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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천학 시와 컬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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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05-17
Out of Service

 

Out of Service

盡人事待天命(진인사대천명)

 

 유니온 역(Union Station) 플랫폼에서 세인트 죠지역(St. George Station)으로 가는 전철을 기다리고 있었다. 네 살배기 손자를 데이케어(daycare)에 데려다주는 길이었다. 전철이 정차하고 타고 있던 사람들이 대충 내리기를 기다리는데, 내리는 사람들의 잡담 속에서 ‘아웃 어브 서비스…’하는 말을 들은 것 같았다.
 

그러나 그냥 흘려들었을 뿐, 내릴 사람들이 다 내린 후에 여느 날과 같이 플랫폼과 전철 사이의 틈을 조심시키느라고 허리를 굽혀 손자를 감싸 안고 전철 안으로 막 들어서는데 누군가가 어깨를 살짝 건드리는 느낌에 무심코 돌아봤다. 방금 내린 듯 한 젊은 청년이 ‘아웃어브 서비스!’하고 말했다.
 

어? 그러고 보니 다들 나오고 있는 물결의 끝에 우리 조손(祖孫)만 강물을 거슬러 올라가는 연어처럼 안으로 향하고 있었음을 알았다. 그제야 흘려들었던 잡담이(?) 바로 그 내용이었구나 하고 짐작되었다. 다시 플랫폼에 서서 다음 차를 기다리는 동안 뇌 속에서 복잡한 미로(迷路)가 뻗어 나오기 시작했다. 
 

세상만사 열리지 않는 귀와 눈 때문에 허둥대고 헤매는 일이 많은데, 그나마 영어까지 길을 막다니! 세상에 아무리 좋은 말들도 지혜의 귀가 열리지 않으면 다 ‘쇠귀의 경’이 되고 말 터. 알고 있으면서 새기지 않고, 실천하지 않으면 헛일. 마음을 열면 귀가 열릴 것이고, 귀가 열리면 자연의 소리, 순리의 말씀, 세상의 이치를 다 헤아리는 지혜가 생길 것이다.
 

영어라고 다를 리 없지 않은가. 그 이치를 다 알면서 왜 게으름을 부렸을까. 공부해야겠다고 마음만 먹었지 전력투구하지 못했다. 전력투구는 고사하고 정식으로 시작도 못했고, 열심 한 번 낸 일이 없으니 귀가 열리지 않는다고 불평할 자격조차 없다.
 

어쩌다 시작 비슷하게 했다가도 이런저런 이유로 중단했다. 아무리 타당한 이유가 있다하더라도 결론은 끈기부족이다. 아니, 언제 받은 영어교육인데 지금 단어 몇 개라고 살아남아있는 것도 고마운 일, 귀가 열리는 것은 그만두고, 떴던 눈마저 어두워지지 않은 것이 오히려 감사한 일 아닌가. 새로 담기는커녕 잊어버리는 것이 더 많지 않은가.
 

자책과 자괴감이 스쳐 지나가고, 영어든 삶이든, 노력하는 것밖엔 달리 방법이 없다. 지금이라도 시작해보자. 시작은 작으나 그 끝은 크려니... 가까스로 바닥에 깔리는 기분을 그렇게 건져 올렸다. 
 그래도 그동안 영어 때문에 사건이 될 만큼 큰 불편은 아직 겪진 않았다. 짧은 실력으로나마 병원에도 혼자 갔고, 쇼핑도 혼자 하고, 캐나다인 친구도 서넛 생겼다. 오, 바디 랭귀지! 다소 답답하고 불편하긴 하지만 용케도 헤쳐 나갔다. 
 

두어 번 스트리트카가 도로상에서 고장이 나서 멈춰 섰을 때 안내방송을 제대로 알아듣지 못해서 사람들 눈치 보며 내렸다가 조마조마한 마음으로 눈치껏 다음 차를 갈아타고 바쁜 시간을 대체했더니 나중에 알고 보니 도로사정으로 돌아서 간다고 했던 말을 정확히 파악을 못하고 내리는 사람 따라 행동했던 일도 있긴 하다.
 

그렇게 좌충우돌, 서툰 영어실력으로 버벅대는 나를 식구들이 놀리기도 한다. ‘워낙 고급영어를 구사하시니까 본토 영어가 딸리잖아요!’ 하고. 그러거나 말거나, 한국어라면 전문가의 뺨도 칠 자신이 있지만 영어 앞에서야 맥을 못 추다니, 쯧! 생각해보니, 갑자기 한국말을 잘하는 캐네디언 친구가 밉다는 생각까지 들었다.
 

처음엔 편했지만 영어의 갈급함을 못 느끼게 했으니 나에겐 오히려 걸림돌이 아닌가, 이젠 절교다! 잘되면 제 덕, 못되면 남 탓으로 돌리는 이 비열함이라니, 이래서 인간성 변하는 것 순식간이 아닌가 하며 쿡 웃음이 터지기도 한다. 
 

토론토에 살게 되면서 ‘원서를 읽고 싶은 꿈’이 더 가까워졌다고 생각했었다. 시간은 흘러갔고, 영어문맹인 지금의 내 앞엔 물 건너간 꿈으로 실망만 안겨줄 뿐이다. 포기해야 하나? 싫어! 그래도 영어를 아예 안하겠다는 생각은 없다. 
 

그런 정도의 깜냥에도 가장 어려운 것이 리스닝(listening)이다. 리스닝만 어느 정도 되면 궁색한 단어로라도 땜질을 해보겠는데. 리스닝(listening), 영어의 산 입구에 가로막고 있는 커다란 바위다. 그 바위를 넘기 위해서 대보름날 아침에 마신 귀밝이술의 영험으로라도 귀가 빨리 열렸으면 좋으련만. 
 

한글자막이 있는 영화를 볼 때도 어쩌다 들리는 대사도 아, 맞아. 두 박자 쯤 늦게 몇 초전에 지나간 영어대사가 리와인드 되기도 한다. 왜 안 들릴까? 그래서 이젠 최소한 서바이벌 영어수준이라도 되어야겠다고 꿈의 수위를 낮췄다. 오, 게으른 자의 비겁한 몸짓이여!
 

