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wanghyunso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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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재, 즉금 무스 거 하오?”
Hwanghyunsoo

 

 우리 어머니는 1931년에 함경북도 회령에서 태어나셨다. 다섯 살 때 부모님을 따라서 두만강을 건너 지금의 길림성 연길로 간다. 연길에서 차로 2시간 정도 더 들어가면 왕청현 하마탕이라는 마을이 나오는데, 조선인 100여 가구가 모여 담을 쌓고 성을 쌓아 그 안에서 농사짓고, 가축도 키우며 살았다고 한다.

 

어머니 말씀에 의하면 호랑이, 토끼, 노루 등 야생 짐승도 잡아먹는 험한 산골이었고, 비적(도적떼)들이 나타나면 동네사람들이 힘을 모아 싸울 정도로 척박한 오지였다.

 

 그러다가 광복을 맞이한 다음 해인 열다섯 살 때, 회령에 있는 이모네로 혼자 살러 간다. 마침 이모부가 보통학교 교감으로 재직하고 있어서 외할머니는 막내딸에게 글공부도 시키고 도시 맛이라도 접하게 해주고 싶어, 언니에게 청을 한 것이다.

 

 두 해가 지나서 38도선 이북은 조선민주주의 인민공화국이 수립되어 공산 치하가 되었고, 일제시대에 부역을 한 사람들은 모두 인민재판을 받아야 했다. 일제 강점기에 보통학교 교감을 한 어머니의 이모부도 재판을 피할 수가 없었다. 다행히 당 고위 간부가 학교 제자라 눈감아 주었지만, 언제까지 무사할지 모를 일이었다.

 

북한 점령군이던 소련군이 1948년 12월에 시베리아로 철수하며 미군도 남한으로부터 철수하라고 요구하며 정치적 공세를 펼친다. 1950년 정초에 전쟁이 터질 거라는 소문이 흉흉하게 돌았다.

 

 벌써부터 북한의 민족주의자, 종교인, 교육자, 지주, 기업가, 기술자들은 철저히 숙청을 하고 있을 때라 이모부 가족들도 몰래 피난을 준비하고 있었다. 어느 날, 이모할머니는 “오늘 밤 가족 모두 남한으로 피난 간다. 너도 같이 갔으면 좋겠는데, 혹시 가기 싫으면 지금 보따리를 싸서 연변으로 돌아가라. 만약 혼자 이곳에 있다가는 공산당원에게 잡혀가 곤욕을 치를 수 있다.”는 것이다.

 

어머니는 갑자기 혼자서 연변으로 돌아갈 생각을 하니 너무 두려웠다. “그럼, 피난 갔다가 언제 돌아오는 거예요?”라고 물으니, “빠르면 몇 달이고, 늦어도 일 년 안에는 돌아올 것 같다”는 말에 길을 따라 나선다.

 

그때 이모할머니가 어머니를 데리고 피난을 오지 않았으면 어떻게 되었을까? 그 뒤 이모할머니는 평생 동안 어머니를 친 딸처럼 보살펴 주었다. 그렇게 회령을 떠난 어머니는 세상을 떠날 때까지 고향으로 돌아가지 못했다.

 

실향민들에게 고향은 남다른 의미가 있는데, 어머니 주위에도 고향 사람들이 많았다. 함경도 말은 좀 투박하면서도 억센 느낌을 주어서 뜻을 잘 모르면 무슨 시비를 거는 듯한데, 그런 인상을 받는 것은 중국말과 비슷한 음조를 갖고 있기 때문이라고 한다.

 


 함경북도에서는 할아버지를 ‘아바니’ 또는 ‘큰 아바이’라 한다. 고모부, 이모부, 외삼촌은 모두 ‘맏아바니’ 또는 ‘몯아바니’라 한다. 남자의 경우 삼촌은 ‘아즈 바니’라 하고 여자의 경우 고모, 이모, 숙모는 ‘아재’라 한다. 부계와 모계의 구별이 없고 아버지와 어머니의 손 위냐 손 아래냐에 따라 호칭이 달라진다.

