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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병선의 大佳里(대가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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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11-13
이탈리아 나폴리(Napoli)

 

 

카프리 섬에서의 관광을 마치고 여객선을 타고 나폴리로 떠날 때는 대개 오후의 태양이 기울기 시작하는 늦은 오후가 된다. 선수를 북쪽으로 파도를 가르며 쾌속하는 여객선이 만드는 파도와 물보라가 파란 지중해를 하얗게 갈라 놓았다. 


사라지는 항로를 바라보는 것도 즐겁고, 동쪽을 바라보면 “내가 언제 용암을 뿜어 냈었냐?” 는 듯 다소곳이 늦은 오후의 햇볕에 젖어 있는 베스비우스 산과 해안선 따라 보이는 하얀 집들이 파란 바다 너머에 보이는 아름다운 경치가 한참 이어진다.

 

 

 

 


그래서일까? 14세기부터 세계 3대 미항(美港) 중 하나로 꼽히는 나폴리.


요즈음에도 습관에 따라 미항이라고 불리우지만, 태양이 항구 바로 앞에 우뚝 선 누오보성 뒤로 기우는 즈음에 바다에서 바라보는 나폴리는 무엇 때문에 미항이라고 불리는지 모르겠다. 나폴리만 전체의 아름다움 때문일까?


아마도 나폴리가 유명해진 이유 중의 하나는 노래가 몸에 배인 이태리 사람들 중에서도 뱃사람들이 많이 모이다 보니 나폴리 항구에서부터 시작된 가요제를 통해서 하층민들이 즐겨 부르던 대중가요가 칸초네(canzone)라는 음악 장르에 들도록 유명해진 것 때문인지도 모르겠다. 마치 “탱고” 하면 부에노스 아이레스를 연상하듯이….

 

 

 

 


흔히 칸초네의 왕으로 불리는 “오, 나의 태양(O solo Mio)”는 1898년 나폴리의 피에디그로타 가요제에서 우승한 노래다. 칸초네의 여왕으로 불리는 “돌아오라 소렌토로”는 전에 설명한 대로 1902년에 우승한 곡으로 소렌토를 세계적인 도시로 만들었고….(칸초네의 역사에는 성악과 더불어 기악도 있었다고 하는데 자세한 내용은 음악 연구가들에게 맡겨 두기로 하자.)


나폴리에는 또 한가지 유명한 것이 있다. 이태리 하면 피자를 생각하게 되고, 피자 하면 이태리를 생각하는 대명사가 되었는데 그 피자로 유명한 곳이 바로 나폴리인 것이다.

 

 

 

 


이 또한 어찌 보면 짜장면이 인천에 자리잡은 화교의 음식점에서부터 시작되어 서민들이 즐겨 먹는 중국음식의 대명사가 된 것처럼, 피자 역시 부둣가의 노동자들이 쉽게, 부담없이 사 먹을 수 있는 음식이었던 지도 모르겠다. 


1830년경부터 나폴리 피자가 대중화되면서 이탈리아 전역으로 퍼져 나가게 되었는데, 칸초네가 미국으로 이민 간 이탈리아 사람들 사이에 망향가로 인기를 얻으면서 노래와 더불어 피자 역시 미국으로 확산되기 시작하였던 것이다. 

 

 

 

 


피자가 이렇게 세계화되다 보니 나폴리 사람들은 1984년 정통 나폴리피자협회를 설립하면서 나폴리 피자를 보존하기 위하여 노력하고 있다.


나폴리 피자라고 부르기 위해서는 지켜야 할 조건, 8가지가 명시되어 있으니까.


그런데…. 피자를 굽는 화덕을 보면 오래전, 피자가 무엇이었던 지도 모르던 시절, 한국에서 중국 호빵을 귀한 간식으로 먹을 때 본 중국집의 화덕과 너무나도 같은 모습이다.

 

 

 

 


또 하나의 이태리를 대표하는 음식이 스파게티인데 이 또한 짜장면과 너무나도 비슷하지 않은가? 중국에서도 개방 이래 젊은 세대를 주축으로 스파게티를 먹기 시작하자 이를 '이따리멘(意大利麵)'이라 부르면서도 이 스파케티의 원조가 중국이라고 주장한다.


중국인들이 근거로 들고 있는 4000년 역사의 국수는 칭하이(靑海)성의 라자(拉加) 유적지에서 면이 발굴되었기 때문이다. 이 면은 매우 가늘어 직경이 대략 0.3cm, 길이 50cm로 색이 누렇고, 오늘의 면과 매우 흡사하다고 한다.


그래서 중국은 스파게티의 역사는 실크로드의 거점으로 번영을 누리며 중동, 유럽의 사람들이 모여 성시를 이뤘던 고대의 '글로벌 시티'였던 란저우(蘭州)로 거슬러 올라간다고 주장한다. 

 

 

 

 


중국의 젖줄 황허(黃河)를 끼고 있는 란저우에는 유명한 “란저우 라면”이 있어 요즈음에도 란저우 시가 전문 사부를 미국, 영국 등 세계 각지로 보내 기술을 전파시킬 정도라니까! 


하긴 마르코 폴로의 구술로 작가 루스티켈로에 의해 “동방견문록”이 발표된 것이 1292년이었고, 1434년에는 명나라의 정화가 그 당시 존재하였던 이집트 운하를 통해 베니스까지 갔었다고 하니 언제부터 시작되었는지 가늠할 수 없는 비단길까지 통한 동서의 문물과 문화교류의 역사는 우리의 상상을 훨씬 뛰어넘는 것 같다.


밀을 재배하고, 곡식으로 사용한 역사야 인류의 역사와 거의 비슷한 연륜을 가졌지만 기계로 면발을 뽑을 수가 없었던 그 옛날에 면발을 뽑을 수 있는 방법은 결국 우리가 중국집에서 보아 오던 “수타국수(手打麵)”가 아니었을까? 


돌아다니다 보면 참 재미있게 엮이는 사물들이 의외로 많은 것을 느끼게 되니 이 또한 여행의 재미가 아니겠는가!


나폴리는 이탈리아 남부지역의 금융중심지이자 나폴리 왕국과 양시칠리아 왕국의 수도이기도 했었기에 볼만한 고적들도 많이 있으련만 워낙 아침 일찍부터 폼페이를 돌고 카프리 섬을 오르내리고 난 후에 또 내일 들려야 할 다른 지역들의 볼 것이 많은 이탈리아 이기에 나폴리에서는 저녁으로 유명한 나폴리 피자를 먹고는 대부분 숙소인 로마로 돌아가는 일정들이다. 


이를 보상할 요량이어서인지 슬쩍 “이 곳의 치안이 좀 불안 하기에 관광지에서는 특히 조심을 하여야 한다”며 겁을 준다. 하긴 관광지에서 소지품 조심하지 않고 다닐 만한 곳이 세상 어디 있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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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11-06
이탈리아 -카프리 섬(Isola di Capri)

 

  

폼페이를 둘러본 후 소렌토로 오는 것은 소렌토 앞 바다에 있는 작은 섬 카프리를 보기 위한 목적 외에는 별로 없는 것 같다. 많은 시와 노래에 오르내리던 아름다운 섬 Capri, 선사시대부터 사람들이 살았던 섬으로, 그리스의 식민지가 되었다가 로마 제국의 식민지가 되어 황제들의 휴양지로 이용되었던 아름다운 섬이다.