꿀꿀한 기분의 그날 오후, 손자를 데려오는 길이었다. 집근처 역에서 내렸을 때 녀석이 쉬를 하고 싶다고 보챈다. 바로 집 가까이 오긴 했지만 아이가 보채니 어쩔 수 없이 길 하나를 사이에 둔 대형 수퍼마켓 소비즈(Sobeys)의 문을 밀고 들어가 급하게 아이를 앞세우고 화장실을 찾아갔다. 늘 다니는 곳이라 익숙한 공간이라도 화장실 사용은 처음이었다.
 

오 마이! ‘out of service!’ 화장실 문에 붙어있는 종이에 쓰여 있었다. 고장이라고? 손자 녀석을 참게하며 동당거리는 걸음으로 집에 와야 했다. 아무래도 오늘은 영어가 게으른 나를 혼내주려고 작정한 모양이다. 
 

아웃 어브 서비스! ‘서비스중단’이 아니라 ‘진인사대천명(盡人事待天命)’으로 들렸다. 꿈틀꿈틀 채찍으로 변하더니 훈계하기 시작했다. 어디 영어가 식은 죽인 줄 알았나? 불평하지 말고, 이유도 대지 말고, 지금부터라도 시작하라! 일단 시작하면 전력투구하라! 하늘은 스스로 돕는 자를 돕나니, 먼저 너 스스로 너를 도우라! 스스로를 돕지 않으면 영어도 도와주지 않을 것이니. 영어의 세상에서 낯설게 시작한 이민생활도 의미가 없으려니! 

 가족들 사이에서 5순위가 문제가 아냐. 사회에서 등외(等外)야. 낙오자란 말이야. 꿈을 잊으면 미래를 잃는 법, 원서를 읽고 영어로 글을 써보겠다는 그 야무진 꿈은 다 어디로 날렸니? 더 늦기 전에, 정신 차려, 후회도 소용없어! 늦다고 생각한 그 시간이 가장 빠른 시간이야! 알겠니? 이 돌대가리야!

 

2014-04-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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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08-08
길-초록비타민의 서러움 혹은 ?


길 


-초록비타민의 서러움 혹은 ? 

 


길이 어디 길 뿐이랴
바다에도 길이 있고 하늘에도 길이 있다
몸에도 길이 있고 생사에도 길이 있다

사람은 사람의 길, 나무는 나무의 길,
배는 뱃길, 바람은 바람의 길
사람 사는 것이 꼭 손금대로만 가는 것도 아니어서
간혹 허방도 짚고 섶 지고 불구덩이에도 들어간다
사람 사는 길이 어디 지도보고 찾아가는 길이던가
간혹 헤매기도 하고 낭떠러지에도 선다

출렁출렁 오르락 내리락 
세상바다건 바다세상이건
어디에도 뻗어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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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07-25
인생론 집필 중 - 초록비타민의 서러움 혹은 ?

 

인생론 집필 중
-초록비타민의 서러움 혹은 ? 48 

 


바다는 오늘도
인생론 집필에 몰두하고 있다
쓰고 지우고 쓰고 지우고
격렬한 필치의 서사시도 인용하고
수채화 같은 서정시도 펼치면서
끝도 없이 고쳐 쓴다

 

시궁창에 처박혀 숨도 쉴 수 없었던 일
사탕발림에 속아 간도 쓸개도 다 넘겨주고 나서
돌아설 때 등을 치며 날리던 헛웃음

길 잘 못 들어 허덕이며 가슴 치던 절망마저도
어느 것 한 가지 약 아닌 것 없고
한 번도 잘나본 적 없던 남루한 시간들이
모두 엉겨 진하게 달여진 잉크,
피를 삭여 쪽빛을 내는 잉크를 찍어
응달과 양달을 뒤섞는 펜 끝에
온 세상이 줄줄이 매달려 휘날린다
바다가 촘촘히 써나가는 인생론을 
읽고 또 읽어 가면
첩첩 쌓인 삶의 숨겨진 언덕들이
한 켜 한 켜 때 묻은 살 껍질들을 벗겨낸다

 

 

<저작권자(c) Budongsancanada.com 부동산캐나다 한인뉴스, 무단 전재-재배포 금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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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07-18
포경, 그 무렵에-초록비타민의 서러움 혹은 ?

 

 포경, 포경, 포경, 포경, 포경…


 그 무렵엔 신문만 펼쳐들면 바다가 넘쳤다. 날마다 명함 크기만 하게 찍혀 나오는 바다, 웬 고래가 그리도 많이 잡히는지, 우리나라에선 장생포에서만 고래가 잡힌다고 책에서 배웠는데 신문만 펼치면 네모 칸에 갇혀 끊임없이 실려 나오는 포경, 포경, 포경, 포경…


 지구가 네모 아닐까 헷갈렸지만 아무도 가르쳐주지 않았기 때문에 그때부터 혼자서 터득하기 시작했다. 학교에서 배우는 공부와 세상 사이에는 엄청난 굴헝이 비리처럼 가로막혀 있다는 것을. 


 남에게 보이는 장부와 보이지 않는 비밀장부를 따로 만들어야 하고, 기록으로 남기는 일기는 누구에겐가 보이기 위한 일기이며 진짜 비밀일기는 가슴에 쓴다는 것을, 아는 것이 많아질수록 어지러웠다. 


 그 후로는 내내 아는 것과 모르는 것 사이에 알 수 없는 무엇인가가 끼어들었다. 끼어들어서, 나와 세상 사이에, 나와 친구 사이에, 나와 시 사이에, 심지어는 나와 나 사이에 괄호나 블랭크를 만들어놓아서 갈팡질팡 흔들려야 했다. 


