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탈북수기-뿌리 뽑힌 나무(22)
minjukim

 

(지난 호에 이어)

6. 삶과 죽음의 사이에서

 평소에 어질고 고지식한 사람들은 장사를 하거나 차마 꽃제비로 나설 수 없어 며칠을 고스란히 굶어서 죽음을 맞이했다. 남동생의 친한 친구 명일이라는 애가 있었다. 그는 정말 똑똑하고 공부도 잘했고 예절 바르고 착했다. 만약 그가 한국에서 태어났더라면 서울대나 카이스트에 가고도 남을 총명한 친구였다. 그런데 그의 엄마는 식량을 구하러 할머니네 집에 간다고 나섰는데 한 달 두 달이 넘도록 아무 소식도, 돌아오지도 않았다. 할머니 집에 편지를 보내니 너희 엄마가 온 적이 없다는 답장만 왔을 뿐이다. 그들은 십중팔구는 할머니 집에 가는 도중에 열차 사고로 죽었다고 생각하였다.

 그에게는 지능 발달장애를 가진 여동생이 있었는데 동생을 먹여 살리려고 무척이나 애를 썼다. 하지만 20살이 겨우 되는 남자애가 할 수 있는 일이 별로 없었다. 돈 한푼도 없고 산에 가서 나무를 해 다가 장작을 팔아서 살기도 하지만 가까운 산은 벌거숭이가 되어 나무는 고사하고 풀조차도 다 뜯어 가서 깊은 산속까지 가야 하는데 그곳까지 갈 기력이 없어 그것마저 힘들었다. 우리집에서도 가끔 먹을 것을 주기도 했는데 자꾸 얻어먹는 걸 미안해 했다. 그는 내 동생의 가장 친한 친구였고 동생은 친구가 배곯으며 다니는 것을 늘 가슴 아파 했고 도와주지 못해 항상 미안해 했다.

 그러던 그가 식량을 얻으러 할머니 집에 갔다 왔는데 1주일간 집을 비운 동안 그의 여동생은 얼음장 같은 온돌 바닥에 1주일 내내 아무것도 못 먹고 죽어 있었다. 엄마도 못 찾고 쌀 한 톨도 얻어 오지 못한 그 친구는 동생 시신을 보관할 관이 없어서 담요에 싸서 우리 동네 명소인 솔밭에 묻었다고 한다. 그것도 동네사람 몇 명이 도와줘서 말이다.

 그러다가 며칠 후에는 그 친구마저 굶어 죽었다. 며칠 동안 우리집에 놀러 오지 않아서 동생이 그 친구 집에 갔더니 집에서 굶어 죽었다고 한다. 그렇게 똑똑하고 예절 바르고 아등바등 살아가려고 온갖 애를 다 쓰던 아까운 인재가 죽다니…

 남동생은 너무 슬퍼서 울고 또 울었다. 친구가 굶어 죽어도 아무 것도 해줄 수 없는 자책감에 가슴이 아파했고 우리 식구들도 다 울었다. 지금도 그 이야기를 적어 내려가려면 가슴이 아프고 눈물이 흘러내리는 것을 어쩔 수가 없다. “엄마. 왜 우리는 이렇게 사는 거야? 왜 모두 굶어 죽고 아무 대책이 없어. 이게 무슨 나라야? 아까운 내 친구가 왜 이렇게 죽어야 하는데? 이게 도대체 세상이 왜 이런 거야?” 아무도 대답해줄 수 없는 그의 절규는 사실 온 북한 인민들의 절규였고 외침이었다.

 그 친구도 다음날로 바로 담요에 쌓여 동생이 묻힌 솔밭에 함께 묻혔다. 갑자기 너무 많은 아사자가 발생하니 관을 짤 나무도 없지만 그 관까지도 땔 것으로 훔쳐간다. 관뿐이 아니라 묘비도 밤에 뽑아가 땔나무로 쓴다. 불을 땔 수 있는 것은 닥치는 대로 뽑아 가기 때문이다. 게다가 주변에 비슷한 묘지가 한꺼번에 생겨나니 분간이 어려워 묘를 잃어버린 사람들도 많다. 바닷가를 따라 펼쳐졌던 아름다운 백사장 푸른 솔밭은 대규모 공동묘지로 변해버렸다.

 그리고 바로 며칠 후에 우리 동네에 엄마와 한 학교에 다니던 선생님도 어린 아들딸을 남겨두고 굶어 돌아가셨다. 한 줌의 낟알이라도 딸과 아들에게 양보하고 엄마인 그 선생님은 맹물만 며칠 동안 퍼마셔서 죽기 전에는 온몸이 부은 채로 말이다. 남겨진 10살 짜리 딸과 12살짜리 아들도  며칠 안 되어 저 세상에 먼저 간 엄마를 따라갔다. 이번엔 내 엄마가 슬피 울고 또 우셨다. 어찌 안 그러겠는가? 같은 학교에서 동료로 지내왔고 우리와 이웃이기도 한 그 선생님의 남편은 일찍이 심장마비로 사망하여 미망인으로 힘들게 살아온 선생님이었다.

