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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onyoo
유동환의 생활경제칼럼
유동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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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의 캐나다 침략(19)-1812년 전쟁 전후(9)
donyoo

 

(지난 호에 이어)

찬시와 디어본이 요오크(토론토)를 초토화시키고 페리가 이리 호수를 장악하고 해리슨이 테임스 전투에서 영군을 퇴각시켜 미군의 계속적인 승전에 자신감을 갖게 된 암스트롱 미 국방장관은 퀘벡주의 몬트리얼 함락작전을 위해 웨이드 햄프턴 소장과 제임스 윌킨슨 소장이 이끄는 미군을 두 길로 나누어 몬트리얼을 협공하는 작전지시를 내렸다. .

 

샤터게이 전투(1813년 10월 26일)

9월 19일 햄프턴은 훈련도 잘 되지 않고 전투경험이 없는 4,000명의 군대를 이끌고 작은 배로 포격선의 호위를 받으며 벌링턴을 떠나 몬트리얼 남쪽으로 100 KM 떨어진 플라츠버그로 진군하여 윌킨슨군의 도착을 기다리고 있었다.

10월 18일까지 기다리던 윌킨슨군이 도착하지 않고 군 보급품은 떨어져가고 있었다. 이러한 악조건에서 햄프턴은 몬트리얼 서남쪽으로 25 KM 떨어진 샤터게이강을 건너 몬트리얼로 향하는 진군명령을 내렸으나 일부 장교를 포함한 1,400여명의 미군은 그의 명령에 불복종하고 도강을 거절하여 200명의 기마병을 포함한 2,600명만 10문의 대포를 끌고 몬트리얼로 진군해야 했다.

미군의 캐나다 침략 소식을 들은 프랑스계 캐나다인 태생인 샬스 미셀 드 샐러버리 중령은 퀘벡주의 병과 카너웨이크 원주민전사를 포함한 캐나다 정규군 벌티쉐 총 1,530명을 지휘하여 방어진을 견고히 하고 교각들을 파괴하고 도로에 벌목을 쌓아놓아 미 행군의 지연작전을 세웠다.

햄프턴은 10월 25일 라버트 퍼디 대령으로 하여금 미군1,500명을 이끌고 얕은 샤터게이강 바닥을 따라 도강하는 작전을 세웠다. 퍼디의 도강이 끝난 후 햄프턴은 10월 16일자로 된 암스트롱의 친서를 받았다. 내용은 원군이 올 때까지 군 1만 여명의 월동준비를 위한 군 진영을 건설하라는 명령이었다.

햄프턴은 암스트롱의 편지가 몬트리얼 침공을 포기하라는 명령으로 해석하고 퍼디를 후퇴시킬 수도 없어 속수무책으로 퍼디를 남겨두고 진격을 정지했다.

홀로된 군을 이끌고 밤새 비가 쏟아지는 진흙탕으로 진격한 퍼디는 오전에 멀리 떨어지지 않은 강변에 위치한 캐나다군을 인식하였고 정오가 지나서 반대편으로부터 캐나다군의 총격을 받아 미군은 대응사격으로 방어하였지만 사방 숲속에서 나팔소리를 내고 총소리에 혼돈이 된 미군은 적군과 아군을 구별 못하고 서로 총격을 가하는 사고를 저지르며 갈팡질팡하게 되었다.

이 와중에 한 어리석은 장교는 드 셀러버리 진영을 찾아가 요오크 캐나다군처럼 항복하라고 권유했다가 드 샐러버리가 직접 방아쇠를 당긴 총에 쓸어진 우화를 남겼다.

캐나다군은 벌목으로 만든 방위책을 이용하며 미군을 사방으로 협공하며 원주민과 게릴라전을 벌여, 미군은 적이 얼마나 되는지 어느 숲속에서 나오는지 나팔소리와 총소리에 의한 공포에 휩쓸려 퍼디는 3-4마일을 후퇴하고 조금 떨어진 강변의 드 샐러버리군을 바라보는 중 드 샐러버리의 예비군 공격이 시작되자 오후 3시경 숲속으로 후퇴했다가 다음날 27일 배를 타고 미국으로 돌아올 수 있었다.

다행히도 드 샐러버리는 미 영토로 후퇴하는 미군을 추적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퍼디를 맞은 햄프턴은 이길 수 없는 전투라고 판단을 내리고 몬트리얼 진격을 포기하였다.

 곧 드 샐러버리가 이끈 군대 300명으로 1,500명의 미군을 후퇴시킨 사실이 알려졌다. 이 전투로 캐나다군은 22명의 사상자를 미군은 85명의 사상자를 내어 인명피해는 가장 적은 전투로 알려졌지만 미국이 받은 충격은 매우 심각하였다.  

드 샐러버리는 큰 인명피해 없이 전투에 승리한 영웅이 되었다. 이 전투지역은 캐나다 역사지역으로 포함되어 관광객을 유치하고 있다.

이 전투는 영군의 도움 없이 캐나다군에 의한 유일한 전투승리역사로 장식되어 캐나다인들의 자랑거리가 되었다. 양군 큰 피해 없이 전투에 승리하여 캐나다의 영웅이 된 드 샐러버리의 초상화가 2013년 샤터게이전투 200주년 기념으로 캐나다 25센트와 4달러 은화에 각인되었고 기념우표도 발행되었다. 그의 동상은 궤벡주 의사당과 오타와 그리고 퀘벡주 챔블리에서 볼 수 있다. (다음 호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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