 시간이 흐를수록 꿈과 현실 사이에서, 도리와 명분 사이에서, 가식과 진실 사이에서, 앞모습과 뒷모습 사이에서, 겉과 속 사이에서, 말과 행동 사이에서, 웃음과 혀 사이에서 나의 어지럼 증세는 깊어져갔다.


 알수록 모르겠고 믿을수록 못 믿겠는 세상살이에 서툰 나머지 곧잘 두통을 동반한 현기증을 일으키곤 했는데, 두통이 평생 지병이 되리라는 걸 그땐 몰랐다.


 생각해보면 포경과 고래잡이를 혼동했던 그 무렵부터, 바다는 늘 그렇게 내 안에 스며들어서 멀미를 앓게 했고, 바람 잘 타는 나에게 세상공부를 시켜주었는데 그 후로 나는 익사하지 않는 방법까지, 넘어져도 다치지 않는 낙법까지 터득하기 시작하면서 『슬픔』이라는 만성지병을 얻기는 했지만 푸르고 단단한 지느러미로 바다를 거느리며 때려눕히는 고래 떼들을 보고 힘을 얻었고 그 중에서도 바다를 헤엄쳐 가는 향유고래가 되기로 작정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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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07-11
산호도시-초록비타민의 서러움 혹은 ?

 

 

 
산호도시 
-초록비타민의 서러움 혹은 ?

 

 

산호도시에 새벽이 오면
청소부 놀래미가 다시마 가로수 길을 쓸고 간다

 

환경미화원 박씨가
우리들 머리맡에 쌓인 새벽어둠을 쓸고 가듯
대기업의 엘리트 사원으로 젊음을 쏟아 붓는 애들 삼촌처럼
등 푸른 고등어와 가자미들이 이른 출근을 하고 나면
게으른 배불뚝이 복어가 느릿느릿 집을 나서고
중소기업체를 운영하는 손사장이나 공무원 김씨 
느긋한 출근길에
야간근무를 하고 돌아오는 공단근로자 순태씨와 마주친다

 

상습적으로 병목현상이나 교통 체증을 일으키는
영등포 로터리나 남부순환도로 혹은 88도로에서
발을 동동 구르는 서울시민들의 짜증나는 아침처럼
산호도시 주민들의 아침도 분주하다

 

유난스런 디자인과 튀는 색깔의 무늬 옷을 걸치고 
개성을 주장하는 X세대 물고기들
우리의 아이들 김건모나 투투 서태지와 아이들이 그렇듯,
분홍색으로 치장한 마오마오
밤만 되면 압구정동이나 방배동 카페거리의 오랜지 족처럼
눈부신 조명 아래 모여들고
미식가 꽃도미
플랑크톤만 먹는 편식증의 물고기들
뾰족한 무기와 독소를 지닌 지존파도 있지만
밤을 낯 삼아 불면의 시간을 보내는 시인들처럼
혹은 적은 임금과 쥐꼬리만 한 수당에는 아랑곳하지 않고 
잔업으로 땀 흘리는 근로자들이 초롱초롱 불을 밝히는
야행성의 주민이 있어 아름다운 산호도시,
해저타운 산호도시 산호거리에 
오늘도 보이지 않는 질서의 하루가 피고 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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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07-04
아버지들이여! 오늘 하루만큼은

 

 

 

 서프라이즈 광고라는 제목의 동영상, 몰래 카메라로 실제 상황으로 제작되었다는 그 광고를 보며 대한민국에서 아버지로 살아간다는 것은? 그 의미를 되짚어보았다.


 OECD 국가 중 연간 업무량 2위(2011년 기준), 바쁘고 피곤한 아빠들에게 갑작스럽게 찾아온 특진의 기회, 2014년 5월 31일 오후 4시 현재, 안내 문자를 받은 사원들은 모이라는 안내방송들 듣고 모인 대회의실에서 인적성 검사가 시작된다. ‘나는 우리 팀의 목표나 업무추진 계획을 수립하는 과정에 참여한다. 회사생활을 하는데 있어서 가장 중요하게 생각하는 요소는 무엇입니까?...’류의 질문을 거쳐 파트 2, ‘자녀의 키, 몸무게를 적어 보세요. 자녀가 가장 좋아하는 가수나 그룹은 누구입니까? 자녀가 아빠와 함께 한 가장 좋아했던 여행 장소는 어디입니까?…’라는 질문에는 모두들 시쳇말로 대략난감이다. 난다 긴다 하는 그들도 누구나 잘 알 것 같으면서도 모르는 자잘한 내용들, 자잘한 그 내용들이 중요하다는 사실을 잊고 살았다. 


 회사에서 제시하는 요구와 추구하는 목표달성에 매진하기 위하여, 조직에서 이탈되지 않기 위해서 끊임없이 새로운 아이디어를 짜내야 하고, 노동을 바쳐야 하고, 연속되는 긴장상태, 결국 밤 역시 낮 근무의 연장선상에 놓여 있다. 비록 잠을 잔다고 해도 충분치 않고, 쳐진 육신에 팽팽한 정신을 담고 피 튀기는 경쟁 속에서 견뎌내야 하므로 가정의 일은 물론 아이들에게도 미쳐 신경을 쓸 여지가 없다. 관심이나 사랑이 없어서가 아니라 상황이 그렇게 내몰고 있다. 


 염려와 투정 섞인 아이들의 영상편지에 이어 아버지의 사무실을 방문한 깜짝쇼, 말하자면 오늘 하루만큼은 이 차장이 아니라 이지은의 아빠로 있어 달라는 메시지다. 다들 수긍하는 내용이어서 광고로서는 성공적이라고 할 수 있겠지만 실제로 그렇게 되는 것은 여전히 수월치 않으리라는, 긍정도 부정도 아닌 생각을 했다. 