 

 

 


작다고는 하여도 서부에 솟은 솔라로 산은 높이가 589m에 이르며, 특히 아름다운 경치와 온화한 기후로 19세기부터 남부 이탈리아에서 가장 인기 있는 휴양지 중의 하나로 유명해지며 세계의 부호들이 별장들을 가지고 있는 섬이 되었다. 

 

 

 


바위섬이라 물이 부족하였지만 1978년 본토와 연결된 해저 수로가 완공되어 담수가 공급되면서 관광사업과 더불어 각종 산업이 활성화돼 더욱 활기차진 섬이다.

 

“잔잔한 지중해”라지만 배가 워낙 빠르다 보니 파도에 출렁이는 추풍낙옆? 

 

 

 


많은 동행들이 배 멀미를 하였다. 허나 그것도 잠깐, 섬에 내려 곡예사처럼 아슬아슬하게 좁은 길을 돌며 쌩쌩 달리는 버스를 타고 중턱 즈음의 동네에서 내려, 케이블카도 아닌 케이블 의자에 앉아 섬에서 제일 높은 솔라로 봉우리에 올라가 찬란한 햇빛을 받으며 쪽빛같은 지중해를 배경으로 이태리 원산의 카페치노를 마시는 기분은 또 한번 쨍! 이었지.

 

 

 

 


좁은 정상에서는 할 일도 많지 않아 아쉬움을 남기고 중턱 마을로 하산하여 둘러본 가게들은 우리의 수준이 아닌 명품들. 값이 장난이 아닌데 그것을 사는 사람들이 많이 있으니 그들은 과연 어떤 사람들일까? 남편을 잘 만난 여인들? 부모를 잘 만난 후손들? 재물 운이 무지무지 좋은 자수성가 자들? 

 

 

 

 


세계의 명소이다 보니 나 같은 사람이야 60평생에 한번이지만 그런 사람들이야 자기 집 뒷마당이 아니겠는가? 참 알고도 모를 게 사람 팔자인가 보다. 팔자 타령을 할 만큼 많은 명품들이 찬란한 지중해의 햇살에 한껏 멋을 자랑하고 있었으니까.” (2006년 방문 때의 감회였다).

 

2017년에는 조금 다른 코스인가보다. 후니쿨라를 타고 중턱 동네에 내려 고대 로마제국 시절, 아우구스투스 황제가 조성하였다는 공원으로 간다. 깎아지르듯 한 바위 섬의 중턱, 펑퍼짐한 곳에 아기자기하게 조성된 공원은 다른 공원들과 큰 차이는 없었지만 모퉁이를 돌 때마다 낭떠러지 아래 보이는 파란 바다가 따가운 햇살에 지친 심신을 시원하게 하여 주었다.

 

 

 

 


공원을 한 바퀴 돌고 후니쿨라를 타고 해안으로 내려와 전세 낸 보트에 타고 섬을 반 바퀴 도는 뱃놀이다. 나폴리로 가는 여객선을 타려면 반 바퀴밖에 못 돈단다. 허허!


해변에서는 볼 수 없는 풍경이 바다 위 작은 배 건너 편에 나타나는 밝은 오후의 지중해 물은 깊다 못해 검푸르렀고 파도는 잔잔하여 흥취를 더해 주었다.

 

 

 


뱃놀이 후 나폴리로 가는 동안 가이드한데서 들은 소리다. 한국이 보릿고개를 넘긴 후 50여 년 동안 급성장을 하고 보니 요즈음에는 세계 어디를 가도 한국 관광객들이 무리 지어 다니는 것을 볼 수가 있다. 그 중에서도 더 많이 찾는 곳이 이태리이고 보니, 결코 적지 않은 옵션 비용을 내면서도 카프리 섬으로 오는 사람들이 참 많단다. 

 

 

 


한국사람들을 태운 관광버스가 거의 매일, 오전 오후로 10대 정도가 이 곳에 오기에 소렌토에서 40분 남짓 항해하는 동안, 한인들 가이드가 한자리에 모여 카프리 섬에서의 관광 스케줄을 서로 조정한 단다. 

 

 

 

 


카프리섬 단체 관광은 대략 정상과 중턱과 해변 3가지로 나누어지는데 한꺼번에 몰리면 서로가 불편하니까. 우리 일행들은 중턱의 아우구스투스 황제가 조성하였다는 공원을 보고 내려와 섬을 반 바퀴 도는 해안 관광으로 결정이 되었나 보다.


결국 이런 게 전화위복이란 게 아닐까? 나는 덕분에 3곳을 다 보고 느낄 수가 있었으니 말이다. ㅎㅎ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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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10-24
이탈리아 -소렌토(Surriento)

 

 

 

폼페이를 보고 나면 전철을 타고 소렌토로 가서 배를 타고 카프리(caprii) 섬으로 갔다가 나폴리로 가는 것이 정해진 관광의 코스가 되었다. 소렌토라는 지명은 로마인들이 이곳을 시레나(Sirena)의 땅이라는 뜻으로 수렌툼(Surrentum)이라고 부른 데서 유래한다. 


시레나는 그리스어로 세이렌(Seiren)의 라틴어 및 이탈리아어식 표기이다. 그리스 전설에 의하면 세이렌(Seiren)은 달콤한 노래를 불러 뱃사람들을 유혹한 후 넋을 잃게 한 뒤 바다에 빠져 죽게 했다고 한다. (라인강의 로렐라이 언덕의 전설과도 비슷하다.)

 

 

 


지중해 모험을 마치고 배를 타고 귀향하던 율리시즈는 그녀의 노래를 듣고 싶어 몸을 돛대에 동여매고, 선원들의 귀는 밀랍으로 막게 한 뒤 이 바다를 지나갔다고 한다. 이 전설의 무대가 나폴리와 소렌토 앞바다였던 것이니 이 지역은 그 때부터 노래가 유명하였던 모양이다. 


커피전문점 스타벅스의 로고에 나오는 머리 긴 여인이 바로 “세이렌”이란 님프, 요정이다. 허긴 항구도시 ‘시애틀’에서 뱃사람들을 유혹하며 1호점이 시작되었으니 아주 걸맞은 로고인 셈이다. 각설하고….

 

 

 


그래서일까? 우리들이 학창시절에 즐겨 부르던 노래, “돌아오라 소렌토로”(Torna a Surriento). 한 시대를 풍미하던 3 Tenors 가 우렁차게 부르며 세계인들의 귀를 즐겁게 하여 주던 노래의 본 고장 소렌토 역시 고대 로마시대부터 귀족들의 휴양지로 각광받아 온 곳이었다. 


그러다 서기 79년 8월 24일에 폭발한 베수비오 화산의 용암으로 인근의 폼페이가 완전 매몰되자 폐허가 되다시피 한 소렌토는 시간이 흐르면서 절벽 위에서 지중해를 바라보는 아름다움에 사람들이 모여 뒷산 비탈에 올리브를 경작하며 살았으나 생활은 어렵기만 했단다. 그래서 고향에서 살기 어려운 나폴리와 소렌토 사람들은 19세기부터 희망을 찾아 미국 땅으로 많이 떠났고….. 


소렌토 해변에는 1812년 세워진 고급호텔 ‘트라몬타노’가 있다. 이 호텔의 트라몬타노 사장은 나폴리 예술가 집안의 젊은이 잠바티스타 데 쿠르티스와 동생 에르네스토 형제를 후원하고 있었다. 형제들은 그림과 조각뿐 아니라 음악과 시에도 재능을 보여, 형은 호텔의 테라스에서 시적인 영감을 얻는 시인이었고, 동생은 홀에서 피아노를 연주하며 작곡도 했단다. 

