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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병선의 大佳里(대가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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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07-17
이탈리아 로마 - 베네치아 광장(Piazza of Venezia)과 조국의 제단

 

 

 

캄피톨리오 언덕에서 원근법을 꺼꾸로 느끼도록 설계된, 그래서 위에서 보면 더 멀게 보이는 계단을 내려오면 베네치아 광장(Piazza of Venezia)이 펼쳐진다. 


지금은 이탈리아의 한 도시가 되었지만, 이탈리아 반도와 발칸반도 사이에 있는 아드리아 해의 여러 섬들로 구성된 ‘물의 도시’ 베네치아 공화국이 1861년 이탈리아 통일 전까지 로마에 설치했던 대표부 건물인 베네치아 궁(Palazzo di Venezia)이 있어서 붙여진 지명이다.

 

 

 

 


로마시대에는 거대한 폼페이우스 회당이 있었지만 지금은 흔적조차 없고, 넓은 광장을 돌아가는 큰 길 남쪽을 하얗게 장식하는 거대한 건물이 시선을 압도한다. 1911년 통일 50주년에 맞춰서 준공된 에마뉴엘 2세 기념관이다. 


로마제국의 중심이었던 이탈리아는 476년 서로마제국이 멸망하면서 분열되기 시작하여 1860년 초까지 여러 도시국가로 발전하기도 하였지만 또한 유럽 대륙의 여러 열강들에 의해 점령당한 상태이기도 하였고, 남은 지역은 로마 카톨릭 교회가 통치했었다. 

 

 

 

 


나라가 사분오열 되고 보니 난세에 영웅이 난다고, 이탈리아에도 많은 영웅들이 출현하였다. 1400여 년간 분열되었던 이탈리아가 다시 하나로 통일이 될 수 있었던 것은 19세기의 혁명가 가리발디와 오페라 작곡가 베르디 등 통일운동을 주도하는 영웅들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베르디의 오페라 나부코 중 히브리 노예들의 합창(바빌론에 포로로 끌려간 히브리 노예들이 조국을 그리워하며 부르는 합창)은 오스트리아의 지배하에 있던 이탈리아인들에게는 제2의 국가로 애창되던 노래였단다. 


이탈리아의 국민적 영웅 가리발디 장군(Giuseppe Garibaldi: 1807~ 1882). 그는 왕족 출신도 귀족 출신도 아닌 한 선원의 아들이었으나 이탈리아의 통일이라는 꿈을 이루기 위해 천백여명의 붉은 셔츠부대라는 의용군을 조직하고 통일운동에 나섰다. 


시칠리아와 나폴리 등 남부를 정복하는 데 성공한 가리발디는 자신이 왕이 될 수도 있었으나, 에마뉴엘 2세가 베네치아를 포함한 북부를 통일한 후인 1861년 두 영웅이 협상하여 비토리오 에마뉴엘 2세(Vittorio Emanuele II: 1820~1878)를 통일왕국의 첫 황제로 만들었다. 

 

 

 


에마뉴엘 2세 기념관은 그의 사후인 1885년에 건축가 쥬세페 사코니(Giuseppe Sacconi)의 설계로 착공하여 25년만인 에마뉴엘 3세 때인 1911년 통일 50주년에 맞춰서 준공되었으나 기념관을 장식한 조각품들은 1935년에야 완성되었으니 2500년 고도에 있는 최신 건물인 셈이다. 


건물 앞 중앙에는 거대한 에마뉴엘2세의 기마상, 그리고 왼쪽은 노동의 승리(Triumph of Work)를, 오른쪽은 애국심의 승리(Triumph of Patriotism)를 상징하는 두 빅토리아 여신이 마차를 타고 달리는 동상이 건물 지붕 양 옆 위를 장식하는 하얀 대리석 빌딩이다. 

 

 

 

 


기념관은 포로 로마노 쪽의 가파른 비탈지대를 다듬어서 높은 계단 위에 세워 졌기에 한층 더 높은 성벽처럼 보여, 외국인들에게는 로마를 확실히 알게 하는 광장이자 기념관이지만, 정작 로마인들은 로마의 다른 역사적 유적들과 어울리지 않게 타자기 자판과 비슷하다느니, 웨딩 케이크 같다는 등의 비난을 많이 한단다. 


 에마뉴엘 2세 기마상 아래의 대리석 벽면에는 이탈리아의 유명한 조각가 안젤로 자넬리(Angelo Zanelli)가 로마의 여신(Goddess Roma)을 조각하였으며, 로마의 여신상 앞에 병사 2명이 지키고 있는데, 이것은 기념관 지하에 1, 2차 대전 중에 전사한 무명용사 무덤이 있기 때문이다. 이곳에는 일 년 내내 꺼지지 않는 불을 밝히고 있다. 그래서 이 건물은 일명 “조국의 제단” 이라고도 불린다.

 

 

 

 


이곳에서 서북쪽으로 광장을 가로 질러 보이는 베네치아 궁은 1455년 베네치아의 산마르코 성당의 피에트로 바르보(Pietro Barbo) 추기경이 바티칸의 베드로 성당의 주임사제로 부임하게 되면서 거주하던 저택이었으나 그가 1464년 교황 바오로 2세(Pope Paul Ⅱ)가 되자 더욱 크게 확장해서 ‘베네치아 궁’이라고 불렀다. 


그 후 100년이 지난 1564년 베네치아 궁의 일부를 베네치아 공화국이 대사관으로 사용하게 되면서 궁전 앞을 ‘베네치아 거리’라고 불렀는데, 이탈리아의 독재자 무솔리니(1883~1945)가 정권을 잡은 20년간 살았던 공관이기도 하다. 

 

 

 

 


대장장이의 장남으로 태어난 그는 자신의 비천함을 내세워 '인민의 아들'로 자처하면서 뛰어난 대중연설로 군중을 휘어잡아 최연소 이탈리아 총리에 올랐으며, 3층 발코니에서 히틀러와 연합하여 2차 세계대전의 참전을 선언하였기에 베네치아 궁이 더욱 유명해졌다.


현재는 르네상스시대의 유물을 전시하는 국립 베네치아박물관으로 사용되고 있는 베네치아궁 앞 베네치아거리는 요즈음엔 온갖 자동차는 물론 마차, 오토바이가 관광객들과 뒤섞여 돌아다니는 번잡한 로터리 정도가 되었으며 “베네치아 광장”의 랜드마크는 “베네치아 궁”이 아니라 “에마뉴엘 2세 기념관”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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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07-10
이탈리아 로마 -캄피돌리오 광장(Piazza del Campidoglio)

 

 

콜로세움에서 포로 로마노를 거쳐 올라가는 언덕을 캄피돌리오(Campidoglio) 언덕이라고 한다. 이 언덕을 다 올라가서 옆 건물과 사이에 난 짧은 길을 도니 확 트이는 광장이 나타나며 청동상이 한 가운데 서서 투명한 정오의 햇살을 받고 서 있었다.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Marcus Aurelius Antoninus, 121~180년) 황제의 청동 기마상이다. 기마상을 받치고 있는 광장의 바닥이 범상치가 않다. 약간의 무늬만 있는 평범한 돌바닥이지만 이 바닥에 명장 미켈란젤로(Michelangelo di Lodovico Buonarroti Simoni, 1475~1564년)의 재치가 숨어있다는 것이다.