 

 그런가 하면, 같은 시기(2014년 6월 21일)에 미국의 소녀 캐티는 아빠가 다니는 구글(Google) 회사에 손편지를 보낸 것이 소셜 네트워크에 잔잔한 물결을 일으키고 있다. 아빠는 항상 토요일만 집에서 쉬는데, 다가오는 7월의 첫 번째 수요일인 아빠의 생일엔 집에서 함께 보낼 수 있게 해달라는 요청이었다. 더불어 ‘참고로, 알다시피 휴가를 많이 가는 여름’이라고 서툰 글씨지만 침을 놓기도 했다. 이에 감동(?)된 구글의 인사담당자는, 하루가 아니라 7월 첫 번째 주 전부를 휴가로 주겠다는 답장을 보냈다. 더불어 ‘아빠는 세상의 많은 사람들을 위해 구글에서 훌륭한 디자인 일을 잘하고 있다’며 어린 딸에게 아빠에 대한 긍지를 심어주기도 했다. 그러잖아도 직원들의 복리 후생에 많은 투자를 하고 있는 것으로 정평이 나있는 구글은 이번 일로 더욱 회사의 이미지 개선이 된 셈이다. 


 가정은 사회의 기초단위이며 작은 회사이자 사회다. 아빠는 그 작은 회사를 이끌고 가는 파수꾼이며 동시에 구성원이다. 물론 아빠 혼자서 그 조직을 이끌고 가는 것은 아니다. 역할이 아빠와 버금가는 엄마도 있다. 그렇다고 그 사회가 엄마아빠만으로 굴러가는 것은 아니다. 자식들이 있다. 아직 가시적인 경제력은 없지만, 눈에 보이지 않는 생산적 에너지를 가지고 있는 중요한 구성원이다. 구성원들이 다 같이 만족해야 좋은 사회, 즉 좋은 가정이다. 


 가정이 튼실해야 그 힘이 사회와 국가로 뻗어가서 행복한 사회, 살기 좋은 나라가 된다는 것을 모르는 사람은 없다. 그래서 일 년 삼백육십오일 내내 수고로운 부모님들을 위해서 단 하루일망정 어머니날 혹은 아버지날이라는 이름을 붙여 그 의미를 새기게 하고 있다. 그러나 미국이든 우리나라든, 세계 어디든 총대를 멘 아버지에게 현실은 여전히 힘 든다. 


 얼마 전에 어머니날과 어버이날을 보냈지만, 그랬다고 해서 모든 부모님들이 행복했을까. 그것으로 일 년 내내 행복할 수 있을까. 절 받기도 힘 든다고, 그 하루가 오히려 더 부담스러웠을 수도 있다. 어쩌면 그 하루마저도 모든 일로부터, 일로부터 받는 스트레스로부터 벗어나고 싶었을 어머니 아버지가 많았을지도 모른다.

 

아직도 경제문제를 비롯한 가정의 크고 작은 문제로 결코 즐거울 수 없는 어머니 아버지, 그런 가정도 있었을 것이다. 문제는 항상 어두운 곳에 있듯, 잘 사는 가정과 잘 나가는 가족들보다는 환경이 불편한 어려운 가정과 가족에게 눈 돌리는 것이 더 중요하다. 잘 사는 가정의 즐거워하는 모습이 그들에겐 상대적인 박탈감과 결핍감을 안겨주는 아픔일 수 있기 때문이다.


 경제적으로 잘 사는 가정이라고 해서 행복한 것은 절대로 아니다. 가정마다 뭔가 문제가 있을 수 있다. 있기 마련이다. 다소 경제적으로 넉넉치 못하더라도 가족 간에 흐르는 정서가 서로 믿고 의지하며 보듬는 따뜻함과 신념으로 꽉 짜여있으면 그보다 더 좋을 수 없다. 그것이 바로 행복이다. 비록 경제문제가 아닌 관계의 문제라고 해도 서로 보듬고 의지하며 신뢰를 가지고 뭉쳐서 마음을 합한다면 해결이 될 것이다. 그것이 곧 힐링이고, 가정은 힐링 센터여야 한다.


 행복은 가정에서만 이뤄지는 것이 아니다. 회사로 이어지고 사회로 이어지고 국가로 이어진다. 결국 가정의 행복은 가정만의 문제가 아니라는 것, 그러나 현실은 언제나 무겁고 느리다. 이렇게 다 아는 소리를 하는 것조차도 무엇인가가 쉽게 변화되고 좋아지리라는 기대를 해서가 아니다. 천천히, 한 걸음씩이라도 그렇게 되기를 바라는 마음 한 쪽일 뿐이다. 


 가정과 회사를 오가는 셔틀 인생이라고, 복잡 미묘한 기계의 한 부품인생이라고, 흔쾌히 받아들일 수도 없고 그렇다고 사뭇 거부할 수도 없는 자본주의라는 거대한 조직에 끼어있는 작은 톱니 하나에 불과한 보잘 것 없는 인생이라고 절망할 필요도 없고, 해서도 안 된다. 작은 톱니 하나가 망가지면 기계 전체가 무너지고, 부품 한 개 한 개가 공장의 원동력이며, 큰 조직과 작은 조직 사이를 오가며 행복을 나르는 셔틀인 바로 당신, 아버지들이여! 우리 모두 빛나는 아버지들의 삶에 박수를 보낸다는 것을 잊지 마시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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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06-27
아버지날을 보내면서

 

 

 

 

 엊그제, 아버지의 날을 보내면서, 새삼스러울 일도 아닌데 새삼스러웠다. 한국에선 한때 ‘어머니의 날’이었다가 ‘어버이날’로 바뀌었고, 지금은 최소한 그날만큼은 어머니 아버지를 동시에 섬기는 것으로 굳어졌다. 
 어머니날과 아버지날이 따로따로 있는 캐나다에서는 유치원 꼬마들이나 어린 학생들은 학교에서 고사리 같은 손으로 그린 그림이나 공작품들을 들고 와서 자랑스럽게 건네며 뽀뽀를 한다. 그 작은 일에도 감동하고, 그 하찮아 보이는 선물에도 세상을 다 얻은 냥 즐거워하는 어머니 그리고 아버지들. 그게 부모의 마음이다. 

 

 “야! 이놈들아~ 어버이날인데 뭐 없냐?”