 

 

 


지중해의 절경이 한눈에 들어오며, 예술적인 분위기가 흐르는 이 호텔에서 괴테, 바이런, 롱펠로, 입센 등 수많은 문인들이 절경을 보며 감탄사를 연발했단다. 


1902년 이탈리아 총리가 남부 이탈리아 가뭄 현장을 순방하는 길에 이 호텔에 묵었을 때, 소렌토 시장이기도 했던 “트라몬타노”는 총리에게 우체국 설립을 청원해 약속을 받아냈다. 


트라몬타노는 총리가 약속을 잊지 못하도록 쿠르티스 두 형제에게 노래를 하나 만들게 했다. 이렇게 해서 형이 작사하고 동생 에르네스토가 작곡해 탄생한 노래가 ‘돌아오라 소렌토로(Torna a Surriento)’다. 

 

 

 


수리엔토(Surriento)는 소렌토(Sorrento)의 나폴리식 표기다. 소렌토를 떠난 연인을 부르는 듯하면서 소렌토의 아름다움을 찬양하는 이 노래는 1902년 나폴리 피에디그로타 가요제에서 첫 선을 보인 뒤 세계적인 명곡으로 알려졌다. 


동생 에르네스토는 세계적인 테너 벤자미노 질리(B Gigli)의 반주자로 활동하는 동안 질리는 ‘돌아오라 소렌토로’를 비롯해 에르네스토의 노래를 자주 불렀는데, 그중 도메니코 푸르노의 시에 부쳐 작곡한 ‘날 잊지 말아라(Non ti scordar di me)’도 ‘돌아오라 소렌토로’에 이어 세계적인 명곡으로 알려지게 되었다.


그 뒤 우체국이 과연 생겼을까? 이 노래가 미국으로 이민간 많은 사람들이 바다 멀리 갈 수 없는 고향에 대한 그리움을 달래며 부르는 애창곡이 된 것을 보면 아마도 우체국이 지어진 것 같다.

 

 

 


소렌토역 광장에서 시내로 가는 길에 잠바티스타 데 쿠르티스(Giambattista De Curtis)를 기념하는 청동 흉상이 있다. 흉상 아래에는 소렌토 시(市)가 1982년 ‘돌아오라 소렌토로’ 발표 80주년을 기념해 그에게 헌정한다는 글귀가 있다.


그러고 보면 소렌토 시가 정작 기념해야 할 이는 작사자(잠바티스타)보다 작곡가(에르네스토)일텐데 그를 위한 기념상은 없다. 왜일까?


어떤 설은 이 노래가 나폴리 지방의 민요였다고 주장하기도 하지만 에르네스토 데 크루티스가 작곡, 시인이자 화가인 그 형, 잠바티스타 데 쿠르티스가 작사한 노래로 1905년 공식적으로 저작권이 등록되었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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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10-19
이탈리아 폼페이(Pompeii) -되찾은 도시

 

나폴리와 소렌토 사이에 형성된 나폴리만의 가운데에 토레 안눈치아타(Torre Annunziata)라는 작은 도시가 있다. 아마도 서기 79년 8월24일에 폭발한 베수비오 화산의 용암으로 덮이어 옛 도시의 흔적도 없던 자리에 사람들이 모여 살면서 형성된 작은 어촌이었던 것 같다.


16세기말에 사르노 강으로부터 토레 안눈치아타 시로 물을 끌어오기 위해 라치비타라고 알려진 구릉 밑에 터널을 파던 건축가 도메니코 폰타나에 의해 폼페이의 유적이 처음으로 발견되었다.


매몰된 도시의 발굴은 오스트리아 점령기인 1709년에 “헤르쿨라네움”에서 처음으로 시작되었으며, 폼페이의 발굴 작업은 1748년에야 시작되었다. 


발굴 중1763년, 그 장소가 “폼페이”였음을 밝혀주는 비문(rei publicae Pompeianorum)이 발견되어 1600년의 세월동안 전설처럼 전해오던 고대 로마제국 시절, 로마에 버금가도록, 아니 어떤 면에서는 로마 보다도 더 화려하게 번영하였던 도시, 폼페이의 전설이 되살아나게 된 것이다. 


그 후 영국 역사 소설가 E. G 리턴(1803 ~ 1873)에 의해 쓰여진 “폼페이 최후의 날”이 세상에 알려지면서 더욱 세인의 관심의 대상으로 떠오르게 되었다.


많은 귀족들의 휴양지로 각광을 받았기에 도시는 부유하였고, 화려하였기에 사람들은 영화와 향락 속에 쾌락을 찾아 방황하며 저지르는 방탕이 극에 달하였을 때, 예고 없이 다시 폭발한 베스비우스는 단 18분만에 전 도시를 뜨거운 용암 밑에 파묻었다고 한다. 


그 18분 동안에도 사람들은 살아가며 인간이 할 수 있는 온갖 행동들을 하고 있었던 그 순간의 생생한 모습이 인간화석으로 출토되었기에 더욱 유명해진 폼페이가 되었는지도 모르겠다.


다음은 2006년 처음 방문한 후에 적었던 감상문의 일부다. “1959년에 만들어진 ‘폼페이 최후의 날’이라는 옛날 영화의 옛 기억을 되살리며 폼페이에 도착하여 유적을 보았다. 그 옛날의 건축 규모와 화려함! 그리고 잘 정비된 도시계획에 의해 건설되었다는 것이 놀랍기도 하지만 아직 다 발굴이 안되어서인지 생각보다는 기대에 못 미쳐 아쉬움이 남는다. 더욱 진한 아쉬움은 그 당시에 있던 그대로 재를 뒤집어쓴 채 소멸된 환락가가 보수 관계로 개방이 안되었던 것이다. 이를 보고 온 사람들로부터 많은 이야기를 들었기에 꽤나 보고 싶었는데 개방이 안되었으니 이걸 보러 다시 올 수도 없고…역시 속물근성은 항상 꿈틀대도록 나는 아직도 남자인 모양이지? 허허허”


당시 도굴꾼들은 주로 웅장한 건물이나 박물관에 진열할 보물을 찾는 사람들이었다. 그러나 이러한 도굴은 1860년 이탈리아의 고고학자 주세페 피오렐리가 발굴 감독이 되면서 종식되었다. 


피오렐리는 발굴하는 동안 발견되는 많은 구멍들을 이상히 여겨 구멍에 석회를 부어보자 신체의 모형이 나오는 것을 보고 주형을 뜨는 기법을 개발했단다.


또한 발굴 지역을 정비하고 꼼꼼히 기록하며, 폼페이를 9개 구역으로 구분하여 분류하고 거리의 각 문에 번호를 매겨서 각 집의 위치가 3개의 숫자로 편리하게 표시되도록 했다. 


2017년에 다시 찾은 폼페이는 그간의 복원작업으로 많이 변해 있었다. 


현재 옛 폼페이의 3/4이 발굴된 상태로 지금도 진행중이다. 그래서 “낮에는 수많은 유동인구로 바글거리지만 밤이 되면 인적이 하나도 없는 유령도시”로 되찾아지고 있는, 지구상의 유일한 도시, 폼페이가 되었나 보다. 


되찾아 지는 도시, 폼페이의 이모저모를 살펴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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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10-16
이탈리아 로마 -성 베드로 광장(Piazza San Pietro)


마태복음 16장 19절에 “내가 천국 열쇠를 네게 주리니 네가 땅에서 무엇이든지 매면 하늘에서도 매일 것이요 네가 땅에서 무엇이든지 풀면 하늘에서도 풀리리라!”는 예수님의 말씀이 나온다. 그래서일까? 하늘에서 보는 성 베드로 광장은 큰 열쇠구멍 모양으로 지어져 있다. 


