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A
ON
추천업소
추천업소 선택:
추천업소 그룹 리스트
  • 식품ㆍ음식점ㆍ쇼핑1
  • 부동산ㆍ건축ㆍ생활2
  • 미용ㆍ건강ㆍ의료3
  • 자동차ㆍ수리ㆍ운송4
  • 관광ㆍ하숙ㆍ스포츠5
  • 이민ㆍ유학ㆍ학교6
  • 금융ㆍ보험ㆍ모기지7
  • 컴퓨터ㆍ인터넷ㆍ전화8
  • 오락ㆍ유흥ㆍPC방9
  • 법률ㆍ회계ㆍ번역10
  • 꽃ㆍ결혼ㆍ사진11
  • 예술ㆍ광고ㆍ인쇄12
  • 도매ㆍ무역ㆍ장비13
  • 종교ㆍ언론ㆍ단체14
bs2000
부동산캐나다에 기고
www.budongsancanada.com
블로그 ( 오늘 방문자 수: 236 전체: 321,251 )
흔적을 찾아서(75)-빌라델비아(Philadelphia) 교회 터
bs2000

 

소 아시아 일곱 교회 중 서머나 교회와 함께 책망을 받지 않고 칭찬받은 교회인 빌라델비아 교회는 "성전의 기둥과 새 예루살렘의 영광"이 약속되었던 것처럼, 오늘날에도 본받아야 할 교회의 모습이 되어, 많은 곳에서 많은 교회들이 즐겨 사용하는 교회 이름이 되었습니다.

사데에서 남동쪽으로 약 50km 떨어져 있는 “빌라델비아”란 도시는 BC 150년경 버가모 왕 아탈로스 2세 빌라델비오스(Attalus II Philadelpus BC220~138)가 헬리니즘의 문화를 전할 목적으로 건설한 도시였습니다.

빌라델비아 역시 드로아에서 버가모, 사데를 거쳐 동쪽으로 이어지는 로마의 주요 통로로 상업에 매우 이상적인 위치에 있어 가죽제품, 직조업이 주요 산업이었지만, 특별히 포도 농사를 짓기에 매우 적절하고 비옥한 토양이 도시 주위로 넓게 펼쳐져 있어, 이 지역 특산 농산물인 포도로 만든 포도주가 유명하였다고 합니다.

초대 교회 당시 빌라델비아 교회에서는 소아시아 내 300여 교회에서 쓰는 성찬식 포도주를 무료로 공급하며, 형제 사랑을 몸소 실천하였다고 합니다.

그러나 사데를 강타했던 지진이 빌라델비아 도시까지 영향을 미쳐서 삶의 환경이 열악하여지자 많은 사람들이 지진의 피해가 덜한 농촌지역으로 이주하는 바람에 도시는 인구도 적어졌고, 생활은 궁핍해졌으며, 잦은 지진으로 인하여 삶이 늘 불안해, 겉으로 보기에는 약하고 무력한 것 같아, 작아 보였던 빌라델비아 교회였으나 실은 내실이 있는 교회였다고 전해오고 있습니다.

전해오는 이야기로, 빌라델비아 교회는 아랍인들의 침략 속에서도 끝까지 남아, 아시아에서의 “기독교의 마지막 보루” 답게, 교회는 건실한 신앙을 가지고 이단을 물리쳤으며, 여러 가지 신앙의 시련이 닥쳐와도 조금도 요동치 않고 인내와 성실로써 현실을 잘 극복해 나가면서 AD 1300년 즈음에는 “대 감독 구역”이 되도록 성장한 교회였다고 합니다.

그런데 정작 오늘 우리가 가서 볼 수 있는 것은 다만 비잔틴 시대에 세워져 사도 요한에게 바쳐진 교회의 허물어진 자리에, 허물어지다 남은 두 개의 육중한 기둥과 부서진 교회의 잔해로 추측되는 돌 조각들뿐이었습니다.

그나마도 지금은 좁은 골목길로 들어가야 하지만, 버스를 돌릴 만한 공간마저 없어 후진으로 언덕길을 한참 올라가서야 내릴 수 있는 곳에 위치한 부서진 교회 터일 뿐이었습니다.

이곳의 현재 지명은 알라쉐히르(Alasehir)로, 해석하면 “알라(神)의 도시”란 뜻이라고 합니다. 여기에는 이런 이야기가 전해오고 있습니다.

셀주크 투르크가 아나톨리아를 점령하면서 주민들에게 이슬람교로 개종할 것을 강제적으로 혹은 회유하면서 줄기차게 요구했으나, 빌라델비아 교인들만은 끝까지 개종하지 않고, 목숨을 버리면서까지 기독교 신앙을 지키려 했던 모습에 감명을 받았기 때문에 투르크 인들은 도시 이름을 통해 “이곳은 진정 신의 도시”라고 인정하며 “알라쉐히르(Alasehir)”라고 도시 이름을 바꾸었다고 합니다.