라고 쓴, 도시 근교의 어디에 걸려 있는 것을 찍은 현수막에 쓴 글귀가 정겹지만 아렸다. ‘뭐 꼭 해달라는 건 아니다!’하고 쑥스럽게 말하는 옆에서 세워둔 지게가 쓰러지던 오래 전의 보청기 선전광고가 떠오른다. 

 

 자식을 위해서라면 살도 피도 다 주신 부모님들이지만 이젠 자식으로부터 뭔가를 받고 싶으신 것이다.
왜 몰랐을까. 은근슬쩍, 부모님께서 운을 띄울 때까지 우리는 왜 바람구멍 솔솔 난 부모님의 그 마음을 헤아리지 못했을까. 그분들이 바라는 것은 크고 값 나가는 것이 아니다. ‘Mother`s Day에 고사리 손으로 그리고 만든 카드가 마냥 좋았듯, 다 자라서 새 둥지를 만들어 나간 자식들로부터 ’보고 싶습니다.‘ 라는 짤막한 안부의 문장 한 줄에도, ‘감사합니다.’ 하는 말 한 마디에도, 좋아하시는 부모님, 좋아하시는 물건이나 음식 한 가지 만들어드려도, 잠시 찾아가 절하고, 어깨를 주물러 드리는 작은 행동 하나에서도 마냥 감동하고 마냥 행복해 하신다. 

 

 얼마 전에 읽은 ‘어느 아버지의 유언’이라는 토막글이 생생하다. 아버지가 남긴 허름한 궤짝 하나, 유리조각과 사기조각들이 가득한 밑바닥에 들어있는 편지 한 장.

 

첫째 아들을 가졌을 때, 나는 기뻐서 울었다./둘째 아들이 태어나던 날, 나는 좋아서 웃었다./그때부터 삼십여 년 동안, 수천 번 아니, 수만 번 그들은 나를 울게 하였고, 또 웃게 하였다./이제 나는 늙었다. 그리고 자식은 달라졌다./나를 기뻐서 울게 하지도 않고, 좋아서 웃게 하지도 않는다./내게 남은 것은 그들에 대한 기억뿐이다./처음엔 진주 같았던 기억이 중간엔 내 등뼈를 휘게 한 기억으로 지금은 사금파리, 깨진 유리처럼 조각난 기억만 남아있구나!/아아, 내 아들들만은... 나 같지 않기를...그들의 늘그막이 나 같지 않기를……

 

 우리 모두는 아버지가 있다. 비록 고아라고 할지라도 이 세상 어디엔가 아버지가 있어 태어났다. 태어난 이후 늘 아버지의 그늘을 보호막으로 자라고 어른이 되었다. 그리고 우리도 또 그렇게 아버지가 되고, 되었다. 모성애란 말에 비해서 비중이 약하게 느껴지는 부성애, 때로는 부모의 자식사랑이 어머니의 사랑뿐인 것 같은 착각을 하게 하지만 아버지의 사랑이 얼마나 크고 무거운가를, 그리고 그 사랑을 지켜내기 위해서 아버지가 치러내는 삶이 얼마나 고단하고 파란만장한지를 우리는 잘 모른다. 겨우 알게 될 무렵이면 아버지는 이미 이 세상에 안계시거나 늙고 초라한 모습으로 당신의 끄트머리 삶을 근근이 영위하고 있다. 


 
 왜 아버지는 그럴까? 그 크고 깊고 융숭한 사랑을 나타내지 않았을까? 자식과 가족을 보호하고 지켜내느라 치르는 고통이 너무나 커서 미처 사랑을 표현할 겨를이 없었을 것이다. 어렸을 때 들었던 ‘나만 믿어!’ 누구나 기억하는 그 한 마디의 책임 때문에 온갖 궂은일을 마다하지 않았고, 막노동꾼들이 되어서도 티내지 않았고, 자고새면 그저 노동판으로, 세상의 정글 속으로 몸을 던져야 했던 아버지.

 

 이민자들의 아버지는 더욱 그렇다. 낯선 나라로 삶의 터전을 바꾼 것도 자식들의 장래를 위해서다. 훗날 자식들에게 보다 나은 삶을 구가할 수 있도록 당신 자신의 인생을 몽땅 걸고 소모해가며 생면부지의 나라에서 고군분투해야 했다. 그러므로 그 이뤄낸 성과가 비록 크거나 멋져 보이지 않아도 어느 아버지들의 삶도 결코 초라하지 않다. 초라하게 해서는 안 되는 것이 자식들의 의무다. 

 

 아버지의 삶은 알을 부화할 때까지 알을 입에 담고 태평양을 떠도는 천축잉어와 같다. 자식이 태어날 무렵, 아무 것도 먹지 못해서 기력을 잃고 죽고 마는 아비고기. 알을 낳고 떠나버린 엄마고기 대신, 부화해서 독립할 때까지 곁에서 보살피는 민물의 ‘가시고기’도 마찬가지다. 가시마저 자식에 대한 사랑이다. 아버지의 지독한 사랑을 그린 소설 ‘가시고기’를 읽으며 눈물을 한없이 쏟아내었었다. 
 


 늙어 가시마저 허물렁해진 아버지, 굽은 등뼈에 주름 투성이의 얼굴, 고목의 그루터기 같은 피부의 아버지, 일을 할 수 없을 만큼 초라해진 아버지, 그러나 그 아버지를 누가 무능하다고 할 수 있을 것인가. 아버지는 결코 무능하지 않다. 비록 자식에게 고대광실 근사한 자리를 물려주지 않았다고 해서, 비록 자식에게 드러나게 편안하고 높은 보금자리를 마련해주지 못했다고 해서 결코 무능한 아버지일 수는 없다. 


 우리가 존재한다는 것만으로도 아버지는 이미 훌륭하시다. 우리가 살아있다는 것만으로도 아버지의 기도가 구구절절 통했다는 사실을 잊어서는 안 된다. 비록 아무것도 해주신 것이 없다고 생각될 지라도 우리가 부모님으로부터 받은 은혜는 이루 말할 수 없이 크고 많다. 