하루에도 수만명의 관광객과 참배객들이 바티칸 박물관을 시발점으로 인산인해를 이루며 사람에 밀려 들어왔다가 그 화려함에 넋을 잃고, 사람에 떠밀려 나오다 보니 세계에서 제일 많은 보물과 예술품들을 소장한 이 곳을 건성으로 지나오더라도 성 베드로 성당을 나와 파사드 아래에 서게 될 때는 하도 위를 보아 목도 아프고, 다리도 피곤하여 주저 앉고 싶을 때가 된다. 


이 때 눈 앞에 펼쳐지는 넓은 광장! 탄성과 함께 걸어나갈 일이 걱정이 되도록 큰 성 베드로 광장이다. 대성당이 지어진 이후, 카를로 마데르노가 1607년~1612년까지 대성당의 파사드, 즉 성당의 앞면을 다 만들고 보니 미켈란젤로가 설계한 돔이 보이지 않게 만들어 버리는 실수를 범하였다.


그 후 잔 로렌초 베르니니(Giovanni Lorenzo Bernini, 1598 ~ 1680)가 성 베드로 광장을 설계하면서 지면을 경사지게 만듦으로써 뒤쪽의 돔이 보이게끔 되었다. 


그는 미켈란젤로가 설계한 성 베드로 대성당의 돔을 머리로 두고, 반원형의 회랑 두 개를 팔로 묘사함으로써, 두 팔을 벌려 사람들을 모아 들이는 모습을 표현하였던 것이다. 


광장 양편에 각각 네 줄로 늘어선 토스카나식 기둥 284개와 벽에서 돌출된 기둥 88개로 이루어진 “베르니니의 회랑”은 1656년에 공사를 시작하여 1667년에 완공되었다.

16m 높이의 대리석 기둥 위에 있는 140개의 성인상은 베르니니의 제자들이 조각한 것이다.


광장 중앙의 오벨리스크는 본래 기원전 13세기에 세워졌던 것이라는 설도 있고, 다른 설은 기원전 30년, 이집트 총독인 코르넬리우스 갈루스(Cornelius Gallus)가 아우구스투스의 명령에 따라 알렉산드리아에 세운 것이라는 설도 있는데 이를 기원 후 37년에 황제 칼리굴라가 그 당시 지금의 베드로광장에 있었던 네로 경기장의 중앙 스피나를 장식하기 위하여 옮겨왔단다. 


콘스탄티누스 대제가 기독교 공인 후 기념 교회를 세우면서 경기장은 모두 없앴으나 탑만은 계속 남겨 두었던 것을 교황 식스투스 5세의 명에 의해 1586년 4월 30일 공사를 시작하여 약 130여일 후인 9월 10일, 현재의 위치에 옮겨 세우게 되었다. 


탑의 높이만 해도 25.5미터로 로마에 있는 오벨리스크들 중 두 번째로 높으며, 무게는 약 300톤이나 되는 탑을 세워진 상태로 옮기기 위하여 900여명의 인부와 140여 마리의 말, 그리고 47대의 권선기가 동원되는 큰 역사로, 로마로 옮겨진 후 한번도 쓰러진 적이 없단다.


이렇게 옮겨 놓은 오벨리스크 탑 위에 십자가를 올려 놓음으로써 "박해 받던 그리스도교가 이교(타종교)를 물리치고 승리했다"는 것을 상징하며 원수까지도 사랑하라는 그리스도의 무한한 사랑의 정신을 이곳에 오는 모든 순례자들에게 일깨워 주기 위한 것이라고 해석하기도 한단다. 


완공된 후의 조감도를 보면 로마 시의 보르고 리오네 구역과 동쪽으로 접경을 이루며 조성된 성 베드로 광장(Piazza San Pietro)은 베드로가 받은 천국의 열쇠를 상징하듯이 열쇠 구멍의 형상으로 되어 있다. 


그 중앙에는 오벨리스크가 서 있어 해시계 역할을 하는 광장은 최대 30만 명까지 수용할 수 있는 큰 규모다. 


광장이 있는 남동쪽을 제외하고 성벽으로 둘러싸여 있는 바티칸 시국은 1929년 베니토 무솔리니와 피에트로 가스파리 추기경 간에 이루어진 “라테란 조약”에 따라 이탈리아 영토 안에 있는 “주권을 가진 독립국”으로 인정받았다.


이 나라의 통치권은 로마 가톨릭 교회의 수장으로 선출된 교황이 행사하며, 행정?입법?사법에 대한 절대적 권한을 가진다. 현재 전 세계의 177개 국가와 공식 외교관계를 맺고 나라마다 대사관을 두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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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10-06
이탈리아 로마 -성 베드로 대성당(Basilica di San Pietro in Vaticano)

 
 
마태복음 16장 18절에 예수님께서 이르시기를 “또 내가 네게 이르노니 너는 베드로라 내가 이 반석 위에 내 교회를 세우리니 음부의 권세가 이기지 못하리라” 


그래서일까? 초대 교회에서는 베드로를 제 1대 교황으로 추대한 후 뒤를 이은 지도자들을 교황이라고 부르며 지하교회를 이끌어 오던 중, 실베스테르 1세가 제33대 교황으로 즉위하기 직전인 313년 공표된 콘스탄티누스 황제의 밀라노 칙령 덕분에 더 이상 박해를 받지 않고 세상으로 나올 수가 있었다.


콘스탄티누스 황제는 로마 제국 초기에 라테라누스 가문의 저택을 교황에게 기증하여 교황이 거주하는 궁전으로 바꾸었고, 궁전 곁에는 대성당이 세워져 324년 교황 성 실베스테르 1세가 '하느님의 집(Domus Dei)'을 선포하며 봉헌했다. 


이 성당이 바로 ‘산 조반니 인 라테라노 대성당’으로 로마의 공식 주교좌(교황의 성좌)로 '모든 성당의 어머니이자 으뜸'이라는 지위를 아직까지 가지고 있다. 


그래서 세계 사람들이 성지순례와 관광으로 항상 성황을 이루고 있는 ‘성 베드로 대성당’보다도 카톨릭 내에서는 지위가 더 높은 성당이다.


그러나 세상으로 나온 초대교인들이 전도를 효율적으로 하기 위해서 필요한 것은 ‘하나님의 집’이라는 교황의 선포보다도 바티칸 언덕에 묻혀 있다고 전승되는 베드로가 더 절실히 필요하였는지도 모르겠다.


326 년 11월 18, 베드로의 시신이 버려졌다는 바티칸 언덕 위에 ‘베드로 대성당’을 짓기 시작하였다. 물론 대성당의 제대는 시신이 버려졌다는 바로 그 위에 설치되었고, 이 후 대부분의 교황이 선종하면 시신을 제대 아래에 안치해오고 있었다. 


그 후 1000여 년 동안의 여차여차한 역사의 굴곡을 거치면서 부서지면, 보수하며 지내 오던 중 르네상스 시대가 도래하였고, 또 교회의 권력과 부가 바티칸으로 모이게 되자 기독교 세계에서 가장 위대한 건축물을 만들고자 했던 교황 율리오 2세는 설계 공모를 시행했는데, 이 공모의 출품작들은 아직도 피렌체의 우피치 미술관에 남아 있다. 
최종적으로 브라만테의 설계안이 선정되어 1506년4월 18일에 공사를 시작했다


율리오 2세 교황이 1513년에 선종하고, 브라만테 역시 1514년에 사망하자 후계자로 줄리아노 다 상갈로와 프라 조콘도, 라파엘로 교체되었다. 