광장에 서서 보는 광장의 디자인은 그저 여러 개의 곡선이 교차하며 어떤 문양을 만드는 것 같은데…. 진수를 느끼자면 하늘에서 보아야 한단다. 요즈음은 세월이 하도 좋아 구글에 ‘캄피톨리오 광장’을 치기만 하면 바로 그 곳으로 우리를 데려가 줄 뿐만 아니라 하늘에서 보는 모습도 보여준다.

 

 

 

 

 

 

1538-1539에 만들어진 하늘에서 보기 좋은 이 바닥 무늬는 마치 연꽃을 형상화 한 것 같은 느낌을 주며, 모든 선들이 실은 하나의 선으로 이어져 있단다. 비행기도 없었던 그 당시, 미켈란젤로는 왜 하늘에서 봤을 때의 모습을 생각해서 바닥 문양을 만들었을까? 누구에게 보여주고 싶었던 것일까?


이 광장에서 ‘조국의 제단’이 있는 베네치아 광장으로 가기 위하여 내려가는 계단을 코르도나타(cordonata)라고 부른다. 이 계단 역시 미켈란젤로가 설계할 때에 아래쪽에서 언덕 위로 올라갈수록 계단 폭을 넓게 설계하였단다.


우리는 포로 로마노에서부터 올라왔기에 실은 뒤에서부터 올라왔지만, 그 당시 포로 로마노는 완전 폐허가 되어 흙 속에 반 정도 묻혀 있을 때였기에 이 언덕 위에 있는 정부청사에 오기 위해서는 이 계단 아래에서부터 올라오는 길 밖에는 없었을 것이다.


미켈란젤로는 언덕으로 오르는 계단 윗부분을 더 넓게 만들어서 오르는 이들의 마음을 편안하게 하였다고 한다. 그래서였나? 2개의 석상 사이에서 시작하는 계단이 매우 넓게 보이며 저 아래 계단 끝이 좁아 보였다. 


그러나 아래에서 올려다보면 짧게 보이기 때문에 꽤 높은 언덕으로 이어지는 계단이지만 마음이 편안하고 부담 없이 오르게 하기 위하여 계단은 마치 계단이 아닌 것 같이 평행선을 그리고 있다는 착시효과를 주며 마치 낮은 경사면 같이 가깝게 보이게 만들었다. 원근법을 꺼꾸로 이용한 미켈란젤로의 기막힌 착상이었다. 


위에서는 멀리 보이지만 내려가는 길은 항상 올라가는 길보다는 쉽다고 생각하는 것이 사람들의 심리니까!


언덕 위에 전개된 이 광장은 좌우 양쪽의 한 쌍의 건물, 즉 카피톨리노박물관과 팔라초 콘세르바토리 및 안쪽 정면의 시청사의 3개 건물로 둘러싸여 있는데 좌우 건물이 마주보는 간격은 투시도법(透視圖法)의 조화를 위하여 바깥쪽에서 안쪽으로 향할수록 넓어지게 배치되어 있다. 


그래서 계단 위까지 오르면 멋진 청동상과 좌우의 건물과 정면의 건물이 정사각형의 모양으로 보이도록 설계를 하였다. 건물 배치에도 착시효과를 위해서 원근법을 꺼꾸로 이용한 것이다. 


현재 로마 시의회와 로마 시장의 집무실로 사용되는 시청사 건물은 과거에 세나토리오(Senatorio) 궁이라고 불리던 곳이었다. 이 건물의 정면은 평범해 보이지만 건물 뒷면은 아주 독특한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시의회 건물의 가장 아래 기층부는 고대 로마의 폐허, 즉 포로 로마노에 있었던 건물의 잔해인 것이다. 그 위에 중세시대의 건축물이 올라섰다가 흙으로 덮여 있던 이 건물 위에 르네상스 시기인 1592년에 새로운 건축물이 들어선 것이다. 


그러니 2000년 전에 땅속에 묻혀 있던 고대의 건물을 기초로 하여 계속 건물을 지어나갔던 것인데, 땅 속에 묻혔던 부분을 파헤치자 지금과 같은 모습이 드러난 것이다. 


그래서 캄피돌리오 광장의 시청사 옆 골목길을 빠져나오면 시야가 확 트이면서 포로 로마노 전체가 바라보이는 기가 막힌 전망대가 있게 된 것이다. 


1592년이면 우리나라에서 임진왜란이 발생한 해인데 그 당시에 만들어진 건축물이 여기에서는 아직까지 사용이 되고 있으니…. 무엇이 이런 차이를 만드는 것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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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07-03
이탈리아 포로 로마노(Foro Romano)

 

 

 

로마제국의 발상지인 팔라티노 언덕과 캄피톨리오 언덕 사이에 기원전 6세기 무렵부터 정치와 경제의 중심지로 발전하며 로마제국의 수도 기능을 하기 위하여 세워진 많은 공공건물들과 신전, 원로원 그리고 사람들이 모여 토론하고 회의할 수 있는 광장이 있었으니 요즈음엔 이를 포로 로마노(Foro Romano) 라고 부른다. 


로마가 계속 세계 속으로 팽창하며 수많은 정복전쟁에서 이기고 돌아온 황제들의 개선문들이 세워지면서 광장은 점점 좁아졌으나 이마저도 콘스탄티누스 대제가 326년부터 수도를 비잔티움으로 이전하는 작업을 시작하며 로마가 동•서 로마로 서서히 고착되어가는 동안 빛을 잃어가다가, 이전이 끝났을 때에는 로마제국의 수도였던 로마는 졸지에 제국의 수도에서 서 로마의 변두리가 되고 말았던 것이다.

 

 

 

 


동•서 로마 분열 이후 서 로마 제국의 수도는 메디올라눔(현재의 밀라노)였지만 서 로마의 황제 호노리우스가 402년 수도를 라벤나로 옮기면서 제국은 외세의 침입에 서서히 무너지기 시작하였다. 


바다 건너 브리튼 섬은 앵글로 색슨 족에게, 갈리아는 프랑크 족에게 넘겨주었고, 에스파냐 역시 서고트족의 위협에 위태롭다 보니 서로마 제국의 영토는 자연스럽게 반도 안으로 축소된 셈이었다. 

