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탈북수기-뿌리 뽑힌 나무(23)
minjukim

 

 (지난 호에 이어)

 그렇게 하루 이틀이 멀다 하게 사람들이 죽으니 죽음이 자연스러운 일상으로 되어버리고 말았다. 그야말로 전쟁 때보다 더 많은 사람들이 굶어 죽고 있는데 국가는 아무런 대책이 없었다. 김정일은 이런 사실을 아는지 모르는지 군부대만 시찰하는 모습이 신문방송으로 소개되었다. 과연 인간의 가장 기본적인 권리인 배고픔조차 달래주지 못하는 사람이 어떻게 지도자가 될 수 있단 말인가?

 죽음의 그림자는 포위망을 좁혀 점점 우리집 곁으로 가까이 다가오고 있었고 점점 사람들의 불만과 원한은 극도에 달했다. 1996~1999년 사이에 300만명이 더 넘는 북한 인민들이 굶어 죽었다. 일시적일 줄 알았던 대량아사와 굶주림은 1995년부터 그때부터 20여년이 지난 현재까지도 진행 중이다.

7. 굶주림의 공포 속에 태어난 아들

 8개월 정도 평양건설에 나갔던 남편이 돌아오기 며칠 전에 나는 병원에서 아들을 낳았다. 병원 바로 앞에 시집에 10분 거리에 있었는데 그들은 알면서도 얼굴 하나 내밀지도 않았다. 나는 그들과 사이가 안 좋았는데 이유는 자기들을 돌보지 않는다는 것이다. 나와 동갑인 시누이와 내 엄마보다 더 젊은 시어머니는 최소한 남들이 다 하는 들판에 나가서 풀을 뜯거나 산에 가서 소나 무 껍질을 뜯어서 삶아서 먹는 것 외에는 사실 아무것도 할 줄을 모른다.

 신랑이 평양건설에 나간 사이에 나는 임신한 몸으로 어분도 만들고 다시마 국수도 만들어서 팔고 물도 팔고 할 수 있는 일은 다 해서라도 살아가려고 아등바등하느라 시집에는 자주 볼 새가 없었다. 나는 그들 모녀에게 집에만 있지 말고 나와 함께 어분 사료도 만들고 다시마 국수도 같이 해서 팔고 이윤을 나눠 갖자고, 아니면 떡 장사라도 함께 하자 고 몇 번이나 말했지만 그들은 장사에 영 소질이 없었고 도전을 두려워하였다. 그들은 내가 엄마와 함께 다시마 국수 파는 것을 보고 그들보다 내 친정집이 그나마 밥이라도 먹고 사는 걸 알고는 자기들은 먹을 것도 없이 고생하는데 며느리는 관심조차 없다고 늘 불만이었다.

 내 발등에 떨어진 불을 끄기도 힘든 세상에 임신한 며느리가 뭘 가져다주기만을 기다리는 얌체 시어머니와 시누이는 내가 아기를 낳던 말던 관심이 없었다. 어느 날 나는 낮에 무거운 것을 들고 많이 움직이다가 배가 아파서 병원을 급하게 달려갔는데 그날은 바로 일요일이라 당직의사 1명만 있었다. 침대를 배정받고 이부자리를 펴고 나서 엄마는 말했다. “아기 낳기 전에 내가 빨리 집에 가서 밥하고 미역국 해올게. 아마 2시간 정도 걸릴 거야. 너무 아프고 견디기 힘들면 당직 선생님 불러” 엄마는 급하게 집으로 돌아갔다.

 나는 엄마가 나를 혼자 두고 가버리는 것이 두렵고 무서웠다. 같은 방에는 다른 임산부 한 명이 더 있었는데 그는 아직 산통이 오지 않았다. 그로부터 30분도 안 되어 나는 심한 고통에 시달리고 참다 못해 비명을 지르기 시작했다. 옆에 누워있던 다른 임산부는 아기를 혼자만 낳냐고 시끄럽게 군다며 한마디 했다. 그러나 나의 고통은 는 더 커져만 갔다.

 “아니, 당장 아기를 낳을 것 같은데? 내가 당장 가서 당직 의사 불러 올게요, 조금만 참아요.” 같은 방 임산부는 이 말 한마디 던지고 당직 의사 부르러 달려갔다. 혼자 방안에 남겨진 나는 그가 나가자마자 양수가 터지면서 아이가 태어나 왔다. 갑자기 처음 당해보는 일에 나는 너무 두렵고 당황하여 어쩔 줄을 몰랐다. 잠시 후 당직 의사가 달려왔지만 이미 아이는 세상 밖으로 나온 후였다. 그렇게 나는 엄마도, 의사도 아무도 없는 방에서 혼자 아기를 낳았다. 그래도 쉽게 아이를 낳은 것 같아 다행이기도 했다.

 따뜻한 찰밥과 미역국을 들고 살며시 문을 열고 들어온 엄마는 내 옆에 아기가 누워 잠들고 있는 것을 보고는 소스라치게 놀랐다. “아니 넌 언제 벌써 아기를 낳았니? 참 그렇게 아기 빨리 낳는 건 첨 보네.” 엄마는 우리 4형제를 낳을 때마다 이틀씩 모진 산고를 겪어야 했다고 한다. 친정집에서 한 달 동안 산후조리를 하는 나에게는 그때가 천국이 따로 없었다. 하루에 서너끼씩 쌀밥에 미역국을 먹을 수 있었고 정말 그때 먹던 미역국은 내가 세상에서 제일 맛있게 먹은 국이었다.