 

 늘 마음으로만 불효자라고 곱씹었다면 어디 꼭 이런 날만인가. 정해진 날이 지났더라도 시간나는대로, 시간을 내어서라도 한번쯤 찾아뵙고, 거칠어진 손안에 우리의 손을 밀어 넣어 따뜻한 체온을 나눠드려야 한다. 뻣뻣해진 무릎이며 허리를 만져드려야 한다. 놀라게 될 것이다. 어느 사이에 아버지의 손이 이렇게 나무껍질처럼 거칠어졌을까. 어느 사이 꼿꼿하던 등이 활처럼 굽으셨을까. 어느 사이 든든하시기만 하던 아버지가 왜소해지셨을까. 후회가 가슴을 칠 것이다. 


 
 더 큰 죄인이 되지 않도록, 때를 놓치고 후회하지 않도록, 지금이라도 당장 수화기를 들자. 엄마! 아빠! 하고 어릴 때처럼 불러보자. 마음을조금 더 내어 차에 키를 꽂자. 달리자 빈 둥지 지킴이가 된 부모님 곁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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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06-10
나와 무궁화

 

나와 무궁화
 

권 천학 시인
([email protected])

 나와 무궁화의 대화가 시작된 것은 새집으로 이사 와 첫 밤을 보낸 다음날, 바로 그 첫 새벽부터였다.
 새집의 설렘으로 일찍 잠이 깨었다. 모두들 고단함으로 아직 깨어나지 않은 시각이어서 조심스레 아직 정리되지 않은 짐들 사이를 헤집고 뒷마당 쪽 문을 열고 밖으로 나서는데, 오! 무궁화! 희붐한 새벽빛에 눈을 찌르듯 박혀왔다. 새빨간 꽃심 때문인지 새하얀 꽃송이가 유난히 선연해서 눈이 부시다 못해 마음까지 부셨다. ‘백의민족’이 떠오르며 저릿했다. 아홉 송이였다. 이사하느라고 분주했던 전날까지도 봉오리로 있어 잠잠했는데, 마치 우리의 이사를 축하해주듯, 우리와의 만남을 반기는 듯, 밤사이 첫 꽃을 피워 올린 새하얀 무궁화! 포름하게 바랜 옥양목 두루마기를 입고 찾아오신 선조(先祖)할아버지 같았다.
 

타국생활이 벌써 여섯 해째, 이곳의 생활환경에 어느 정도는 적응되었지만 어딘가 모르게 물에 떠도는 기름 같다. 먹는 것도 생활방식도 어중간하다. 완전 한국식도 아니고 그렇다고 캐나다식도 아니다. 거기다 아직 영어도 서툴다. 영어가 서툰 데는 나름대로의 이유가 있다. 나는 우리 집에서 한국말 담당이다. 손자손녀가 옹알이를 할 때부터 한국말로 응답했고, 육아방법도 놀이도 한국식이다. 지금까지도 한국말을 가르치고 있으니 저절로 영어는 뒷전이었다. 어디 한국말뿐이겠는가. 한국의 얼, 그것을 심는 일이다. 그런 내 마음을 아는지, 다가서는 나에게 “당신은 대한민국 사람이고, 나는 대한민국 꽃이야!” 하는 무궁화의 귀엣말에 “그래, 나도 무궁화야” 하고 대답했다.
 

두어해 전부터 단독주택으로 이사할 계획을 세웠다. 손자손녀들이 마당 있는 집에서 흙을 밟고 뛰어놀게 하고 싶어서였다. 자금이며 지역 선정이며 사전준비를 하고 봄부터 실행에 들어갔다. 콘도를 내놓고 단독주택을 보러 다녔다. 가장 중점을 둔 것은 누구나 그렇듯, 아이들 학교와 교통문제였다. 주말마다 여러 채의 집들을 보러 다녔다. 그 중 마음에 든 집이 바로 이 집이었다. 마음에 점을 찍고 다시 둘러보러 왔을 때 눈길을 사로잡은 것이 바로 마당 반쪽을 갈아 만든 넓지 않은 화단 가운데에 덩그마니 서 있는 무궁화였다. 무궁화! 반가우면서도 이상했다. 낯선 나라이긴 하지만 공원이나 길가화단에서, 혹은 개인집 정원에서 가끔 무궁화를 볼 수 있다.

그런데 휑뎅그렁한 화단 한 가운데 홀로 우뚝 서있는 나무가 하필이면 무궁화일까 하는 생각에서였다. 이름 모르는 키 작은 서양종 식물 서너 포기가 드문드문 잡초와 섞인 떼 풀 사이에 납작하게 엎드려 있는 것을 보면 전 주인이 화단을 돌보지 않았음이 역력했고, 그나마 화단 가운데에 불쑥 무궁화를 심은 것도, 집을 팔기 위해서 급하게 조경했음이 짐작되었다. 그러자니 나무 둘레에 거름을 듬뿍 넣었을 것이 분명했다. 덕분에 무궁화가 건강했다. 용케도 무궁화였다니, 이상했던 생각 대신 고마운 생각이 들었다.
 

허리쯤 닿는 키에 사방으로 뻗은 가지가 빽빽하게 암팡졌다. 가지사이를 헤적여보니 아직은 초록색 주머니에 단단히 싸여있는 꽃봉오리들이 조랑조랑 많이도 매달려 신기할 정도였다. 문득, 저것들이 우리의 미래를 꽃피울 새끼들이 아닌가 생각하니 살가웠다. 새벽정기로 촉촉하게 젖어있는 꽃송이를 보듬듯, 손이 닿지 않게 감싸 안고 입맞춤을 했다. 은은하게 나는 듯 마는 듯 향기가 느껴졌다. 이래서 훈화(薰化)라고 했던가. 환화(桓花), 천지화(天指花), 목근(木槿), 근화(槿花) 또는 순(舜) 그리고 샤론의 장미(Rose of sharon)……, 그 많은 이름을 가지고 있음은 동서양 불문하고 세계 어느 곳에서나 뿌리내려 살 수 있다는 의미도 되리라. 그러므로 우리나라 꽃만이 아니라 글로벌의 꽃이기도 하다.
 