 

 

 

 


451년에는 중앙아시아 출신의 훈 족의 침입을 막아내며 한숨을 돌리는 듯했지만 4년 후 게르만 족의 일파인 반달 족이 로마를 침략해 서로마는 게르만 족의 손아귀에 들어가는 동안 유럽 대륙의 인종은 서서히 혼혈이 되어 가며 동시에 유럽의 정치 지도가 바뀌어 가던 격변의 시기였다. 


476년, 황제의 친위대장이었던 게르만의 용병대장 오도아케르가 로물루스를 폐위시키며 서 로마제국은 공식적인 멸망에 처하게 되었다. 

 

 

 

 


로마를 정복한 이민족들에게 로마의 유산은 약탈의 대상이었고, 이제는 국교가 된 교회의 성장으로 많은 교회들이 지어질 때 필요한 석재들을 뜯어 가고, 또 지진으로 파괴되었어도 복원을 생각하지 않은 채 거의 모든 건물들이 부서진 그대로 방치하는 동안 토사 아래에 묻혀 버리며 “하루 아침에 이루어 지지 않은 로마”는 서서히 땅 속으로 사라지게 되었던 것이다.


19세기 이전의 이 지역은 땅 속에 절반 이상 묻힌 개선문과, 폐허가 된 일부 건축물들이 땅 위로 삐죽 드러나 있는 황무지였었단다. 

 

 

 

 

 


19세기에 들어와서 무솔리니 시절에 복원이 시작되었지만 그 복원 또한 무솔리니의 취향이 개입되면서 많은 유적들이 부서져 없어지기도 하였지만 아직도 땅 속에 많이 있다는 말들이 있다. (그 말을 확인할 수가 없으니 믿거나 말거나….)


476년 서로마 제국의 멸망 이후, 동로마 제국은 비잔틴 제국으로서 1453년까지 존속하기에 우리가 흔히 말하는 “로마제국의 멸망을 언제로 보아야 할 것인가?” 에 대한 주장은 좀 엇갈려 있기도 하지만 이탈리아 중부의 작은 도시 국가에서 출발하여 이탈리아 반도를 통일한 것이 로마사의 1단계라면, 그 후 지중해 연안 전체를 정복하며 북으로는 영국을 포함한 서유럽을, 동으로는 중동지역 대부분을 정복하며 “모든 길은 로마로!”라는 슬로건 하에 대 제국을 이룬 시기를 2단계로 볼 수 있을 것이다. 

 

 

 

 


이렇게 세계로 뻗은 길을 통하여 문물이 교역되고, 문화와 종교가 전파되던 화려한 대제국은 3기로 들어서며 사치와 쾌락의 샴페인을 너무 많이 터뜨린 모양이다. 수 많은 석학들이 로마제국의 흥망에 관해 논쟁을 하며 몰락의 원인이 “내부적 원인이냐?” “외부적 원인이냐?”를 규명하려 노력을 해 왔지만 이 또한 과학처럼 증명할 길이 없으니 우리 말처럼 “달도 차면 기우나니….”가 아닐까? 


그래도 그들의 문화와 역사의 결과는 요즈음 우리들의 생활에도 깊이 스며들어 있고, 그 유물들 또한 수많은 관광객들을 불러 모으며 후손들을 먹여 살리니 오늘의 이탈리언들이 조상은 참 잘 두었나 보다. 


반만년의 유구한 역사를 자랑하는 우린 무엇을 하였던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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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07-02
로마의 개선문3 - 콘스탄티누스 개선문

 

 

콘스탄티누스 개선문 윗부분에 새겨진 문구를 우리 말로 번역을 하면 “콘스탄티누스 황제에게 / 신의 영감과 숭고한 정신으로 나라를 위해 정의의 무기로 폭군과 그의 일파들에게 복수하였으므로 이에 로마의 원로원과 시민은 승리의 증표로 이 개선문을 헌정했다.”고 한다.


그런데 여기서 ‘신의 영감으로(INSTINCTV DIVINITATIS)’란 말은 도대체 무엇을 의미할까?


서기 235년부터 284년까지 50년 동안 황제의 자리에 오른 이가 26명에 이를 정도로 로마에서는 왕위 찬탈이 끊이지 않았었다. 소위 ‘군인 황제 시대’ 였던 것이다. 284년 제위에 오른 디오클레티아누스는 혼란스러운 제국에 다소간의 안정을 가져오기 위해 황제의 수를 늘려, 황제 두 명에 부황제 두 명을 더해 로마는 모두 네 명의 황제가 나누어 통치하는 나라가 되었다. 


이렇게 자리가 늘어나니 옥좌를 놓고 벌이는 이전투구는 조금 줄어들었지만 그게 어디 오래 가겠는가? 황제라는 ‘하늘 아래 유일한 최고 권력자’의 자리를 차지하기 위해 4명의 황제들 사이에 다시 패권 다툼이 시작 되었다. 


307년 막센티우스가 로마에서 사두체제와는 다른 독자적인 노선을 걸으면서 봉기하여 로마를 장악하자 동로마의 정제인 갈레리우스가 막센티우스를 단죄하기 위해 군사행동에 들어갔지만 실패하였다. 이에 퇴임 정제들과 회의하여 리키니우스(Gaius Valerius Licinianus Licinius, 263년 - 325년)를 서방의 정제에 임명하기로 했다. 


311년 동방 정제, 갈레리우스가 죽자 리키니우스가 동방의 정제로 취임하여 동•서방의 정제가 되었다. 이 당시 중요한 라인 강 방위선의 강력한 부대를 지휘하던 콘스탄티누스는 리키니우스와 동맹을 맺고 독자적인 황제의 권리를 주장하는 막센티우스를 처단하기 위해 로마로 출정하게 되었다. 


서기 312년 콘스탄티누스는 막센티우스 병력의 1/4 밖에 되지 않는 4만 명의 병력을 이끌고 북부 이탈리아의 베로나를 공략한 다음 막센티우스와 마지막 일전을 벌이기 위해 로마로 내려오고 있을 때였단다. 대낮에 갑자기 하늘에서 환상과 함께 “이 증표로 이기리라(In hoc signo vinces)”라는 문구를 보았고 그날 밤 꿈에서도 같은 광경을 보고는, 잠에서 깨자마자 꿈에서 본 것을 그렸고, 기독교 지도자들을 불러서 하나님과 자신이 본 십자가 모양에 대해 물었다.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지식을 얻은 그는 꿈에서 본 십자가를 제국의 깃발로 사용하기로 결정했다. 이 상징은 그리스 알파벳 중 ‘카이(Ⅹ)’와 ‘로(Ρ)’를 합친 것이며, 그리스 알파벳으로 ‘그리스도’란 단어를 쓸 때 앞의 두 글자이다. 


콘스탄틴은 이를 하늘의 계시로 믿고 병사들에게 방패에 카이-로 심볼을 그려 넣고 전투에 나가도록 명령했다고 전해 온다. 이 심벌은 후에 카톨릭교회의 상징으로 그대로 사용되었다. 

