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ywlee
경제 및 시사문예 종합지 <한인뉴스 부동산캐나다>를 찾아주셔서 감사합니다.
앞으로 더욱 품격 있는 언론사로 발전하도록 노력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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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구 vs. 이승만- 만약 김구가 대권을 잡았더라면
ywlee

 

-때론 역사도 시대를 잘못 판단하는 듯  

 


1946년 미군정 자문기관인 민주회의 창덕궁 회의를 마치고 기념촬영을 한 이승만과 김구.

 

 “나는 우리나라가 세계에서 가장 아름다운 나라가 되기를 원한다. 가장 부강한 나라가 되기를 원하지 않는다. 내가 남의 침략에 가슴이 아팠으니 내 나라가 남을 침략하는 것을 원치 않는다. 우리의 부력(富力)이 우리의 생활을 풍족히 할만하고 우리가 강력히 남의 침략을 막을만하면 족하다. 오직 한없이 가지고 싶은 것은 높은 문화의 힘이다. 문화의 힘은 우리 자신을 행복하게 하고 나아가서 남에게 행복을 주기 때문이다.’ -백범 김구 <나의 소원>

 

 옛날 서당(書堂)에서 한문을 배우고 과거(科擧)시험 공부를 했을지언정 신식 제도권 교육이라곤 받아본 적이 없는 백범(白凡) 김구 선생. 그가 요즘 식자층도 선뜻 언급하기 어려운 저런 명언을 남겼다는 사실이 놀랍다. 배고픔도 해결하기 어려운 그 시기에 문화니 행복을 거론하다니, 그 앞선 선견지명에 고개가 절로 숙여진다.

 

 0…한국 현대 정치사의 상징 같은 존재 김대중-김영삼. 두 사람은 평생 정치적 동지이자 라이벌이었다. 때론 협력을, 때론 치열한 경쟁을 벌이며 민주화를 이끌었다. 이들에 대한 공과(功過) 평가는 아직 진행 중이지만 그들이 칠흑같이 어두운 시대에 조국 민주화에 기여한 것만은 분명하다. 두 사람이 없었다면 한국의 민주화는 더 늦춰졌을지 모른다.

 

 인간사회에는 어디나 라이벌 관계가 있게 마련이다. 멀리는 신라의 김춘추와 김유신, 고려의 정몽주와 정도전, 조선의 이순신과 원균, 근대 들어서는 삼성 이병철과 현대 정주영, 외국에선 미국의 케네디와 닉슨, 맥아더와 트루먼, 중국의 항우와 유방, 조조와 유비, 제갈량과 사마의 등이 유명 사례로 꼽힌다.

 

 이 관계는 건강하게 선의의 경쟁만 벌인다면 쌍방 간에 서로를 발전시키는 동력(動力)이 된다. 무릇 매사에는 건전한 경쟁관계가 있어야 발전하는 법이다. 어떤 경우든 일방이 독주하면 오만해지기 쉽고 현실에 안주해 발전도 없다.

 

0…한국 현대사에서 빼놓을 수 없는 두 인물, 김구와 이승만. 이들 역시 동지요 라이벌로 한 시대를 풍미한 특별한 관계였다. 나라를 잃고 헤매던 시절, 한 사람은 중국에서, 또 한 사람은 미국에서 조국광복이라는 공동의 목표를 위해 힘을 합쳤다.

 

 하지만 두 사람은 정작 그토록 염원하던 조국이 해방되면서 갈라지게 됐다. 이승만은 남한 단독정부 수립과 함께 초대대통령 자리에 올랐고 통일정부를 주장하던 김구는 이듬해 육군소위의 흉탄에 쓰러짐으로써 경쟁관계는 끝이 난다.

 

 해방 후 만약 이승만이 아니라 김구가 대통령이 되었더라면 지금 대한민국은 어떻게 되었을까? 상상컨대, 일제 앞잡이들을 깨끗이 처단하고 한미-한일 관계도 떳떳한 민족자주국가로 나아가지 않았을까. 특히 통한(痛恨)의 남북분단의 비극을 피하고 한민족 대동단결의 시기가 앞당겨졌을지 모른다.