1520년 라파엘마저 서른일곱 살의 나이로 죽자 뒤를 이은 대(大)안토니오 다 상갈로와 발다사레 페루치, 안드레아 산소비노가 작업을 맡았으나 40여 년간 작업은 조금밖에 진척되지 못하자 1547년 1월 1일, 바오로 3세는 70대에 접어든 미켈란젤로에게 안토니오 다 상갈로의 수석 책임자 자리를 물려주었다. 이 자리는 성 베드로 대성당의 건설을 총 감독, 지휘하는 자리였다.


미켈란젤로는 앞선 건축가들의 발상들을 바탕으로, 전체적인 조화를 위하여 부분적인 설계를 변경하며 대성당의 바닥에서 바깥에 있는 십자가의 끝까지 136.57m에 이르는 세계에서 가장 높은 돔을 만들었다.


돔의 안쪽 지름은 41.47m로 고대 로마의 판테온의 돔(43.3m)이나, 초기 르네상스의 피렌체 대성당의 돔(벽체 42m)보다 조금 작지만 서기 537년 완공된 콘스탄티노폴리스의 하기아 소피아 성당의 돔보다는 지름이 약 9.1m 정도 더 크다.


작업은 착착 잘 진행이 되었으나 워낙 큰 공사이다 보니 미켈란젤로 이 후에도 르네상스 시대의 걸출한 인재들 여러 사람의 손을 거쳐가며 120년간의 공사 기간을 거쳐 1626년 11월 18일 교황 우르바누스 8세 때에 봉헌되었다.


성 실베스테르 1세가 옛 대성당의 정초식을 거행한 326 년 11월 18일로부터 정확히 1300년 뒤였다. 그럼 그 동안 사용해 오던 달력이 율리우스력에서부터 그레고리력으로 바뀌면서 사라진 10일은 어찌 계산하여야 할까? 


그 옛날에, 최대 6만 명 이상의 사람을 수용할 수 있는 대성당 내부에는 500개에 달하는 기둥과 400개가 넘는 조각상이 있고, 따로 분리된 44개의 제대와 10개의 돔이 있으며, 1300개에 달하는 모자이크 그림들로 벽면을 장식하였다. 


이런 엄청난 규모와 헤아릴 수도 없는 예술작품들로 가득 찬 성당이지만 여기서는 대표적인 사진 몇 장으로 넘어 가기로 하자.


전승으로 베드로의 무덤이 있다는 성당 가운데에는 거대한 발다키노(baldacchino : 옥좌(玉座)•제단•묘비 등의 장식적 덮개. 일명 천개라고도 한다)가 있어 성당의 중심역할을 한다. 


제단 아래에는 은으로 된 작은 상자가 있는데 성 베드로의 유골함이라고 한다. (확인을 하는 방법이 없다. 스페인의 세비야 성당에 가면 예수님 처형 당시 머리에 쓰고 있던 가시관의 가시 하나가 성물로 보관 되어있기도 하다.)

(혹자는 ‘성 베드로 대성전’이 맞는 명칭이라고 하지만 일반적으로 사용되는 ‘성 베드로 대성당’을 사용하였다.)

 

 

 

 

 

  

 

 
 

 

  

 


열 받은 미켈란젤로가 밤에 “피렌체 출신의 미켈란젤로 부오나로티가 만듦” 이라고 성모의 가슴에 두른 띠에 새기고 나왔다고 한다. 아침에 밖으로 나오니 찬란한 아침 해가 온 세상을 비추는 것을 보며 “이 세상을 창조하신 하나님도 세상 어디에 자신의 흔적을 남기지 않았는데….” 크게 반성하며 그 후 어디에도 이름을 써넣지 않았단다. 산타 페트로넬라 성당에 있다가 18세기에 성 베드로 대성당 입구 오른쪽 경당으로 옮겨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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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09-26
이탈리아 시스티나 성당의 그림들(2) 최후의 심판

교황 율리오 2세가 시스티나 성당의 천장화를 주문하기 전인 1505년, 자신의 사후를 위하여 미켈란젤로에게 영묘제작을 부탁하였기에 미켈란젤로는 6개월 동안이나 필요한 대리석을 찾아 이태리를 돌아다니며 준비하였지만 어찌된 영문인지 율리오 2세는 대금을 제 때에 지불하지 않은 채 차일피일 미루기에 피렌체로 돌아가 다른 일을 하던 중 율리오 2세의 강권에 의해 1508년, 다시 로마로 와서 시스티나 성당의 천장화에 4년간 매달리게 되었던 것이다.

1513년 교황 율리오 2세가 선종하자 1516년까지 그의 영묘를 만들며 유명한 “뿔 달린 모세상”을 조각한 후 로마를 떠나 20년간 피렌체에서 조각가로 생활하고 있을 때였다.

교황 클레멘트 7세(1523~1534)는 ‘최후의 심판’을 주제로 한번 더 시스티나 성당의 벽화를 그려 달라는 제의를 하였다. 이는 신성로마제국 카를 5세의 로마 침략(1527)과 유린에 대한 분노에서 비롯된 것으로, 사후에 있을 두려운 심판의 날을 사람들에게 각인시키며 종교개혁의 열풍으로 가톨릭으로부터 멀어져 가는 민심을 사로잡기 위해 택한 주제였단다.

교황 율리오 2세의 영묘를 짓는 일에서부터 시스티나 성당의 천장화를 그리는 동안 힘들었던 경험이 있던 미켈란젤로는 차일피일 미루던 중 1536년, 클레멘트 7세에 이어 즉위한 교황 바오로 3세(Paulus III, 1468~1549)로부터 “그림이 완성될 때까지 일반에게 보여주지 않는다”는 조건을 수락 받은 후, 5년의 작업 끝에1541년 10월 31일, 14미터에 달하는 거대한 벽면에 온갖 인간의 형상을 망라한 391명의 군상들이 드러났다.

천장화보다도 더 오랜 세월에 걸쳐 미켈란젤로가 완성시킨 대작, “최후의 심판”으로써 비로서 시스티나 성당은 “성경의 시작과 끝”을 회화화한 거대한 예술작품으로 완성된 것이다. 미켈란젤로의 나이 66살 때였다.

막상 작품이 공개되자 이 놀라운 표현에 감탄하는 사람들만큼, 경악을 금치 못하는 사람들도 많았다. 신성해야 할 교회 제단화가 온통 벗은 몸으로 가득 차 있었기 때문이었다.

나체가 불경하다고 시민들과 교회의 권력자들이 아우성을 쳤으나 미켈란젤로는 꿋꿋하게 버텼다. 아마도 세상 사는 동안에는 감추고 숨길 수가 있어도, 최후의 심판 앞에서는 다 밝혀진다는 것을 표현한 것에 대한 자부심이 아니었을까?

교황 바오로 3세 역시 아무 조치를 취하지 않았다. 그러나 논란은 계속되어 23년 후인 1563년, 트리엔트 공의회에서 “가능한 한 수치스러운 부분은 가리자”는 쪽으로 결정을 하였으나 이미 89세가 된 미켈란젤로가 1564년 사망하였기에 교황 비오 4세(Pius Ⅳ, 1499~1565)는 나체의 부끄러운 부분을 모두 덧칠로 가리라는 명령을 미켈란젤로의 제자인 다니엘레 다 볼테라(Daniele da Volterra, 1509~1566)에게 하였다.

이 후, 그에게는 '브라게토네'(Braghettone : 기저귀를 채우는 사람이라는 뜻)라는 별명이 붙었단다.