 

 

 


 312년 10월 27일, 막센티우스의 군대와 로마 북부 밀비우스 다리에서 벌인 전투에서 막센티우스가 테베레 강에 떨어져 전사함으로 콘스탄티누스는 승리하였다.


이 전투로 인해 제국 서방에서 콘스탄티누스는 유일한 강자로서 군림하게 되었지만 서 로마의 정제가 될 수 있는 것은 아니었다. 왜냐하면 리키니우스가 있었기 때문이다. 

 

 

 

 


콘스탄티누스는 다음해인 313년에 밀라노에서 그와 회동하여 로마제국을 동•서방으로 공동 통치하기로 협정을 맺고 기독교를 공인하는 “밀라노 칙령”을 발표하며 몰수되었던 기독교 재산을 모두 교회에 돌려주었다


수많은 내전을 거쳐 권력을 잡게 된 콘스탄티누스에게 권좌는 아마도 항상 불안하였을 것이다. 그래서였을까? 

 

 

 

 


“로마 황제는 교회의 권위 내지는 하느님의 권위에 의해 임명된다”는 원칙을 세우고 따라서 그것은 “인간이 마음대로 바꿀 수 없는 것”이라며 그의 권위를 보장받기 위하여 기독교 발전에 많은 도움을 주며 초기 기독교의 정착을 주도하였던 것이리라. 


박해받던 기독교가 드디어 로마제국에서 합법적인 종교가 되었던 것이다. 325년에는 제1차 니케아 공의회를 소집하여 기독교의 교리적 기틀을 다져 놓기도 하여 동방정교회에서는 그를 성인으로 공경하며, 어머니 헬레나와 함께 5월 21일을 축일로 지정하였다.

 

 

 

 


교회사에서는 콘스탄티누스가 기독교에 대한 우호적인 태도와 열심은 있었지만 337년 죽기 바로 직전까지 세례를 받지 않았단다. 세례 받은 후 짓는 죄를 어떻게 해야 할지 몰라 죽기 전에 세례를 받음으로써 한꺼번에 모든 죄를 씻고자 한 것이라니, 아마도 예수님과 함께 못 박혀 죽은 두 강도 중 구원 받은 강도가 부러웠는지도 모르겠다.


황제의 총애를 받으며 사도 베드로를 1대 교황으로 하는 교황제도를 시작하며 정치와 종교가 야합하다 보니 어느 새 교황이 각국의 왕위를 좌지우지하는 절대권력자로 부상하며 유럽 역사의 중심으로 부상하게 되었는가 보다

 

 

 

 


324년 로마 동부를 차지하고 있던 황제 리키니우스마저 쳐부수면서 로마의 유일한 황제가 된 콘스탄티누스는 326년부터 수도를 비잔티움으로 이전하는 작업을 시작하였다. 즉위 10년을 기념하여 원로원이 로마에 가장 크게 콜로세움 가까이에 세운 콘스탄티누스 개선문에는 그리 신경을 쓰지 않았던지 다른 개선문들에서 떼어 온 석재와 부조물들을 여럿 사용하였던 것 같다고 주장하는 학자들이 있다. 이들 사이에서 예술적인 관점에서는 그리 큰 점수를 얻지 못하고 있단다. 


그래서인지, 아니면 철책으로 둘러싸여서인지 사람들은 지나 가면서 먼발치에서 보고 마는 모양이다. 이 개선문을 본 떠서 더 크게 지어진 파리의 “승리의 개선문” 은 아직도 많은 관광객들을 불러 모으고 있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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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06-21
로마의 개선문(2) -세베루스 개선문

 

 

두 번째로 세워진 개선문은 포로 로마노에서 캄피돌리아 언덕으로 오르는 길목에 옛 모습 그대로 서있는 세베루스 황제의 개선문(Arco di Settimio Severo)이다. 개선문의 앞면과 뒷면을 가득 메운 정교한 조각들은 많이 마모되었지만, 개선문 윗부분에 여러 줄로 길게 음각으로 쓰인 라틴어 문장만큼은 확실히 보인다. 


이 긴 라틴어 문장이 “국가의 일체성을 되찾고 로마 시민의 제국을 확장했기 때문에 원로원과 로마 시민들이 셉티미우스 세베루스 황제와 그의 두 아들 카라칼라와 게타에게 헌정한 것” 이라며 이 개선문이 세워진 동기를 알려주는 문구란다. 


그의 아들인 카라칼라는 포악한 황제로 귀에 익은데, 막상 셉티미우스 세베루스는 우리들의 귀에 익지 않은 이름이다. 로마제국 사상 최초의 아프리카 출신 황제가 된 세베루스는 북아프리카 렙티스 마그나(현재의 리비아 트리폴리) 출신으로 회계 감사관, 호민관을 거쳐 법무관으로 선출되어 갈리아 루그두넨시스, 시칠리아 등의 총독으로 부임하는 동안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황제와 콤모두스 황제 밑에서 공을 세워 191년 판노니아와 일리리아 지방의 사령관이 되었다. 


192년 12월 31일 콤모두스가 암살당한 뒤 내란 속에 뒤를 이어 황제가 된 페르티낙스를 율리아누스가 살해한 후 황제로 자칭하자 뒤이어 시리아 총독 니게르, 브리타니아 총독 알비누스도 서로 황제임을 자칭하는 일대 혼란이 일었다. 


황제 자리는 하나인데 셋이서 저마다 황제라고 하도록 이 당시의 정치판도는 힘으로 좌지우지 되었던 모양이다. 이때 세루비스는 7대 군단 4만2000명의 군사를 거느린 알비누스와 공동 황제로 즉위하는 조건으로 연합하며 12개 군단 7만 2000명 중 2개 군단을 로마로 내려보내 율리아누스를 살해한 후 로마에 입성해 근위대를 해산시켰다. 


뒤이어 시리아 총독이며 황제로 자칭한 니게르를 대파하고 추격대를 보내 유프라테스 강 근처에서 살해했다. 그리고 197년 2월 19일 배로 불어난 대군을 이끌고 리옹 근처의 평원에서 알비누스와 전투를 벌여 승리함에 따라 알비누스가 자결하고 세베루스가 단독 황제가 되었다.


세계를 제패한 로마이고 보니 그 중심, 로마를 지배하기 위해서는 동맹과 배반을 쉽게 할 수 있는 권모술수와 더 강력한 군사력을 겸비하여야만 가질 수 있는 자리가 황제 자리였던 모양이다. 그러니 후에 “군인 황제시대”라는 말이 만들어 졌지!


황제가 되어 내정을 정비한 후, 199년 동방 원정을 개시해 티그리스 강변까지 쳐들어가 파르티아군을 간단히 격파하고 유프라테스 강과 티그리스 강 사이의 메소포타미아 지방을 속주화 했다. 


