던 허문도로부터 만나자는 연락을 받는다.

 전두환이 11대 대통령으로 취임하기 얼마 전인 1980년 8월 중순께의 일이었다. 그 무렵 허문도는 ‘스리(3) 허(許)’ 가운데 한 사람으로 꼽히면서 권력의 중심에 서 있었다. 허문도는 천금성의 서울대 농대 2년 선배였고, 농대 학보의 편집장을 맡고 있던 허문도의 권유로 천금성도 학보 편집에 참여해 서로 알던 사이였다.

 “오랜만이다. 그동안 어떻게 지냈느냐? 오늘 점심식사나 같이 하자”고 해서 “좋습니다”라고 했더니, “11시 30분까지 퇴계로 아스토리아 호텔 커피숍으로 오라”고 하길래 간다. 호텔에는 중정 요원이 나와 기다리고 있었다. 그를 따라 승용차에 탔다. 차는 잠시 후 천씨를 말로만 듣던 ‘남산’으로 안내했다.

 천금성과 인사를 나눈 허문도는 ‘인사기록카드 복사본’을 주며 “너 전기 하나 써 볼래. 이분 거다”하며 “곧, 대통령 되실 분이시다”라고 말한다. 뒤에 안 일이지만 전두환 장군이 1961년 중정 인사과장으로 재직할 때의 인사기록 카드였다.

 천금성이 허문도를 만날 당시에는 웬만한 사람들은 ‘전두환 장군이 차기 대통령이 될 것이다.’라고 짐작하고 있었다. 최규하 대통령이 하야하기 전이었으나, 대학가에서조차도 ‘새 시대의 지도자는 이마가 벗어져야 하고…’라는 등의 블랙 유머가 은밀히 퍼지고 있었다. 그러나 천금성은 이런 국내 분위기를 몰랐고, 모르기 이전에 정치에 무심했다.

 

 

 천금성이 한 언론에 밝힌 회고다. “전두환 장군이 어떤 사람인지, 나는 전혀 모르고 있었어요. 더구나 전기류의 글은 써본 일도 없고요. 허 특별보좌관은 ‘거 왜, 워싱턴이나 링컨 전기 같은 것 있잖아. 원고지 삼사백 장이면 돼’라며 권했습니다. 까짓 거 삼사백 장을 못쓰랴 하는 생각에서 응했지요.” 착수금조로 50만 원이 든 봉투를 받아 들고 정보부에서 나온 천금성은 며칠간 괜히 이 일을 떠맡았다고 후회했다고 한다.

 “후일 생각해 보니 허문도 씨는 여러 가지를 고려해 나를 전기 집필자로 꼽았던 것 같아요. 우선 해양소설만 써왔으니 정치 사회적인 선입견이 없는, 좋게 말하면 ‘프레쉬한’ 작가로 여겼겠지요. 스타일이 행동 묘사 위주니까 글에 미사여구나 사족을 달지 않겠구나 싶었겠고요. 여기에 대학 때의 학보사 선후배로 안면도 있으니 나를 선택했을 겁니다. 아무튼 며칠간 고민하다가 전두환 장군의 장인인 이규동 씨를 만나 얘기를 듣고, 전 장군의 고향, 경남 합천을 찾는 식으로 집필작업을 시작했습니다.”라고 말한다.

 이렇게 해서 전두환의 전기 <황강에서 북악까지>는 씌어졌다. 천금성은 원고를 착수한 지 3개월 뒤인 1980년 10월 말에 1천2백 장 분량을 탈고한다. 원고가 완성되자 그즈음 청와대 정무비서관으로 있던 허씨가 수고했다면서 “대통령 각하의 전기를 썼다는 말은 아무에게도 하지 말고 시골에 가 조용히 있어라”고 당부해 고향 부산으로 내려간다.

