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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은 왜 실패했나(14)-유교(성리학. 주자학)가 원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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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세기 조선의 실학자, 다산 정약용의 목민심서에는 “수령이 백성을 위한 것인가, 백성이 수령을 위하여 태어난 것인가? 백성이 곡식과 옷감을 내어 그 수령을 섬기고, 백성의 고혈과 뇌수를 짜내어 그 수령을 살찌우니, 백성이 수령을 위하여 태어난 것인가? 아니다, 수령이 백성을 위한 것이다."


다산 정약용이 살았던 영.정조 시절에는 이미 성리학(주자학)이 조선의 사상체계로 자리를 잡았고, 유교의 주자학적 해석 이외에는 이단으로 배척되던 시대였다.


임진, 병자호란으로 국가와 민생이 피폐해져 있는데, 오히려 조선 사대부들은 공허한 유교 명분논쟁에 몰두해 있어, 효종이 상을 당하자 복상을 얼마간 하여야 할 것인가 하는 논쟁에(예송논쟁) 세월을 보내고 있었다.


성리학의 나라, 명이 북방 오랑캐 청에 망하자(1644) 조선은 중국보다 더욱 성리학을 발전시켜 소중화를 추구했다. 18세기 국가나 백성이 모두 가진 것 없는 가난한 시기, 양반은 수탈로 생을 이어나가고, 이런 현실을 다산은 목민심서에서 한탄하고 있는 것이다.


지난 호 ‘양반때문에…’에서 당시 시대상은 이미 언급했으나, 도대체 이런 상황이 왜, 조선에서 일어났을까? 무엇이 근원적 이유일까? 조선의 국교와도 같았던 유교(성리학. 주자학)에 그 원인이 있다.


 1. 조선초기, 성리학은 조선에 유용했다.


12세기 송나라는 세계에서 제일 발전한 나라였다. 당시 서구의 어느 나라보다도 사회발전지수가 높았다. (그랬다면 왜 서구에 뒤졌나? 이는 "왜 서양이 지배하나"에서 설명한다(이언 모리스 ).


광대한 중국대륙을 통일한 송은 한 명의 왕이 통치하는 나라로 안정된 통치를 위한 이론이 필요했다.


"왕은 왕으로, 신하, 백성은 각자의 위치가 있으니, 그 주어진 위치에서 자기의 본분을 다 해야 한다는 위계질서를 강조하는 이론을 유교가 제공했다. 즉, 자연도, 사회도 그 속에 본질적인 질서가 있다고 보는 것이고, 인간사회 역시 당연한 질서가 있으니, 자신의 위치에서 그에 합당한 일을 성실히 수행하는 것이 인간의 도덕적 의무라는, 도전 받지 않는, 안전한 계층적 질서를 강조하는 이론이 필요했고, 그런 필요에서 송은 유교(성리학)를 발전시켰다.


조선 역시 통일 왕국을 유지하는 데, 유교는 더없이 필요한 이론이됐다. 조선은 이로서, 민본주의, 왕도, 덕치를 근본으로 하는 정치를 추구했고, 이를 위해 왕으로부터 일반 백성에 이르기까지 유교적 윤리가 지배하는 나라가 되어야 했다.


이로서, 조선 사대부 양반은 손에 흙을 묻히지 않고도, 공자 맹자만 외우면, 백성이 이들을 먹여 살려야 한다는 이론이 합리화 됐다. 비록 나라를 망치는 이론이었으나 양반에게는 얼마나 좋은가?


조선 초, 세종은 집현전을 설치, 유교학자를 양성하고, 사또가 임명되는 모든 현에는 유교학교, 향교를 설치한다(일읍일교). 이로서 중앙은 유학자 중심으로 덕치를, 지방은 향교를 중심으로 한 유교적 질서로 조선 전기, 국가와 사회의 안정을 기할 수 있었다.


16세기에 이르러, 관학인 향교 외에 지방 양반들이 사학으로 서원(서당)을 활발히 설립했고(문중서원), 이에서 양성된 사림파가 정계에 진출하기 시작한다.


17세기에 이르러, 임진, 병자호란을 겪고, 명이 망하는 것을 본(1644) 조선은, 유교의 옳은 도리로서 사회동요를 막고, 한걸음 더 나아가 명을 대신, 동양의 유교나라, 소중화를 추구한다.


이게 지나쳤는가(?), 조선의 사상체계가 된 성리학은 유교의 주자학적 해석 이외에는 이단으로 금하는 우(경직화)를 범한다. (인간의 욕심을 인정하는 양명학; 부자 되는 것이 나쁠 것 없다.)


18세기, 성리학이 발전되면서 여러 학설이 나오고 이는 학파 당쟁의 원인이 된다. 안타깝게도 유교본연의 "널리 인간 세상을 이롭게 한다"는 민본정신에서 이탈하고 있었다. 이와 함께 조선의 운명도 다하고 있었다.


조선은 이미 14-17세기와 사뭇 다른 사회가 되어가고 있었다. 지방에는 수공업, 광업이 발전하고, 농업의 경우 산지개간으로 농지확장, 모내기, 퇴비사용, 이모작 등으로 사회적 변천 속에 경직된 유교정신만으로 해결할 수 없는 사회가 되어가고 있었다.


돈은 백성의 타락을 가져올 것이라는 우려 속에 상업을 억제하고(억상), 농사만을 중심으로 살고자 하는 소박한 중농사상은 이미 국리민복, 부국강병을 신념으로 거침없는 약육강식의 19세기에 지극히 어리석은 짓이었다.


2. 왜, 조선은 주자학인가?


 맹자는, 인간은 본래 도덕적 본질이 있다고 보아(성선설), 이를 토대로 목가적 이상사회를 추구했다. 그러나 맹자가 원했던 이런 이상사회는 맹자 이후 2300년 동안 실현된 예가 없었다.


그러한 맹자의 성리학을 조선이 망할 때까지 앉고 있었던 이유는 무엇이었을까?  조선의 사대부에는 소위 국리민복, 부국강병의 길을 추구할 이유(필요)가 없었다. 국민이 부유해져야 국가도 부유해져 강병도 추구할 수 있다는 상식이 그들에게는 필요가 없었다.


왜냐하면, 조선의 국방은 언제나 형제의 나라 명이, 군신의 나라 청이 그때그때 해결해 주었기 때문이다. 더하여, 아무리 기근이 들고, 삶이 어려워도, ''백성은 양반을 먹여 살려야 한다''는 유교에서 나온 신분사상이 있어, 다산 정약용이 보았듯 ''백성의 고혈을 짜내어, 수령을 살찌울 수'' 있었기 때문에 왕도, 사대부도 국부를 고민할 필요가 없었다.


약육강식이 상식인 시절, 1905년 9월 미국 사절단으로 당시 26대 미 대통령의 딸, 에리스가 고종을 알현한다. 21살, 시어도어 루즈벨트의 딸이 본 고종은 ''황제다운 존재감은 거의 없었고, 애처롭고 둔감한 모습이었다''.


그의 아버지는 일본에 ''대한제국을 차지하기 바란다''고 편지한다. 가난을 미덕으로(청빈), 목가적 이상주의 국가를 염원했던(유교), 조선은 이렇게 실패했다. (끝)

 

※ 알림: 갤러리아 쏜힐점 문화교실에서 매월 첫째 주 수요일 낮 12시 30분에 천하성씨 ‘조선은 왜 실패했나', 문종명씨 ‘과학 이야기’ 강의가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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