이 원정의 개선으로 203년 포로 로마노의 마지막 건축물인 세베루스 개선문을 세웠으며 이후에는 본국에 머무르며 각종 공공 시설 개발사업을 벌이다가 205년 근위대장 플라우티아누스를 후계자로 지명하였다. 


결국 아들을 황제 감으로 보지를 않았다는 이야기일 텐데, 이를 안 아들 카라칼라가 플라우티아누스를 살해하며 정적을 제거하는 일이 벌어지기도 하였다. 


210년부터 칼레도니아 전역 제패를 목표로 브리타니아 원정을 감행하다가 211년 2월 4일 에부라쿰에서 사망하며 아들 카라칼라와 게타 두 아들을 후계자로 지명하였다.


세루베스 개선문이 “원로원과 로마 시민들이 셉티미우스 세베루스 황제와 그의 두 아들 카라칼라와 게타에게 헌정한 것”이라고 하였으니 그 두 아들도 잠깐 드려다 보기로 하자.


세베루스는 두 아들 카라칼라와 게타 사이의 반목이 심각한 것을 알고는 제국을 공동으로 통치하도록 유언했다. 아버지의 유언대로 카라칼라는 게타와 로마를 공동으로 통치했지만 1년 후, 어머니 율리아 돔나 앞에서 동생을 살해하고 동생이 자기를 죽이려고 했기 때문에 정당방위로 그를 죽였다고 원로원에 공포했다.


그리고는 동생과 조금이라도 관련된 사람들은 모조리 처형하고, 동생에 관한 기록과 형상들을 모두 지우고 파괴하고 말았다. 이리하여 개선문 윗부분에 새겨진 문장 중 네 번째 줄에 쓰여 있던 동생의 이름을 지워버리고, 다른 말로 대체해버렸던 흔적이 개선문에 아직까지 남아있는 것이다.


그래서인지 세베루스가 죽은 후 로마에서는 카라칼라가 황제 주치의로 하여금 아버지를 독살하도록 했거나 아니면 아버지를 직접 죽였을 거라는 소문이 퍼질 정도로 카라칼라는 난폭한 성정을 가진 인물로 묘사되었나 보다. 


카라칼라(Caracalla)란 이름 자체도 본명이 아니라, 켈트족의 전통적인 모자를 뜻하는 황제 자신의 별명이었단다. 본명은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한번에 2천 명을 수용할 수 있는 로마 최대의 목욕탕을 짓고, 212년 로마 제국의 모든 자유민에게 로마 시민권을 주는 칙령을 발표하는 등, 재위기간 동안 로마 제국의 몰락에 일조하다가 결국 217년 암살을 당했다. 그래서인가? 요즈음도 “성이 문란해지며 목욕문화가 발달하면 나라가 망할 징조”라는 말이 회자되고 있지 않은가!


이런 상황들이 어찌 보면 이조시대의 궁중 암투를 보는 것보다도 더 자주 일어난 권력쟁탈 내전이 있었던 로마인데… 로마는 이후 오래지 않아 동서 로마로 나누어 진 후에 서 로마가 먼저 망하기는 하였지만, 이러면서도 1,000년 이상 수많은 유적을 만들며 세계를 쥐락펴락 할 수 있었는데… 반만년 역사를 가졌다는 우리는 같은 반도 국가이면서 무엇을 하였었나?” 왜? 누가 답을 할 수 있을까?


개선문의 꼭대기에는 네 마리의 말이 이끄는 개선마차에 올라탄 황제와 그의 두 아들을 조각한 청동상이 있었다고 하는데, 지금은 모두 사라져버리고 개선문에 부조 되었던 화려한 승리의 감동도 형체를 알아 보기 힘들도록 세월에 부식되어 가며 말없이 1800년의 세월 무상을 전해주고 있는 것 같다.


모든 영화는 풀 잎에 내렸던 이슬 같은 것이라고… 그래도 오랜 세월 후에 이 개선문을 본 따서 만든 카루젤 개선문이 파리에 남아 있는 것을 보면 자신의 승리를 뽐내고자 하는 인간의 욕망에는 변함이 없는가 보다. 

 

 


   

 

 

그는 그 당시로는 보기 드물게 제명대로 살다간 황제였다. 18년 동안 로마제국을 통치했는데, 생의 마지막 순간에 자신의 삶을 회고하면서 “나는 내가 하고자 하는 일은 다 이루었다. 그러나 모든 것이 헛된 일이었다”라고 고백했다고 한다. 마치 솔로몬이 전도서에서 읊었듯이… 아직 기독교가 전파되기 전이었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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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06-19
로마의 개선문(1) -티투스 개선문

 

 

많은 정변 속에서도, 침략하면 승리하던 막강한 세력을 유지해온 로마 시대에는 36개의 개선문이 세워졌었다는 기록이 있다고 한다. 지금도 로마에는 2000년 전부터 세워진 개선문이 3개나 원형을 그대로 유지하며 남아있어 후대에 세워지는 대부분의 개선문의 모범이 되었다.


제일 먼저 눈에 띄는 것은 콜로세움 바로 옆에 우뚝 서 있는 콘스탄티누스 개선문이지만 남아 있는 3개의 개선문 중에 제일 처음 세워진 개선문은 콜로세움의 서쪽으로 포로 로마노(Foro Romano)로 들어갈 때 지나게 되는 티투스의 예루살렘 정벌을 기념하여 세운 티투스 개선문이다. 

 

 

 

 


콜로세움 쪽을 바라보는 쪽 개선문의 정상에는 ‘원로원과 로마 시민들이 신격 베스파시아누스의 아들 신격 티투스에게 바친다’라는 뜻의 글귀가 아직도 뚜렷하게 남아 있다. 


“SENATVS/POPULVSQUE ROMANVS/DIVO TITO VESPASIANI F(ilio)/VESPASIANO AVGUSTO”


늑대의 젖을 먹고 자란 두 형제, 로물루스(Romulus)와 레무스(Remus)가 건국한 로마이고 보면 낳을 때부터 귀족인 집안이 어디 있었겠는가 마는 BC500년 경부터 시작된 공화정이 이어 오다 보니 수많은 귀족들이 탄생하게 되었고, 공화정이 제정으로 바뀌었다 한들 또 다른 귀족들이 탄생하게 되는 것은 인간사의 본능인지도 모르겠다.


세리(稅吏)였던 에퀴테스 계층의 로마인 플라비우스 사비누스의 아들로 태어난 베스파시아누스(Vespasianus)가 정치적 혼란기에 여차여차하여 황제의 자리에 오르게 되고, 그 아들 티투스가 자리를 이어받고, 또 뒤를 이어 그 동생이 황제가 되고 나니 집안의 귀족화, 신격화가 필요하기도 하였을 것이다.