지금은 세계 각국에 한국 사람들이 살지 않는 곳이 거의 없다. 어디가 되었든 한국 사람으로서 당당하게 삶의 터전을 일구어간다. 나 역시 그 깊은 새김을 되새기며 살고 있으니 내가 바로, 외국에 나가 사는 우리 모두가 한 그루의 무궁화들이 아닌가.
 

내가 어렸을 때는 무궁화가 흔치 않았다. 시골집 마당이든 울타리든 접시꽃과 봉숭아는 흔해도 무궁화는 드물었다. 무궁화는 진딧물이 많이 생기고 오갈이 잘 드는 나무로 인식되었고, 하필이면 그런 꽃을 우리나라꽃으로 삼았을까? 불만스러웠지만 무슨 뜻이 있을 것 같았다. 그러다가 어느 땐가, 일제강점기에 일본사람들이 우리나라 꽃이라서 토양이 좋지 않고 응달진 곳이나 진창에 무궁화를 심어 제대로 자라지 못하게 해놓고 ‘진딧물이 잘 생기고 오갈이 잘 드는 병약한 품종의 나무’라고 누명을 씌우며 보기 싫다고 뽑아내버렸다는 사실을 알았을 때 일본의 악랄함에 속이 떨렸었다. 어쩌다 무궁화 한 그루라도 발견하게 되면 어린 마음에 억울하게 칼을 쓰고 매를 맞고 옥살이를 하는 ‘춘향’을 떠올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살아남아 끝내 사랑을 이룬 춘향이!

그러나 정작 무궁화의 기개를 제대로 느끼고 선조들이 무궁화를 국화(國花)로 삼은 뜻을 짚어낸 것은 외국에서였다. 유럽이나 북미의 여러 나라들을 여행할 때마다 곳곳에 무궁화가 피어있었고 하얀색, 분홍색, 빨강색, 보라색……으로 색도 다양했다. 공원이나 정원, 울타리, 가로수 등 곳곳에 피어있어서 외국사람들도 좋아하는 글로벌 꽃임을 알 수 있다. 눈에 띄는 무궁화마다 건강했고 꽃이 수려했다. 단아하면서 겸허했고, 어느 곳에서든 뿌리내려 잘 사는 생명력에서 은근과 끈기의 상징을 보았다.
 

아홉 송이로부터 시작해서, 그 다음날엔 열여덟 송이, 그 다음날엔 스물다섯송이, 그 다음날엔…나날이 꽃송이들을 더 많이 피워내며 번성함을 보여주는 무궁화와의 대화, 타국에서 이뤄지는 나의 삶만이 아니라 자식과 손자들까지 당당한 한국인이 될 수 있도록 노력하겠다는 다짐과도 같았다.
 

달포가 넘어 선 오늘 아침에도 손자를 학교에 데려다주고 돌아와 무궁화나무 곁에 앉았다. 먼저 핀 몇몇 꽃송이가 떨어져있다. 시들었으나 분명 죽은 것은 아니다. 순리에 따른 고운 모습일 뿐.
 알지? 우리 함께 가자!
 떨어진 꽃송이들조차 아깝고 소중해서 모닥모닥 모아 나무 아래 흙으로 덮는다.
 이제 거름이 되어라! 나도 그러마!
 기도문처럼 뇌며 나도 무궁화 한 그루임을 깊이 새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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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04-11
봄날의 월요일 그리고 4월!

 

봄날의 월요일 그리고 4월! - 졸음운전 조심

  시카고 지하철역으로 들어가던 전동차가 선로를 벗어나 오헤어 국제공항 에스컬레이터에 충돌, 30여명의 부상자가 발생했다. 원인은 졸음운전이었다. 같은 날 서울 송파에서도 버스기사의 졸음운전으로 3명이 숨지고 16명이 다친 사고의 영상이 공개됐다. 졸음운전의 원인은 피로다. 마침 월요일 아침이었다. 주말의 피로가 쌓여 가장 힘들다는 월요일 아침. 그래서 ‘월요병’이란 말도 생겼다. 언제라고 졸음운전이 없을까만, 그러고 보니 봄이고 4월이다. 월요일에 봄날의 4월. 이래서 4월은 잔인한 달이기도 하다. 

 자타가 인정하는 베스트 드라이버였던 나도 졸음운전으로 아찔했던 추억이 있다. 서울에서 출발하여 팔공산 선본사에 가는 길이었다. 대구에서 외곽도로로 빠져 하양시내를 통과하여 선본사로 들어가는 산길의 입구에서 저만큼 몸집이 우람하고 웅장한 공사용 트럭이 앞서 들어서는 것을 보고 뒤따라 들어섰다. 

 대형트럭은 화물을 싣지 않은 상태로 빠르지도 느리지도 않은 속도로 달렸다. 평소에도 안전운행이 습관화된 나 역시 속도를 내지 않고 느긋하게 뒤따르고 있었다. 서울에서부터 시작해서 다섯 시간이 넘는 장거리 운행의 마지막 코스였다. 계속 오르막인 굽이굽이, 열어놓은 차장으로 들어오는 바람결에 서울에서 묻혀온 세속의 때들을 씻어내며 한껏 상쾌했다. 교통량도 적었다. 어쩌다 마주 오는 차가 있어도 서로 비켜갈 수 있을 정도의 산중 길이었다. 
 

그 해, 3월초, 딸이 대학교에 입학하여 기숙사생활을 시작한 후, 황산스님의 알선으로 선본사에 방 하나를 차지했다. 어디 절에 가서 한번 살아봤으면 좋겠다고 허실삼아 했던 말을 기억한 황산스님의 배려였다. 한 일 년만 그곳에서 보내기로 작정을 하고 지낸지 한 달쯤 되어서 첫 나들이를 하고 돌아오는 길이었다. 주말을 이용하여 서울집에 가서 부모님들을 뵙고 월요일 아침에 출발하여 절로 돌아가는 길이었으니, 4월, 딱 이때쯤의 월요일 아침이었다. 
 