다행히도 미켈란젤로의 또 다른 제자 마르첼로 베누스티(Marcello Venusti, 1515~1579)가 덧칠하기 전의 작품을 모사해 놓아서 후대에 원작의 모습을 이해할 수 있게 해 주었다. 이후에도 검열은 수시로 진행되어 옷을 입히는 수정 작업은 18세기 말까지 지속되었단다

그림에 전해오는 이야기 하나! 그 당시 무르익은 문예부흥 사조로 되살아난 단테의 ”신곡”에 나오는 그리스 신화의 지옥왕 “미노스”가 “최후의 심판”에 등장하게 된다. 그런데 그 얼굴이 교황의 의전관 비아지오 다 체세나(Biagio da Cesena)의 얼굴과 닮았다.

“최후의 심판”이 거의 완성되어 갈 때, 교황 바오로3세가 의전관 체세나를 대동하고 미켈란젤로의 작업장을 찾았단다. 그 때 체세나는 교황에게 “이 그림들의 나체가 심히 불경하여 성당보다는 공중목욕탕에나 어울릴 것 같다”고 말했단다.

이에 화가 난 미켈란젤로는 그를 지옥 왕 미노스의 얼굴로 그려 넣었던 것이다.

더 재미있는 것은 이것을 알게 된 체세나가 교황에게 그 얼굴을 바꾸도록 명령해 달라고 부탁하자, 교황이 "자네를 연옥(煉獄)에 넣었다면 내가 부탁해서 구원해 내겠지만 이미 지옥에 있는 이상 어떻게 옮길 수 있겠는가?"라고 대답했다고 한다. (천주교의 교리와 연옥이 궁금하신 분은 인터넷에 들려 보세요.)

교황 바오로 3세는 미켈란젤로가 메디치가에 있을 때부터, 즉 자신이 교황이 되기 전부터 미켈란젤로를 상당히 좋아하며, 그를 언제나 힘껏 밀어주었다. 그래서인지 그의 그림에 기저귀를 채운 것도 다음 교황인 비오 4세 때의 일이었다.

또 하나의 이야기, 예수 바로 아래 오른쪽에 있는 사람은 산 채로 살가죽을 벗겨내는 형벌로 순교했다는 바르톨로메오(Bartholomaeus) 사도다. 오른손에는 피부를 벗길 때 사용한 칼을 들고 있고 왼손에는 벗겨진 살가죽을 들고 있다.

그런데 고통으로 일그러진 이 살가죽의 얼굴은 미켈란젤로 자신의 얼굴이란다.

아마도 천장의 천지창조 이야기와 제단 뒤의 최후의 심판을 그리는 동안의 고통이 그만큼 컸다는 것을 나타낸 것이 아닐까?

창조를 주제로 한 천장화와 달리 “최후의 심판”은 매우 음울하고 비극적인 분위기가 지배적이다. 이때는 “천지창조”를 그리던 때와 달리 종교개혁으로 전 유럽이 몸살을 앓고 있을 때일 뿐만 아니라 종말이라는 주제와 함께 한 화면에 3개의 세계를 표현하려니 구름으로 나뉘어진 3개의 세계가 하늘에 떠 있는 형상이 되었다.

그러나 복원 후의 그림은 전체가 너무나도 밝은 색감으로 비춰지어 많은 논란이 있었지만 이미 엎어진 물이 된 후이니 어찌하리요.

▲복원 전과 복원 후. 너무 밝아져서 한동안 논란이 있었다.


▲지옥왕 미노스 부분. 체세나의 얼굴 모습이다.


▲바르톨로메오 사도의 벗겨진 살가죽에 미켈란젤로 자신의 얼굴을 그려 넣었다.

▲최후의 심판 덧칠 후(위)와 전(아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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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09-19
이탈리아 시스티나 성당의 그림들(1) ? 아담의 창조

 1477년, 식스투스 4세에 의해 오래된 마조레 예배당(Cappella Maggiore) 복원을 시작하여 1483년 8월 15일 성모 승천 대축일 기념 미사 때 시스티나 성당으로 다시 태어난 이 성당은 푸른빛 천장에 금빛 별이 반짝이는 성당으로, 교황을 선출하는 종교적 의식인 콘클라베(추기경단이 선종한 교황의 자리를 계승할 인물을 선출하기 위한 비밀 선거)를 여는 장소로 이용되며 위급 시 피신처로 사용할 목적으로 만들었기에 밖에서 보면 요새 형태의 모습을 띤다.

그러나 그 안에는 후에 미켈란젤로의 “천지창조 이야기”를 그린 천장화와 제단 뒷벽에 그린 “최후의 심판”을 위시하여 라파엘, 산드로 보티첼리 등 르네상스 시대의 예술가들이 그린 엄청난 프레스코 벽화가 천장 가득히, 그리고 사방 벽 구석구석에 빼곡히 있지만 아예 사진을 찍지 못하게 한다. 그래서 박물관 야외에 색 바랜 사진을 걸어 놓고 가이드들이 야외에서 설명을 하게 한다. 사진을 찍는다고 해서 그림들이 훼손되는 것도 아닐 터인데….

아마도 사람들을 빨리 지나가게 하려는 목적과 더불어 바티칸에서만 이 곳의 사진을 찍어서 팔려는 목적 때문이 아닐까? 했는데… 1980년부터 시작되어 1994년 4월에 완결된 복원 공사에 일본 NHK TV가 스폰서를 하며 복원기간과 이후 3년간의 독점 방영권과 촬영권을 소유하기로 했단다. 복원 후 놀라울 만큼 밝아진 화면 결과를 놓고 많은 찬반의 논란이 있었지만 이미 지나간 일이 되어 한동안의 논란으로 그치고 말았다.

내가 이 그림들을 처음 대한 것은 1965년에 발간된 “미켈란젤로 화집”에서였다.

미국에서 천연색으로 인쇄된 화보였지만 그림들은 500년 동안 찌든 먼지와 그을음으로 인해 우중충한, 그러나 놀라울 정도로 눈을 끌어당기는 “천지 창조의 성경 이야기”였다.

2006년, 처음으로 올려다본 밝아진 그림 아래서의 경이로움은 2017년 다시 볼 때에도 변함이 없었기에 지금도 이 글을 어떻게 써야 할지를 놓고 멍! 해지곤 한다.

1508년, 교황 율리오 2세의 주문으로 1512년까지 4년에 걸쳐 프레스코 기법으로 그린 천장화는 르네상스 시대의 대표적인 작품으로 평가 받을 뿐만 아니라 성서적인 측면에서 300여명의 인물들이 만들어 낸 인류의 역사가 수많은 그림들로 엮여 있기에 다 설명을 한다는 것 자체가 외람된 발상이겠기에 오늘은 최초의 인간인 “아담의 탄생”과 다음 주에는 모든 인간들이 다 한번씩은 거쳐야 하는 “최후의 심판”을 미켈란젤로의 표현을 통하여 들여다보기로 하자.

“프레스코화”란 말은 보통 모든 종류의 벽면과 천장에 그린 그림을 일컫지만, 엄밀히 말하면 천장이나 벽면에 회 반죽을 바른 후, 회 반죽이 마르기 전에 물에 녹인 안료로 그림을 그리는 것을 말하는 것이니, 캔버스나 목판에 그리듯, 덧칠하며 다시 그릴 수 있는 그림 하고는 계획에서 진행까지 그 난이도가 비교가 안 되는 어려운 작업인 것이다.