 엄마는 새벽에 2시 3시에도 일어나 아궁이에 불을 지펴 밥과 국을 데워 주었고 상을 차려 주었다. 산후에 밥을 잘 챙겨 먹어야 빨리 회복이 되고 모유도 잘 나올 수 있다면서 말이다. 내가 엄마가 되고 보니 새삼 나의 어머니가 정말 존경스러웠고 직장을 다니면서 우리 4형제를 얼마나 힘들게 키워 왔을까 생각하니 정말 형언할 수 없는 고마움이 새삼 가슴에 밀려들었다. 그런 엄마를 내가 더 많이 도와 드렸을 걸 참 후회가 되기도 했다.

 아이가 태어나는 것은 커다란 축복이고 선물이지만 정작 품에 안고 보니 앞으로 어떻게 아기를 키워야 하나 걱정과 불안이 더 커졌다. 내 아기만은 배고픈 고생을 시키고 싶지 않고 이쁘게 잘 키우고 싶었다. 나는 과연 엄마로서 책임을 다 할 수 있을까?

 산후 한 달이 막 지났을 때 우리집에는 갑자기 시어머니와 시누이가 불쑥 찾아왔다. 우리는 그들이 그래도 체면이 있어서 손주 보러 온 줄로 알았다. 그런데 집안에 들어오자마자 대뜸 나와 동창인 시누이가 한다는 말이 참말로 억이 막혔다. “오늘 우리가 여기로 온 것은 우리 오빠와 올케가 서로 헤어지라고 말하려고 왔어요. 올케는 더 이상 우리 오빠와 살지 말고 헤어지세요.”

 상식적인 사고방식으로 볼 때 우리집 아버지, 엄마는 물론 나는 갑자기 뭐라고 대답을 해야 할지 말문이 꽉 막혀버렸다. 이때 달변가인 엄마가 나섰다.

 “참 사돈님, 실망이군요. 난 또 그래도 손주 녀석 한번 보려고 오신 줄 알았지요. 지금 와서 한다는 말이 아들 며느리 갈라서라는 말하려고 오셨다구요? 그게 이제 막 아기 낳고 산후조리를 끝낸 며느리한테 정말 할 말입니까? 지금 우리집에서 사위를 공짜로 먹여 주다시피 하는데 우리 입장에서 뭐가 아쉬울 게 있겠어요? 그리고 아들 며느리가 같이 살라 말라는 왜 다른 사람들이 정해 주는 가요? 살던 헤어지던 그건 그들의 결정이고 선택이지요. 그리고 시누이는 아직 결혼도 안 한 처녀가 오빠의 인생에 함부로 나서서 감 놔라 배 놔라 하는 건 어불성설이네요. 본인도 앞으로 결혼하면 어떤 일이 닥칠지도 모르는데 남의 인생에 대해 함부로 말하는 건 좋아 보이지 않아요. 오빠 문제는 오빠가 결정하는 거지요. 이왕 여기까지 찾아왔으니 저녁이나 한 끼 잡수고 돌아가세요!”

 그들은 아무 대꾸도 하지 못했다. 그리고 엄마는 저녁상을 차렸다. 그 두 여자들은 염치없이 밥그릇을 다 비우고 멋쩍게 돌아갔다. 사실 나는 그동안 한마디 말도 하지 않았지만 속에서는 분노가 끓고 있었다. 자기 아들이 가진 게 뭐가 있다고? 지금 내가 헤어지면, 그 아들은 엄마집에 돌아가서 한 달도 못되어 촐촐 굶을텐데 도대체 아무런 대책 없이 우리집에 찾아온단 말인가?

 “엄마. 나도 같이 살기 싫은데 차라리 잘 됐어. 나도 그냥 헤어질래. 우린 어차피 결혼 등록도 안 했으니 우리한테는 입도 덜고 좋잖아” 자존심에 상처를 받은 나는 도저히 그들이 용서가 되지 않았다. 하지만 엄마는 이제 막 태어난 아들을 위해 함부로 선택을 하면 안 된다고 나를 타일렀다.

 곰곰이 생각해 보니 사실 그들은 정말로 헤어지라고 하려고 한 게 아니라 나한테 시집의 본때를 보여주고 엄포를 놓으면 내가 자기들에게 관심을 좀 가져줄 수 있다는 생각에 그런 어리석은 행동을 한 것 같았다. 엄마는 며느리를 아들과 헤어지라고 말하면서 저녁까지 덥석 얻어먹고 가는 그들의 뒷모습이 사라지자마자 씁쓸한 미소를 지었다. 정말 그들이 내 남편의 핏줄이 라는 것이 창피하고 싫었다.

 사실 그들은 배짱도 자존심도 없는, 연약하고 불쌍하고 정말 대책이 없는, 내가 미워할 수도 없는 이 사회의 약자 들이었다. 어쩌면 국가에서 배급을 주지 않아 백성들을 굶주림에 몰아넣은 험악한 세상 때문인지도 모른다. 이 계기로 인해 남편에 대한 내 마음은 얼음장처럼 차갑게 얼어들기 시작했다.

 한번은 또 이런 일이 벌어졌다. 한번은 00공장 배급소에서 1년 가까이 밀린 쌀을 보름치 준다는 반가운 소식이 들었다. 아버지와 나 그리고 우리 식구들은 모두 같은 기업소였으므로 나는 아기를 집에 두고 배급 타러 나섰다.  (다음 호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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