 

 

 

 


티투스와 그 아버지, 베스파시아누스가 신격화되었다는 것은 이 개선문이 티투스가 죽은 다음인 서기 81년 이후에 세워졌다는 뜻이다. 그렇다면 이것은 그의 동생 도미티아누스가 황제가 된 후에 세웠다는 뜻이 된다.


서기 71년, 유대나라를 완전히 초토화한 후 티투스가 많은 전리품과 노예들을 데리고 로마로 개선할 때에 황제가 된 베스파시아누스가 그 개선행렬에 함께 하였으나 아직 개선문은 없었다. 티투스는 후일 요세프스가 되는 요셉 벤 마티아스를 개선식에 대동하는 것도 잊지 않았다.


79년 6월 24일 베스파시아누스 황제가 타계하고 39세의 티투스가 즉위했다. 아우구스투스 이래 황제의 친아들이 후계자가 된 경우는 이번이 처음이었다. 베스파시아누스는 자신이 군사혁명을 통해 권력을 장악했다고 솔직하게 인정하며 원로원으로부터 황제자리를 세습할 수 있는 권한 등 많은 권한을 법적으로 인정받았으나 어떤 법령보다도 그에게 더 중요했던 문제는 자신의 치외법권적 권능을 인정받고 벼락출세한 자기 가문의 위신을 높이는 일이었다.

 

 

 

 


포로 로마노를 확장하며 네로의 '황금궁전' 터 위에 콜로세움 공사를 시작함과 동시에 군사문제에도 군기 확립과 안정을 도모하던, 10년의 치세 동안 로마 시민들은 “베스파시아누스는 내란을 종식시켜 제국의 붕괴를 막은 인물”로 인정하였으며 그가 죽은 후에 즉시 신으로 추앙되었다.


티투스는 예루살렘 성전을 불 태우고 성벽을 헐어 버렸듯이 황제로 즉위하기 전 정복전쟁을 할 때까지는 성격이 포악하고 행실이 그리 좋지 않았다고 한다. 그러나 황제가 된 다음부터는 로마제국의 최고통치자로서 자신의 부정적인 이미지를 불식시키며, 로마의 도로망과 수로 등 인프라를 정비하는데 신경을 쏟으며 아버지가 시작한 원형경기장의 완공에 전념하노라 자신의 승전을 기념하는 개선문 공사는 전혀 서두르지 않았다.


 그러나 그가 재위하던 2년 동안 로마에는 여러 가지 큰 재앙이 많았다. 서기 79년 8월 24일, 황제가 된지 불과 두 달 만에 베수비오 화산 폭발로 폼페이와 헤르쿨라네움(아직도 발굴 초기단계이지만 일부 입장이 허용되고 있다.)이 완전히 지구상에서 사라졌는가 하면, 서기 80년 초에는 로마의 중심부에 대화재가 발생하여 막대한 피해를 입었고, 서기 81년 여름에는 로마에 유례없는 전염병이 나돌아 수많은 사람들이 희생되었다.


콜로세움 개막행사 100일 축제가 끝날 때쯤 그는 눈물을 하염없이 쏟았다고 하는데, 혹시 자신의 죽음을 이미 감지하고 있던 것이 아니었을까? 로마 시민들과 원로원은 그의 죽음을 안타까워하며 그를 기리기 위하여 개선문을 세운 것이란다. 반면 유대인들은 그가 예루살렘 성전을 파괴한 죄로 신의 저주를 받은 것이라고 생각했단다. 서로 보는 관점이 상반되어 있었으니까.


그런데, 그에게 끌려서 로마로 온 수많은 유대인들의 후예들이 1400년 후에 피렌체에서 꽃을 피운 문예부흥 운동에 많은 역할을 하였으며, 결국 이 운동이 유럽의 중세 암흑시대를 근대로 바꾸는 촉매작용을 하였으니 티투스의 개선이 새롭게 조명되어야 하지 않을까?  


요즈음도 유럽에서, 북미주에서 세상의 정치와 경제와 문화와 금융을 지배하고 있는 대다수가 유대 디아스포라의 후예들이니 말이다. 아직도 유대 나라가 그 자리에 있었다면 그 옛날처럼 사두개파니 바리새파니 하며 서로 물고 뜯고 싸움질하지 않을 것이라는 보장이 없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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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06-10
이탈리아 로마(1) -콜로세움 3S의 효시?

 

 

 

로마! 하면 무엇보다도 먼저 떠오르는 것이 한쪽 벽이 부서진 채로 위용을 자랑하는 콜로세움(Colosseum)이다. 서기 70년, 그러니까 지금으로부터 1949년 전 베스파시아누스 황제가 착공해 10년 뒤에 아들인 티투스 황제가 완공한 거대한 원형 경기장으로 많은 관광객들의 로마 관광 시발점이 되는 곳이다.


자! 우선 콜로세움을 둘러보면서 이제는 미이라가 된 로마의 심장으로 한번 들어가 보자!


원래 이름은 로마제국의 3번째 왕국을 이룬 베스파시아누스 황제의 성을 따라 “플라비우스 원형 경기장”으로 유대나라의 멸망이 건설의 단초를 주게 되었다.

 

 

 

 


AD 64년 유대 총독으로 부임한 게시우스 플로루스는 더 많은 세금을 징수하기 위해 신전에 바쳐진 헌금을 압류하자 이에 반발하는 시민들을 무자비하게 진압하여 걷잡을 수 없는 폭동이 일어나게 되었다. 


유대인들은 마사다 요새를 지키던 로마 주둔군을 습격하여 무기를 탈취하고, 로마군을 공격하여 기세를 잡은 후, 예루살렘에 남아 있다가 항복한 로마인들을 모두 살해하고 말았다. 


반란의 여파는 다른 지방으로 점점 더 거세게 퍼져 나가며 상황이 복잡하게 전개되자 유대를 관할하는 시리아 속주 총독 케스티우스가 직접 군사행동에 나섰으나 그의 군대 역시 유대의 북부를 평정하고 예루살렘을 향해 진군하던 중 반란군의 기습으로 완전히 참패를 당하고 말았다.


그러자 네로 황제는 제국 내 다른 곳에서도 유사한 폭동이 일어날 가능성을 우려해, 영국 원정을 통하여 군사적 명성을 얻은 베스파시아누스에게 정예부대를 맡겨 빠른 진압을 지시했다.


베스파시아누스가 이끄는 군단은 북부 갈릴리 지방에서 반란군의 강렬한 저항을 받았지만, 한 달 반 만에 방어선을 뚫고 동굴에 숨어 있던 반란군 지휘자 요셉 벤 마티아스(Joseph ben Matthias)의 항복을 받을 때 요셉으로부터 그와 그 아들 티투스가 황제가 될 것이라는 예언을 듣고 티투스의 막료로 종군하게 하였다. 