 

0…대한민국이 해방공간에서 제1공화국까지의 핵심적 과제였던 민족통일정부 수립과 일제 잔재 청산에 실패한 것은 국내 지지 기반이 없던 이승만이 친일 잔존 세력을 자신의 정치적 기반으로 삼았기 때문이다.

 

 ‘지난날에 구애되어 앞날에 장애가 되어서는 안된다’는 논리로 친일보수세력의 이익을 보장하고 합리화했을 뿐 아니라 반공을 정적 제거의 만능 이데올로기로 악용했다. 그 악폐는 지금까지도 변함없이 이어지고 있다.

 

 일제잔재 청산이 좌절된 1차적 책임은 미국의 남한점령정책에 있지만 이를 더욱 공고화한 책임은 이승만에게 있다. 이 사람은 일각에서 아직도 국부(國父)로 추앙받고 있다. 

 

0…이승만의 과오는 너무나 많다. 12년 집권기간 헤아릴 수 없는 실수를 저질렀다. 보도연맹 학살사건, 거창양민 학살사건, 부산 정치파동과 발췌개헌, 사사오입(四捨五入) 개헌, 조봉암 사형, 3?15부정선거와 경찰 발포…

 

 6.25때는 북한군이 몰려오자 부랴부랴 야반도주하며 방송을 통해 “우리 국군이 적군을 격퇴하고 있으니 걱정말라”고 국민들을 안심시킨 뒤 자기는 이미 건너간 한강교 폭파를 지시해 다리를 건너던 수많은 사람들이  목숨을 잃게 했고 강을 건너지 못한 시민들은 인민군 치하에서 큰 고생을 했다. 이건 살인행위에 다름 아니다.

 

 그중에도 자신의 집권을 위해 단독정부를 서두름으로써 남북분단을 고착화시킨 점은 역사의 최대 치욕으로 남아있다.

 

0…이에 반해 백범은 “나는 통일된 조국을 건설하려다 38선을 베고 쓰러질지언정 일신의 구차한 안일을 위하여 단독정부를 세우는데는 협력하지 않겠다”며 1948년 4월 평양에서 열린 남북지도자회의에 참석하기 위해 38선을 넘어 간다. 그리고 돌아와 1년 뒤 총탄에 쓰러진다. 암살범 안두희 배후에는 누가 있었을까.

 

 역사에서 가정(假定)은 부질없지만 남북관계가 지금 같은 위기에 빠져있을 때 백범이 살아 있다면 어떻게 했을까? “내가 가서 담판을 짓고 오겠다”며 회색 두루마기를 휘날리며 판문점을 향해 달려가지 않았을까.

 

 한국사회에 정의가 정착되고 일본에게 저자세로 굽신대는 일도 없었을 것이다. 지금처럼 역사가 왜곡되고 뒤엉키고 정의와 불의가 혼동되는 사태도 없었을 것이다.

 

 이승만 시대가 다시 도래한 것 같은 현 한국사회를 보면서 역사는 반복된다는 사실을 새삼 확인한다.

 

0…남북관계가 금방 전쟁이라도 터질듯 험악하고 주변 강대국들은 서로 한반도를 지배하려 감 놔라 대추 놔라 간섭하는 현 상황은 어쩜 그리도 70년 전이나 달라진 것이 없을까.  

 

 이승만은 현실정치에서는 이겼지만 역사에서는 졌고 김구는 현실정치에서는 졌지만 역사에서는 승자가 되었다. 지금 백범을 추앙하는 수많은 국민들의 진심이 그것을 말해준다.

 

 “나에게 한 발의 총알이 남아 있다면, 왜놈보다 나라와 민주주의를 배신한 매국노 변절자를 백번 천번 먼저 처단할 것이다. 왜? 왜놈보다 더 무서운 적이니까.”(백범 김구)    (사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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