 

 흔히 쓰는 방언으로 가메치(누룽지), 안깐이(아낙), 동삼(겨울), 겡게(감자), 아지(나뭇가지)등이 있고, 러시아 방언이 뿌리내린 비지께(성냥), 마선(재봉틀), 거르마니(호주머니) 따위가 있다.

 

일제하 식민지 백성들의 애절한 삶을 기록한 이용악, 윤동주, 이태준의 문학 작품 속에서 함경도의 옛 방언을 만날 수 있다. “내 밥우 먹습꾸마.”라든가, “무스 거 하암둥? 일으 하기 입소. 자! 인차 집 우루가기오.”라는 글이 나온다. “일으 거 하갯는데 버뜩 대 못 들구서, 이래시문 둏을까 더래시문 둏을까 매삼질한단 말이오(일을 하려는데 버쩍 대들지 못하고, 이러면 좋을까 저러면 좋을까 안절부절못한단 말이오)”라든가, “어딜 떠 못 나구 영게서 한 뉠 살았디(어디로 못 떠나고 여기서 한평생을 살았지.)”라는 글도 보인다.

 

함경도하면 백두산과 그 언저리에서 펼쳐진 파란만장했던 민족사를 떠올리게 된다. 오래된 이야기다. 고구려와 발해가 멸망한 후 지금의 함경도는 여진족의 차지가 되어 버렸다. 그러다가 몽고의 내침 이후, 여진족을 몰아내며 고려의 많은 유이민들이 함경도 땅으로 옮겨가 살기 시작한다. 그리하여 고려 말, 조선 초기에는 두만강 유역의 함경도와 두만강 너머에 꽤 많은 고려인이 살았다.

 

용비어천가에는 그 무렵 선인들의 자취가 기록되어 있다. 조선을 세운 이성계의 고조할아버지 이안사가 전북 전주를 떠나 함남 원산 부근을 거쳐 정착한 오동(斡東)은 지금의 중국 길림성 훈춘시 경신진이란 곳이다. “두만강을 따라 펼쳐진 넓고 비옥한 평원, 그곳을 아름답게 수놓은 여덟 개의 호수와 러시아를 국경으로 한 길게 뻗은 산줄기에 목조(이안사의 호)가 있다”는 기록이 있다.

 

세종실록의 여기저기를 훑어보면, 세종대왕이 왜 그토록 함경도 땅에 대해서 애착을 가지고 있었는지 알 수 있다. 그것은 그곳이 고구려의 옛 땅이기도 하지만, 자신의 선조가 조선 창업의 터를 닦은 곳이기 때문이었다.

 

 

2014년에 방영된 KBS 사극 '정도전'에서 이성계(유동근)가 친위 사병들을 이끌고 나가며 외친다. "내레 한마디만 하갔어. 둑디 말라우!" 이성계가 걸쭉한 함경도 말투를 쓰자 시청자들은 낯설다는 반응을 보였지만, 이성계는 당시 변방이었던 함경도 사람이어서 사투리를 쓰는 것이 당연하다는 것이 제작진의 설명이었다.

 

정통 TV 사극에서 주연급 배우가 사투리, 그것도 함경도 사투리를 하는 것은 보기 드문 일이었지만, 덕분인지 평균 시청률이 15.8%로 동시간대 시청률 1위를 해 화제가 됐다.

 

나는 초등학교 저학년까지 일 년에 한 번 열리던 <회령군민회>라는 모임에 참석하였다. 비원이나 창덕궁 같은 고궁에서 열렸는데, 회령에서 온 실향민들이 모여 도시락도 먹고 술래잡기, 보물찾기 등도 해 상품을 받은 기억이 있다.  

 

어른들의 함경도 사투리 속에서 “아재, 즉금 무스 거 하오?”는 내가 그나마 알아듣는 말이었다. 꼭 그런 모임에는 흥에 겨워 노래를 불러 대는 이가 있기 마련이다. “두만강 푸른 물에 노 젓는 뱃사공/ 흘러간 그 옛날에 내 님을 싣고/ 떠나간 그 배는 어디로 갔소/ 그리운 내 님이여 그리운 내 님이여/ 언제나 오려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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