 

 

 

 


한편 로마군이 예루살렘 포위망을 좁혀 들어갈 때 로마에서는 네로가 죽고 갈바가 황제가 되자 전쟁은 잠시 중단되며, 아버지를 대신하여 티투스가 신임 황제에게 충성을 맹세하러 로마에 가던 사이에 오토가 황제가 되었다. 


뒤이어 비텔리우스가 오토를 누르고 황제가 되자 오리엔트 군단은 베스파시아누스를 황제로 옹립했다. 그러니까 요셉 벤 마티아스의 예언이 빈말이 아니었던 셈이다.


비텔리우스가 제거된 후 황제가 된 베스파시아누스는 로마로 건너갔고, 아버지로부터 예루살렘 공략을 일임 받은 티투스는 다시 공격을 개시했다. 요셉 벤 마티아스는 티투스 곁에서 예루살렘 공략전을 지켜보며 유대인들의 항복을 중재했지만, 결사항전을 외치는 이들의 마음을 돌릴 수는 없었다. 


예루살렘 성은 넉 달 동안 계속된 포위를 견디지 못하고 함락되었고, 유대인들의 구심점이던 예루살렘 성전은 철저하게 파괴되고 말았다. 예루살렘 성 안 구석구석은 무자비한 살육으로 아비규환을 이루었고, 목숨 붙은 자들은 노예로 팔려가거나 티투스의 개선행렬에 끌려 로마에 노예로 끌려갔다.


요셉 벤 마티아스는 후에 베스파시아누스로부터 자신의 씨족명을 하사 받아 이름을 라틴식의 요세푸스 플라비우스(Josephus Flavius)로 바꾸었는데, 항복 후 전쟁에 함께 다니며 본 바를 기록하여 오늘날까지 전해 내려오는 유대 역사서 “유대 전쟁사”를 집필한 요세푸스, 바로 그 사람이다.


 세리(稅吏)였던 에퀴테스 계층의 로마인 플라비우스 사비누스의 아들로 태어난 베스파시아누스는 황제가 된 후 원로원들과의 관계를 개선하며 선정을 베푸는 동시에 네로의 호화방탕한 실정 이후 자주 교체되는 황제들의 죽음과 등극으로부터 시민들의 관심을 돌리려는 시도의 일환으로 돌과 화산재를 이용한 시멘트 콘크리트 기법을 사용하여 높이가 42.38m, 둘레 532m에 이르는 엄청 큰 원형경기장을 네로 황제의 황금 궁전(도무스 아우레스)의 정원에 있던 인공 호수를 메운 자리에 세우기 시작하였다. 즉 그 당시 정객들이 사용하던 “빵과 서커스”에서 한걸음 나아간 발상이었을 것이다. 


요즈음도 권력을 잡은 사람들이 국민들의 이목을 다른 곳으로 옮기며 집권을 유지하기 위한 방편으로 "3S방법", 즉 스포츠(Sports), 섹스(Sex), 스크린(Screen)을 사용하지 않는가? 그 당시에는 스크린이 없어 Live Show를 하였으니 아마도 더 자극적이었을 것이다. 이곳에서 열리는 검투사 경기를 보러 찾아 드는 관객이 5만여 명이나 되었다니까! 


검투사들은 보통 노예나 전쟁 포로들 중에서 실력이 출중하고 용맹하게 잘 싸우는 이들로 이루어져 있었는데, 서로 결투를 벌이거나 다양한 종류의 동물을 사냥하며 로마 관중들을 즐겁게 해 주었단다. 이렇게 살아간다는 것은 늘 죽음이 따르는 일이었으나, 승리를 거둔 검투사들은 영웅 대접을 받게 함으로써 영웅심을 고취시키는가 하면 다른 한편으로는 공포심을 심어주기 위한 정치적인 목적도 있었으니까. 


경기장은 또한 해상 전투를 재현하여 어떻게 로마가 승리하였는지를 보여주며 정부 홍보를 하기도 하고, 고전극을 상연하는 무대로도 사용하도록 지어졌다. 현대인들에게는 경악할 내용이겠지만, 볼거리로 제공되는 이른바 '수간 쇼' 라는 것도 있었다고 한다. 


크레타 여왕 파시파에(미노타우르스를 낳은 여성) 역을 맡은 여죄수가 황소에게 수간을 당하고, 다이달로스 역을 맡은 죄수가 날개를 잃고 경기장 바닥에 추락해 온몸이 뭉개지는 일도 있었다고 한다. (출처 로마제국, 쾌락의 역사 p300-302.) 


다시 말하면 로마판 3S 종합 공연장이었던 것이다. 비록 베스파시아누스가 시작은 하였으나 그 덕을 하나도 보지 못한 원형경기장이 되었지만….


콜로세움은 608년까지는 경기장으로 사용되었지만 그 이후에는 성당이나 궁전 등의 건축에 사용될 자재의 제공 터가 되었다. 


교황 니콜라오 5세(1447 – 1455)가 대성당을 짓는 데 필요한 2,522개의 돌을 콜로세움에서 가져오도록 허가하였다는 기록이 있고, 1505년, 교황 율리오 2세가 옛 건물을 헐고 화려한 성 베드로 대성당을 건설할 때에도 돌을 가져오라 허락하여 결국 많이 허물어진 모습을 보이게 되었나 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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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05-29
피렌체(Firenze) 5 -두오모 산타 마리아 델 피오레

 

 

 

“두오모(Duomo)”는 이탈리아에서는 교구장인 주교가 상주하는 “주교좌 성당”으로 보통 “대성당”이라고 한다” 라고 25회에서 설명을 하였다. 라틴어 도무스(domus)가 어원으로 영어로는 돔(dome)이며, 반구형의 둥근 지붕, 둥근 천장을 뜻하기도 하지만 이태리에서는 “주교좌 성당”이기에 여러 곳에 두오모가 있다. 그러나 피렌체와 밀라노, 그리고 피사에 있는 성당이 특히 크고 유명하기에 이 세 곳의 성당의 대명사가 된 것 같다. 마치 파리의 노트르담 처럼….


피렌체 두오모의 정식 명칭은 “산타 마리아 델 피오레(Cattedrale di Santa Maria del Fiore), 즉 ‘꽃의 성모 마리아’라는 뜻이다. 


세계 곳곳에 많은 성당들이 성모 마리아에게 봉헌이 되었는데, 복잡한 신학적인 배경이야 우리 같은 범인이 범접할 분야가 아니지만 우여곡절 끝에 431년 6월 22일부터 에베소의 테오토코스 성당에서 열렸던 “에베소 공의회”에서 마리아의 신성에 대하여 결정을 내렸다.