산(山)의 사계절을 직접 체험하고 싶어 시작한 산사(山寺)생활, 그 첫 봄. 신록이 돋는 산 풍경은 그야말로 눈이 부셨다. 공기는 달고 바람결은 깃털 같았다. 산사생활을 체험할 수 있게 된 그 기회가 마치 횡재 같아 마냥 감사하고 좋기만 했다. 이런 저런 생각들이 마치 파노라마처럼 흘러갔다. 
 

온통 햇살의 비늘이 파닥거리는 산비탈길이 물결 속에 가라앉은 외줄 같았다. 외줄을 타고 8부 능선 쯤 올라가고 있었다. 여전히 앞서가는 대형트럭을 보며, 저 차 운전자가 나를 보고 있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상당한 거리를 추월하지 않고 고분고분하게 따라오는 것이 이상하게 생각될지도 모를 일이라는 생각도 했다. 
 

어느 순간, 외줄이 흔들렸나? 차가 기우뚱하는 것을 느끼면서 퍼뜩 정신이 들었고 발은 브레이크를 밟고 있었다. 섬광 같은 찰나였다. 오른쪽 앞바퀴가 도로와 산자락 사이에 파인 2미터 정도의 깊이에 2미터가 넘는 너비의 물길, 울퉁불퉁한 골 사이, 허공에 떴고 차는 45도 각도로 기울었다. 짧은 동안, 무중력의 공간에 떠 있는 기분이었다. 움직이면 차가 더 기울 것 같아서 꿈쩍도 못하고 눈동자만 굴려 앞뒤를 살폈다. 호흡마저 부담스러웠다. 
 

지나가는 사람도 차도 없었다. 난감했다. 그 순간이 마치 절벽위에 선 기분이었다. 조심조심, 브레이크에서 발을 떼었다. 무게가 작용할까봐서 숨을 들이쉰 채 멈추고 몸을 미세하게 움직여 운전석 옆의 문을 밀고 나오기를 시도하였다. 출렁 하는 차의 흔들림이 감지되자 기암 할 것 같아 숨을 삼켰다. 진동이 가라앉자 다시 천천히, 마치 깃털이라도 되듯, 문을 살그머니 열고 밖으로 빠져나오는데 그야말로 곡예를 하는 기분이었다. 차체 자체가 기울어있는 상태라 문 높이가 들려져 있어 더 무서웠다. 
 

겨우 빠져나와 잽싸가 반대편 길가로 가서 섰다. 한적한 산길에서 벙벙한 기분으로 기울어진 차를 멍하니 보고 있었다. 그때였다. 앞쪽에서 조금 전에 구부러진 숲길로 모습을 감춘 대형트럭이 되돌아오고 있었다. '아니, 잘 따라오시더니 와 그랬어요?' 차를 멈추고 운전사가 뛰어내리며 한 말이다. 이상하게도 그 말에 안도(安堵)가 느껴져 피식 웃고 말았다. 
 

산길 입구에서부터 뒤 따라 오는 내 차를 계속 사이드밀러로 보며 운전했다고 했다. 흠! 나도 그 생각했지. 추월하지도 않고 다소곳이 따라오기에 지켜보며 달리고 있었는데, 어느 순간에 보이지 않아서 이상하다싶어 되돌아왔다는 것이다. 
 

‘길동무 아닌교?’ 맞다. 서로 같은 생각을 했으니 길동무지. 그래서 안도가 되었구나. '갓바위에 가십니꺼?' 내가 입은 법복을 보고 짐작한 모양이었다. 그렇다고 대답을 했다. 짤막하게 대화를 나누면서 내 차를 앞뒤로 살피더니 자기 차에서 뭔가 장비를 꺼내고 있는데 마침 아래쪽에서 승용차 한대가 올라오는 것을 보고 손을 들어 세웠다. 승용차의 기사도 금방 상황을 알아봤다. 이어 또 한대의 승용차가 올라왔다. 트럭운전사가 또 세웠다. 
 

'보소, 보소, 힘을 합치면 안 되겠능교?' 트럭에서 꺼낸 쇠줄을 메고, 앞뒤에서 장정 셋이서 차를 들어 올리려고 자세를 취했다. 나도 끼어들었다. '보살님, 비키소. 저만큼 가서 서 있으소' 나는 말 잘 듣는 아이처럼 조금 전에 서있던 자리로 되돌아가서 서있고, 으랏차, 으라랏차! 몇 번의 기합소리와 함께 차가 제자리로 돌아왔다. 
 

고맙다는 인사를 나누고, 손을 털고 떠나는 승용차들, 맨 나중에 트럭운전사가 트럭의 운전석에 뛰어오르면서 이번엔 앞서 갈랍니까? 하고 물었다. 아뇨. 그럼 조심해서 따라 오이소! 피식 웃던 나의 웃음에 대한 답처럼 그가 씨익 웃었다. 트럭을 앞세우고, 나는 뒤따랐다. 아니 트럭이 내 차를 보이지 않는 줄에 매달아 끌고 가는 것 같았다. 

 빵빵 빠앙! 
 

선본사 입구에 있는 주차장에 도착하여 오른쪽으로 꺾어 대형차주차장으로 들어가면서 두 번은 짧게 한번은 길게 클랙슨 소리가 울렸다. 
 

빵빵 빠아아앙! 나도 화답을 하고, 주차장 앞을 지나 절 구내 길로 들어섰다.
졸음운전사고가 많이 나는 월요일 그리고 봄날의 4월. 다행히 작은 일로 끝이 났지만, 그리고 지금이야 ‘느리게 살기’로 차 없이 지내지만, 모든 운전자들이 봄날의 나른한 유혹에 넘어가지 않기를 바라는 마음에서 한 폭의 봄날 풍경을 그린 수채화처럼 자리하고 있는 내 안의 추억을 펼쳐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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