 또 어린 아들딸을 남겨두고 굶어 돌아가신 선생님, 우리집 건너편 옆집 언니도 임신한 몸으로 길바닥에 누워서 죽어가던 모습들이 기억에서 잊혀지지가 않는다. 한번은 장마당에 학교 선생이었던 여자가 너무도 굶주려 그만 정신이 이상해졌는데 떡을 사 먹고는 돈을 주지 않았다. 떡 장사꾼이 돈을 내라고 하자 그 여자는 미친 듯이 웃어 대면서 “돈? 내가 돈이 어디 있어? 김정일한테 가서 달라고 해!”라고 했다고 한다. 쩌렁쩌렁 큰 목소리로 이렇게 말하니 주변사람들은 본능적으로 서로 주변을 살펴보면서 두려워했는데 정신이상자라서 그런지 아무도 잡아가지 않았다.

 하지만 그의 말은 정신이 나가서 한 말이 아니었던 것 같다. 일반 사람이 그런 말을 했으면 당장에 끌려가서 총살을 면치 못할 것이다. 그의 가족, 친척들도 말이다. 우리는 그런 얘기를 들으면서 속이 뻥 뚫렸다. 모두하고 싶지만 감히 아무도 할 수 없는 말을 그가 대신해주었다. 더 이상 살아갈 희망도 보이지 않고 언젠가는 모두가 굶어 죽게 되리라는 공포는 사람들의 머릿속을 지배하고 있었다.

 내 남편은 4형제에 어머니까지 다섯이 살았는데 신랑과 형이 동시에 제대되면서 갑자기 장정이 두 명이나 더 불어나자 봄에 막 돋아 나는 냉이를 캐서 데쳐 옥수수 가루 한줌 넣고 죽을 써서 매끼 먹었다고 한다. 풀 죽에 그만 질려 버린 남편 형이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엄마. 있는 거 다 팔아서 한 끼 맛있는 거 먹고 엄마 우리 몰래 쥐약을 음식에 넣어줘, 한 끼라도 배불리 먹고 우리도 모르게 다 같이 죽자! 더는 이렇게 못살겠다. 이건 사는 게 죽는 것보다 못해.”

 북한은 자살을 체제에 불만을 갖고 저항한 반역죄로 취급하기 때문에 가족력에 자살자가 있으면 친척들에게까지 승진, 인사, 대학입학 등에 걸림돌이 된다. 그러나 살고 있는 집과 솥을 팔아서 며칠 동안 배불리 먹다가 정말로 쥐약을 먹고 일가족이 함께 죽은 사례들이 전국 도처에서 많이 일어났다. 자식들을 남겨두고 먼저 죽으면 그들이 겪어야 할 끔찍한 고생을 너무 나 잘 알기에 함께 죽는 것이 더 낫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그리고 만약 우리도 그런 상황이 오게 된다면 같은 방법을 택할 것이라고 우리집 식구들도 의논했다.

 우리집은 기차역에서 걸으면 8분 정도 되는 가까운 거리였는데 가끔 열차가 역전에 멈추면 몇 시간씩 서 있게 된다. 정전이 되어서 갈 수가 없는 것이다. 그렇게 되면 열차 손님들이 먹을 것이나 물을 찾는데 나는 그때마다 집에서 얼른 바께쓰에 물을 담아가지고 나가서 팔았다. 그냥 물이 아니라 사카린을 넣고 향을 넣고 사이다처럼 만들어 한 컵에 50전을 받는다. 자그마한 빵 한 개가 5원인데 열 컵을 팔아야 빵 한 개 값이다.

 한번은 기차역에서 백발의 할아버지가 나한테로 오더니 물 한 컵만 그냥 먹을 수 없냐고 물었다. 돈이 한푼도 없다는 것이다. 그래서 비싼 5원짜리 빵이나 떡은 차마 구걸하지 못하고 물을 구걸하고 있는 것이었다. 노신사는 보아하니 일반사람 같지가 않았다. 지식인이나 어떤 풍겨 오는 느낌이 많이 배운 사람 같았다. 나는 엄마 생각이 나서 남의 일 같지가 않아 얼른 물 한 컵을 드렸다. 그 할아버지는 고맙다고 몇 번이고 인사를 하더니 겨우 발걸음을 옮겨 자리를 떴다.

 나는 왠지 예감이 어르신이 금방이라도 돌아가실 것 같다는 불길한 생각이 들었다. 그 후 30분도 채 지나지 않았는데 갑자기 역무원들이 사람이 죽었다면서 웬 시신을 맞들고 지나갔다. 나는 화들짝 놀랐다. 그 죽은 사람은 나한테서 물을 얻어 마신 할 아버지였던 것이다. 나 뿐 아니라 주변에서 음식을 팔던 사람들이 더 놀란 것은 그 할아버지의 정체이다.

 그 백발의 노신사는 이름있는 함경남도 사범대학 철학과 강좌장 선생이었고 박사라고 하였다. 집 식구들은 다 먼저 굶어 죽고 할아버지도 사실은 배고픔을 참다 못해 길거리에 나왔다가 기차에 무작정 올라탔는데 연착이 되는 바람에 내렸던 것이다. 막상 구걸을 하자니 한평생 대학생들을 가르치며 고고한 지식인으로 살던 그가 차마 입을 열 수 없었을 것이다. 그와 함께 기차에 탔던 다른 사람이 설명해줘 알게 되었는데 정말 우리 모두가 슬퍼했고 애도 했다. 교원, 교사들은 가진 것이 지식뿐이라 장사도 할 줄도 모르고 할 밑천도 없고 그렇다고 구걸할 체면은 더욱 없어서 지식인들이 제일 많 이 굶어 죽었다. 그 할아버지가 생전에 마지막으로 드신 음식이 바로 내가 파는 물이었던 것 같다.

 내가 돈을 안 준다고 나무라고 물이라도 안드렸으면 얼마나 후회를 했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다음 호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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