더군다나 천장의 크기가 대충 길이가 40미터 너비가15미터로 펼쳐져 있다. 캔버스에 그림을 그릴 때에도 구도에 골머리를 싸매는데, 더군다나 이 캔버스는 그리기 좋게 이젤에 펼쳐져 있는 것이 아니라 20미터 높이 천장에, 그것도 휘어진 채 건축상 어쩔 수 없이 존재하는 수많은 궁륭을 그림에 효과적으로 편입시키면서 바닥에서 천장을 보았을 때의 효과마저 고려해야 하는, 미켈란젤로는 어떠하였을까?

공사장처럼 비계를 쌓는 거야 조수들이 한다고 해도 화가는 그 위에서 고개를 젖힌 채 그림을 그려야 한다. 그 일을 장장 4년 동안 하고 미켈란젤로는 “등뼈가 배를 뚫고 나올 것만 같았다”고 회고했단다. 게다가 “브라만테 일당이 자신을 죽이기 위해 이런 일을 자신에게 맡겼다”는 푸념도 했다고 한다.

사실 미켈란젤로를 시기하던 사람들이 “조각가인 그가 이 작업을 맡으면서 실패하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그를 추천하였다”는 이야기들도 전해지고 있다.

미켈란젤로 자신도 교황 율리오 2세에게 자신은 조각가이기에 화가인 라파엘에게 이 일을 맡기라고 간청을 하였었으나 받아 드려지지가 않았다.

그 당시라고 왜 시기와 질투와 모함이 없었겠는가!

그 많은 그림 중에서도 가장 시선을 오래 잡는 것은 천장 중앙부분에 있는 “아담의 창조”다. 두 손의 만남으로 아담의 창조를 표현한 미켈란젤로의 발상은 전율이 느껴지도록 감동적이다. “어떻게 저런 발상을 할 수가 있었을까?”

천재의 발상을 범인이 추측할 수 없는 것이야 당연하지만 아무래도 그는 인간의 몸으로 그렸지만 하나님으로부터 영감을 받았을 것만 같다.

오래 전에 나온 영화 ET에서 ET와 주인공이 손가락을 맞대며 빛이 났던 장면 역시 분명 이 그림에서 그 소재를 얻었을 것이다.

이 그림의 핵심, 아니 전 천장화의 핵심이라고도 꼽히는 아담의 왼손은 사실 미켈란젤로의 작품이 아니란다. 천장에 금이 가서 왼손 부분이 떨어져 나갔기에 16세기에 복원작업을 맡은 화가, 도메니코 카르네발레가 그 부분을 채워 넣었다고 한다.

그 외에는 뭐가 없을까? 이 때에는 유대인들도 할례를 받지 않았을 때니까 “다윗상의 꼬추” 같이 문제가 될 건 없는데…. 화룡점정(畵龍點睛)처럼 아담의 미끈한 복근에 그려진 배꼽이 결국 사족(蛇足)이 되고 만 것 같은 느낌이다.

아니면 요즈음의 신학자들처럼 그 때 벌써 하나님 어머니를 찾았었나?

하나 아무리 보아도 감탄이 나오는 그림이다.

사▲아담의 창조. 화룡점정(畵龍點睛)처럼 아담의 미끈한 복근에 그려진 배꼽이 결국 사족(蛇足)이 되고 만 것일까? 천장을 9개의 틀로 나누었고, 다시 34개의 면으로 나눈 중에 입구에서부터 6번째 틀에 그려진 그림이다. (자료사진)

 

▲복원 전, 후의 손가락

 

▲천장 전체의 모습 (자료 사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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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09-18
이탈리아 로마 - 바티칸 박물관(Musei Vaticani)

 

 

세계에서 제일 작은 나라, 0.44km²의 면적에 약 900명 정도의 인구를 지닌, 면적과 인구로 보아 지구 상에서 제일 작은 독립 국가이지만 교황이 통치하는 신권 국가로, 전 세계 가톨릭교회의 총본부이기에 바티칸시국은 어찌 보면 세계에서 제일 큰 나라이기도 하다.


서기 64년 로마에서 일어난 대 화재 이후 로마는 많은 그리스도인이 순교하는 장소가 되었으며, 성 베드로도 이 순교자 중 한 사람이었다. 전승에 따르면 성 베드로는 원형경기장에서 거꾸로 십자가형에 처해졌다고 한다.


그리고는 지금 바티칸이 자리잡은 이곳 바티칸 언덕(Mons Vaticanus)에 그 시신을 버렸다고 한다. 그 옛날의 노예와 가난한 시민들의 공동묘지였던 것이다.


329년, 콘스탄티누스 대제는 기독교를 공인한 이후, 어느 정도 모양을 갖춘 성당을 이 곳, 성 베드로의 무덤 자리 위에 세웠다.


최초의 성당인 성 베드로 성당 근처에 교황을 위한 라테란 궁이 지어지면서 이 지역은 점차 천주교의 본산이 되며 바티칸으로 알려지기 시작했다.


846년 아랍인들의 침략이 있었을 때 외벽을 쌓은 것이 현재의 바티칸 시국의 경계를 나타내는 벽이 되었다. 


이후 여차 여차하여 생긴 아비뇽 유수 시대(1305~1377) 기간 동안 로마는 철저히 버려지게 되었지만 유럽의 정치판도가 바뀌면서 교인들이 바티칸의 베드로 무덤으로 성지 순례를 오기 시작하자, 성 베드로 무덤의 필요가 필연이 되어 1453년 니콜라오 5세 교황에 의하여 성전 재건축 계획이 세워졌으나 때마침 오스만 투르크인들이 콘스탄티노플을 침공하여 계획은 흐지부지되었다가 1477년, 식스투스 4세에 의해 오래된 마조레 예배당(Cappella Maggiore)을 복원하며 식스투스 4세를 기념하여 시스티나 성당이라는 이름이 붙여졌다. 


1483년 8월 15일 성모 승천 대축일 기념 미사 때 식스토 4세에 의해 축성하며 서서히 교황권이 로마의 바티칸으로 재 집결되기 시작한 것이다. 


교황권이 확립되면서 세계 각처에서 보내오는 헌금과 성물들로 재력이 생기자 더 큰 성당을 지을 계획이 싹터 1504년 교황 율리우스 2세는 기존의 성당을 헐고 크고 화려한 성 베드로 대성당을 짓기 시작하였다. 


대 성당 이야기는 다음으로 미루고, 이 때부터 바티칸은 세계 기독교의 총 본산이 되어 막대한 헌금과 진귀한 성물들이 모여 세계 3대 박물관 중의 하나로 성장하기 시작한 것이다. 


최초의 전시물은 1506년 1월 14일, 로마의 산타 마리아 마조레 대성전 인근의 포도밭에서 그리스 신화에서 고대 트로이 사람들에게 그리스군의 '선물'인 속이 빈 거대한 목마를 도시 안에 들이지 말라고 경고했던 성직자 라오콘과 두 아들이 포세이돈의 저주를 받아 바다 뱀으로부터 공격 당하는 모습을 묘사한 “라오콘 군상”이었다. 


교황 율리우스 2세는 발견물을 조사하고자 바티칸에서 일하던 줄리아노 다 상갈로와 미켈란젤로 부오나로티를 파견하였다. 그들의 추천으로 교황은 즉시 포도밭 주인에게서 그 조각상을 구매한 뒤 한달 후에 바티칸에서 대중이 볼 수 있게 진열하면서 시작되었던 것이다.