 하지만 천금성이 챙긴 돈은 취재료로 받은 300만 원과 후에 인세로 받은 700만 원을 합쳐 약 1000만 원에 불과했다. 천금성은 그전에 ‘육영수 여사의 전기를 쓴 박목월 작가는 억대의 수고료를 받았다’는 이야기를 들었기에 막연한 기대를 하고 있었는데 너무나 실망스러웠다.

 게다가 문단에서는 천금성을 기피인물로 따돌렸고, 출판사나 잡지사들도 공공연히 냉대해 글을 써도 발표할 기회조차 얻지 못했다. 소설가로서의 지위마저도 상실할 위기에 빠진 것이다. 천금성은 허문도뿐만 아니라 권력층에 대한 불만이 가득해진다. 그는 만나는 사람마다 불평을 털어놓았고 이런 행태로 특수수사대에 끌려가 곤욕을 치르기도 한다. 하지만 그의 불만을 가라 앉혀야 했는지, 권력층은 그를 MBC의 편집위원 자리로 보낸다.

 1982년 MBC에 온 그는 아이러니하게 내 바로 옆 자리에서 근무했다. 당시 신참이던 나는 사무실 가장 구석에서 근무하고 있었는데, 그가 오는 바람에 자리를 비켜 주어야만 했다. 사무실 한 구석에 자리를 해주고는 아무도 관심을 갖지 않았다. 동료들의 무관심, 소위 ‘왕따’는 그를 무척 힘들게 했는데, 그나마 나와는 사이가 좋았던 편이다. 그는 내가 해군 출신이라는 것을 알고는 “나는 해병대 출신이에요”하며 바다와 관련된 이야기를 많이 나눴다. 스스로 말하길 ‘뱃놈’이라서 인지, 성격이 급하고 말을 거침없이 했고 목소리는 항상 격앙돼 있었다.

 가끔 “황형! 점심이나 같이 할까”해서 따라나서면, 대낮부터 소주를 시켰다. 한잔 들어가면 “황형! 나는 문화방송에 올 때, 저쪽(청와대) 사람들이 좋은 자리라고 해서 국장 자리를 주는 줄 알았어요. 크~으흐” 할 정도로 순진하고 철없는 소리를 하곤 했다. 그는 ‘내 답답한 속 좀 이해해 줘’ 하듯 거품을 물었지만, 나는 온전히 ‘천금성 편’이 되지는 못했다. 그를 이해할 수는 있었지만 정의롭지 못한 방법으로 문화방송에 보낸 ‘전두환 일당’이 싫어서였다.

 

 

 그는 직급으로는 차장이었지만, 특별히 업무가 없었고 보직이 없었기에 부하직원도 없었다. ‘낙하산’이라는 주변의 따가운 눈총에 시달리면서도 천금성은 MBC 재직 중에 전 세계 70여 개 나라를 돌며 <의지와 도전의 현장 오대양을 가다>라는 제목의 해양 다큐멘터리 3부작을 만든다. 하지만, 이 프로그램은 결국 방송을 타지 못했고 전두환이 백담사에 들어가기 직전인 1988년 11월에 천금성은 스스로 문화방송에서 물러나곤 만다.

 그렇게 떠난 그는 가끔 언론을 통해 흔적을 남긴다. 어느 해에는 ‘다시 원양어선을 탔다’고 했고, 또 다른 해에는 ‘해군 함정에 승선해 소설을 쓰고 있다’는 소식을 들을 수 있었다. 천금성에 대한 평가야 어떻든지 간에 그는 여전히 해양문학이라는 독특한 분야의 개척자로 남아 있다. 그러나 문학이 정치권력에 기생하거나 정치권력의 도구로 이용될 때 그 결말이 행복할 수 없다는 진리를 보여주었다고나 할까? 그는 2016년 6월, 암 투병 중에 다시 돌아오지 못할 항해를 떠난다. 며칠 전 6월 26일이 그가 세상을 떠난 지 5년째 되는 기일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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