빌라델비아(Philadelphia)라는 이름은 이 도시를 세운 버가모 왕 아탈로스 2세 빌라델비오스의 이름에서 유래했다고도 하고, 또 다른 해석은 빌라델비아(Philadelphia)라는 단어 자체가 헬라어 ‘Philos(사랑)’와 ‘Adelpos(형제)’를 합친 것이며, 그 의미는 ‘형제 사랑’이라고 합니다.

실제로 아탈로스 2세는 형제 간의 우애가 특별하게 돈독하였다는 이야기가 널리 전해오고 있습니다.

이곳에 언제 교회가 시작되었는지 알 수 없으나 계시록에는 일곱 교회의 하나로 나타날 뿐입니다(계3:7-13).

성경학자들이 말하는 교회사에서는 지난 2000년 동안의 교회 역사를 7기로 나누어 놓고, 각 기마다 요한 계시록에 나오는 7 교회의 이름을 순서대로 붙이어 놓았습니다.

초대 교회였던 빌라델비아 교회를 제 6기로 보며, 이 시대를 18C중~19C말에 실제로 서양에서 “세계를 향하여 나간 선교 교회의 시기”로 보고 있습니다.

초대 교회 시절, 빌라델비아 교회와 함께 책망받지 않고 칭찬만 들은 서머나 교회 시대는 AD100~AD313년으로, 교회사에서 제 2기로 꼽는 “엄청난 핍박을 받으며 많은 교인들이 순교하던 사도시대의 교회”였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같은 시대의 빌라델비아 교회는 그 시대의 장벽을 뚫고 복음을 전했을 뿐만 아니라 첫 사랑을 잃어버린 교회가 형제사랑을 되찾은 교회로, 그리고 선교사들을 파송하는 교회가 되어, 인류애가 넘치는 세계선교 시대를 열게 되었기 때문에 교회사의 제 6기를 “빌라델비아 교회시대”로 선정한 것 이라고 사료 됩니다.

요한이 계시록을 쓴 지 25년이 지난 AD 120년경, 로마로 압송 당하던 안디옥의 주교 이그나티우스(Ignatius)가 드로아에서 쓴 3 편지 중의 한 편지를 받아 보게 되었다고 합니다. 이그나티우스는 빌라델비아 교회 감독에게 쓴 편지를 통해, 각 교회 안에서 일어나고 있던 여러 문제들을 해결하려고 했고, 그리스도인으로서 어떻게 살아야 할 것인가를 제시하였다고 합니다.

후 사도 시대의 빌라델비아는 자주 일어나는 지진으로 인해 성도들이 매우 불안해했지만, 이 불안이 도리어 이들의 신앙을 더욱 뜨겁게 해 주었다고 합니다.

이렇게 인구도 적고, 가난했고, 잦은 지진으로 인해 삶이 늘 불안해 약하고 작아 보였던 빌라델비아 교회가, 주님께 인내의 말씀을 지키는 교회라 칭찬을 받고, 이민족의 침입 때에 적들도 인정하는, 신앙을 잘 지키는 교회가 된 비결이 무엇이었을까요?

이런 교회 터에 도착 시간이 늦어져, 이미 개방시간은 지났지만 우리 가이드와의 관계가 좋아 문을 열어주는 것이랍니다. 고마울 수 밖에요…. 여기까지 와서 비록 부서진 모습이나마 못 보고 가면 많이 아쉬울 텐데……

도심 한 가운데 자리잡은 자그마한 마당 안으로 들어서니 사진에서 보아오던 부서진 교회 기둥 사이로 보이는 좁은 골목 건너에 멀쩡히 서있는 모스크의 첨탑이 묘한 대조를 이루며 석양을 받고 있었습니다.

그때, 건실한 신앙을 가졌던 믿음의 사람들이 지금은 다 어디로 갔을까요?

“이기는 자는 내 하나님 성전에 기둥이 되게 하리니(계 3:12)”라 하시었는데…. 기둥만 서있는 부서진 터에 서있는 우리에게도 주시는 말씀이 분명히 있을 텐데, 어느 귀로 들어야 하나? 어느 눈으로 보아야 하나? 어느 마음으로 들어야 하나?

작은 정원을 돌며 진열하여 놓은 그 옛날의 영화의 편린 속에 공상의 나래를 펼쳐 보았습니다.

 

 

 

<저작권자(c) Budongsancanada.com 부동산캐나다 한인뉴스, 무단 전재-재배포 금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