역대 교황이 수집한 귀중하고 값비싼 소장품들은 보르자 아파트 안에 보관되었으나 259대 교황 비오 11세(1922년 2월 6일-1939년 2월 10일)가 전시하기에 적당한 건물의 건설을 명령한 후 개축되며 오늘에 이르렀으니, 미술관의 건물자체는 그리 오래 안되었다 해도 그 안에 전시된 조각과 그림들, 그리고 다른 성물들은 세계에서 오직 이 곳에서만 볼 수 있는 진귀한 그림과 조각과 성물들이다. 


바티칸 성벽에 길게 늘어선 입장객들을 따라 들어 가면 여러 전시실을 거쳐 시스티나 성당에 들어가 미켈란젤로에 넋을 잃게 된 후 성 베드로 대 성당을 거쳐 성 베드로 광장으로 나오는 일방통행의 길이다.


2015년부터 한 해에 600만명 이상 방문객을 받지 않기에 한 곳에 오래 서 있을 수도, 뒤로 돌아갈 수도 없이 그저 사람에 밀려가며 눈에, 카메라에 담아야 한다. 그러나 시스티나 성당에서는 사진을 일체 못 찍게 한다.


그 많은 물건들 중에 몇 가지만 소개하기로 하자. 나의 역량으로는 다 설명할 수도 없으려니와 지면도, 시간도, 독자들의 흥미와 인내도 부족할 테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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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09-04
이탈리아 로마 -카타콤베(Catacombe)

 

 

기원 전, 후로 세계를 지배하던 로마에도 가난했던 사람들은 있었고, 그들 또한 죽었지만, 망자를 위한 무덤을 땅 위에 만들 수가 없었다. 그래서 돈이 가장 적게 드는 방법을 생각해 낸 것이 이 지역 곳곳에 흩어져 있던 자연적인 동굴을 이용해서 무덤을 만드는 것이었다.


“카타콤” 혹은 “카타콤베”라고도 하는 말은 옛 로마인들이 사용했던 라틴어와 그리스어가 섞인 '카타쿰바스'(구덩이 또는 동굴의 옆이라는 뜻)에서 유래되었단다. 그러니 카타콤베는 지하공동묘지인 것이다.


네로 시대의 박해를 전후하여 초기의 선교활동은 로마 근교에 살던 가난하고 신분이 낮은 계층 사람들에게 많이 행해졌으며, 그들이 살던 지역은 주로 테베레강 어귀와 아피아 가도 주변이었다. 


갈수록 심해지는 모진 박해 속에서 초기 교회 공동체 신자들이 안전하게 모여 구원자 이신 하나님께 예배 드릴 수 있는 곳은 남들의 눈길이 미치지 않는 이곳, 지하 무덤 밖엔 없었다.


그 중에서도 아피아 가도 주변에 많이 있던 지하 무덤 안이 가장 안전한 장소가 되었으며, 시간이 흐름에 따라 신자들의 무덤도 그 안에 마련되면서 지하 무덤, 즉 카타콤베의 면적이 점점 더 늘어나기 시작하였던 것이다. 


로마의 황제들 중에서도 신자들에게 가장 심한 박해를 가했던 황제는 카라칼라와 발레리아누스, 디오클레티아누스 등이었다. 그 중에서 발레리아누스는 기독교인들의 지하 공동 묘지를 색출하여, 묘지 출입 금지령을 내리기도 했으며, 디오클레티아누스(284-305)의 박해 시기는 로마의 역사가들이 '피의 시대'라고 부를 정도로 많은 신자들이 순교를 당한 시기였다. 


그 후, 콘스탄티누스 대제의 밀라노 칙령이 313년에 선포되면서, 장구한 세월 동안 박해 받던 교회는 이제 땅 밑에서 땅 위로 올라오게 되었던 것이다.


교황 성 다마수스(366-384)가 아피아 가도 주변에 있던 성 세바스티아누스의 무덤을 포함해서 그 일대의 지하 공동묘지를 재정비하여 “성 세바스티아누스의 지하 공동묘지”라고 명명하면서 처음으로 '카타쿰바스'라는 말을 사용하였다. 


이 후 카타콤베에서는 사망자, 특히 순교자를 기념하는 미사가 집행되며 순교자에 대한 숭배와 존경심이 높아짐에 따라 그 묘에다 기념비적 묘지명을 붙이거나 지하도를 넓히는 등 카타콤베 개수작업이 이루어졌다. 


그러다 보니 이곳은 또한 로마에 침입한 이교도들의 중요한 약탈 대상이 되었다고도 한다. 이를 증명이나 하듯 어느 지하 무덤에 가 보더라도 관 뚜껑이 하나도 남아 있지 않고 다 파괴되어 있는 것을 볼 수 있단다.


이렇듯 이민족의 침입이 잦아지자 8세기부터는 그때까지 카타콤베에 남아 있던 성인들과 순교자들의 유골을 로마의 성 안쪽으로 이전하기 시작했다. 순교자들의 유골이 성 안의 기념 성당으로 모두 이전되자 순교자들의 발길은 카타콤베에서 성당으로 바뀌어지면서 카타콤베는 역사 속에서 차츰 잊혀져 가기 시작했다. 


십자군전쟁 이후, 로마가 성지순례자들의 순례지로 부각되자 16세기에 와서 카타콤베 발굴과 연구가 시작되어, 아피아 가도에서만 카타콤베가 60여 곳 발견되었다. 


아마도 사도 바울이 예루살렘에서 유대인에게 붙잡혀 ‘아피아 가도(Via Appia Antica)’를 따라 로마로 압송됐다는 이유와 이 지역의 지질이 적합하였던 점이 일치하였었나 보다.


가장 오래된 카타콤베는 1세기까지 거슬러 올라가는데 그 중 살레시오 수도회에서 관리하는 ‘칼리스토 카타콤베(Catacombe di San Callisto)가 2세기에서 4세기까지 재위한 몇몇 교황의 유해가 묻혀 있기 때문에 교황 납골당(Capella dei Papi)이라고도 부르며 오늘날까지 수많은 순례자의 성지로 자리 잡고 있다.


2006년 5월 11일 오후 석양 무렵에 찾아간 칼리스토 카타콤베에는 순례객도, 관광객도 별로 없었다. 작은 입구를 통하여 어두운 지하로 내려가니 지하의 공기가 서늘하였지만 묘지라는 선입관을 자극할 만한 냄새가 나는 것은 아니었다.


구비구비 돌아가며 벽면 양 편으로 파인 묘실들을 보며 옛날에 믿음을 찾아 지하로 피신하도록 순결한 믿음의 자취를 보는 감회가 전율로 다가올 때 즈음에 이젠 나가야 한단다. 아마도 우리가 너무 늦게 도착한 모양이었다. 우리가 오늘의 마지막 순례 객이었던 것이다.


그래 진정한 종교란, 진정한 믿음이란, 어려움 속에, 거센 핍박 속에 하나님을 중심으로 신실한 믿음으로 뭉치며 이루어 지다가, 그 세력이, 교세가 커져서 권력의 비호를 받고, 아니 스스로가 권력이 되어 충분한 재정이 스스로를 위하여 쓰여지며 사치하기 시작 할 때, 화려한 치장으로 하늘 높이 지은 성전과 그 안에서 벌어지는 인간적인 권력 투쟁과 교만으로 하나님이 슬며시 사라지는, 그런 순환이 지난 4천년동안의 역사 속에 남긴 우리 인간들의 믿음인지도 모르겠다.


그래도 오늘날까지 믿음이 이어질 수 있었던 것은 그 옛날 지하 공동묘지안에서 울리던 간절한 기도와 간구의 메아리가 아직도 남아 있기 때문은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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