이후 수많은 교회들이 더 크게, 더 아름답게 지어지며 마리아에게 봉헌되어 온 것이 유럽의 역사이며, 또 성당의 역사이기도 한 것만 알아 두기로 하자. (좀더 자세한 내용은 저의 블로그 성지 순례 중 에베소를 참조하세요. http://blog.daum.net/chunchunhi-c/8090194)

 

 

 

 


피렌체의 두오모는 1296년에 아르놀포 디 캄비오가 고딕양식으로 디자인하여 초석을 놓은 후 1446년에 완성되었으니 150년의 세월이 걸린 건축 기간이다. 유럽을 돌다 보면 100년 혹은 200년 이상 걸려 지어진 성당들이 부지기수로 많다. 워낙 크게, 화려하게 그리고 정교하게 지어졌으니까.


더군다나 이 시기엔 경제규모가 커지면서 시민 의식이 깨어나던 문예부흥 운동이 태동하던 때가 아닌가? 그러니 세월에 따라 여러 명의 건축가가 뒤를 이어 가면서 담당하다 보니 성당의 설계도 유행 따라 고쳐 지고, 크기도 커져 가며 1418년 대성당을 완성시켰지만 천장은 완성을 시키지 못한 채로 뚫려 있었다. 지붕 지름이 너무 넓어 원형지붕을 올릴 방법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1419년, 성당 건축 재정을 지원하던 피렌체의 또 하나의 부유한 모직물 산업길드 “아르테 델라 라나(Arte della Lana)”는 대성당 돔의 설계안을 공모하는 대회를 열기에 이르렀고, 바로 이 즈음에 세례당 문 조각의 공모에서 떨어진 브루넬레스키가 십수년간 유럽을 돌아다니며 로마에 가서 판테온도 보고, 멀리, 오늘의 이스탄불인 동로마 수도, 콘스탄티노플에 가서 “성 소피야성당”을 보며 견문을 넓히고 피렌체로 돌아온 것이다. 


이 공모에서도 세례당의 문 공모 때처럼 여러 참여자들 가운데 로렌초 기베르티와 필리포 브루넬레스키가 마지막 결선에 올랐으나 이 대회에서는 브루넬레스키가 당선되어 설계 의뢰를 맡게 되었고, 기베르티가 조수로 일을 하게 되었다.


그러나 성당 문을 만들면서 동시에 조수로 임명된 기베르티는 18년 전 세례당 문 공모에서 자신에게 패한 브루넬레스키의 돔 공사 계획을 무시하며 “말도 안 된다”고 말을 퍼트렸다. 일단 세례당 문 공모에서 인정을 받았던 기베르티로부터 크게 공격받은 브루넬레스키는 아픈 척하면서 로마로 떠나며 기베르티에게 모든 계획을 넘겨주었다. 
교회에서 큰일을 하다 보면 구설수에 휘말리게 되는 것은 예나 제나 마찬가지인 모양이다. 이 또한 감당할 만한 시련이겠지만…. 

 

 

 

 

 


그러나 곧 기베르티는 전체 계획이 자신의 능력을 벗어난다는 것을 시인하고 다시 세례당 문 작업으로 돌아가고, 1423년 브루넬레스키가 돌아와 독점적인 책임하에 인계 받은 후 그때까지 없었던 “2중 벽”의 기상천외한 공법으로 1436년에 돔을 완성하였던 것이다. 


피렌체 두오모는 크기와 규모도 놀랍지만, 그 아름다움 또한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새로운 공법의 산물이었다. 약 100년 후인 1547년 1월 1일, 70대에 접어든 미켈란젤로가 로마 교황청의 성 베드로 대성당의 두오모 설계를 해달라고 부탁을 받자 “피렌체 두오모 보다 더 크게 만들 수는 있어도, 더 아름답게 만들 수는 없다”고 말했다니 미적인 완성도를 짐작해 볼 수 있을 것이다.


미켈란젤로가 말한 대로 그의 책임하에 완성된 바티칸 시국의 성 베드로 대성당의 돔이 이 돔의 규모를 뛰어넘게 되었지만 브루넬레스키의 거대한 석상은 지금도 대성당 광장에 있는 카노니치 궁전 바깥에 앉아서 자신의 가장 위대한 업적이며 앞으로도 영원히 피렌체 전경의 중심이 될 돔을 생각에 잠긴 시선으로 올려다 보고 있다. 무슨 생각을 할까?


‘내가 만일 35년 전에 세례당 문 공모에 당선이 되었더라면 저 두오모는 과연 어떤 모양으로 완성이 되었을까? 아니면 아직도 열린 천장으로,,,,?’


어떤 부류의 사람들은 “세계에서 제일”을 선호하는 DNA를 가지고 있는 가보다. 그래서인지 많은 사람들이 “세계에서 가장 큰 성당?”하면 이탈리아 로마에 있는 성 베드로 성당을 떠올리게 된다. 1990년까지는 그러 하였다.


하지만 1990년 9월 10일 이후 세계 최대의 성당은 유럽도 미국도 아시아도 아닌 아프리카 코트디부아르(영어이름: 아이보리코스트)의 수도, 야무수크로에 있는 “성모 평화 대성당”이다.


콘크리트 기둥과 대리석을 조립식으로 축조하여 3년 만에 완성시키었기에 사람들로부터 “영혼 없는 건축”이란 말을 들을 지언정 집권자의 과대망상을 충족시켜 준 산물로, 높이 170m, 총33만8천여 명이 동시에 미사에 참여가 가능한 세계 최대 성전이 된 것이다.


그 다음이 바티칸의 성 베드로 대성당이고, 밀라노 두오모는 5위, 피렌체 두오모는 13위가 되었고, 아직까지도 건축의 비결이 다 풀리지 않은 채 수많은 지진을 견뎌내며 서 있는 터키 이스탄불의 그 큰 성 소피아성당의 경우는 가장 큰 성당 Top15에 들지 못한 채 겨우 20위 정도 되는 것 같다. 영혼이 없는 면적으로만 따지면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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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05-23
피렌체(Firenze) 4 - 산 조반니 세례당

 

 

 

‘산 조반니’는 이탈리아어로 ‘성 요한’을 뜻하며, ‘성 요한’은 ‘피렌체의 수호성인’이다. 산 조반니 세례당은 현재 피렌체에 현존하는 종교 건물로는 제일 오래 된 건물로, 사도 요한에게 봉헌하기 위해 5세기경에 지어진 로마 시대 교회터에 다시 지은 세례당이다, 


서쪽을 제외하고 총 3개의 문이 있는데, 현재 출입문으로 사용하는 남문은 세례자 성 요한의 생애를 주제로 피사노(Nicola Pisano)가 1330년에 조각한 것으로 가장 오래되었다.


전 유럽을 휩쓸고 지나간 페스트에서 벗어난 것을 기념하기 위해 피렌체의 부유한 길드중의 하나인 의류산업길드, ‘아르테 디 칼리말라(Arte di Calimala)’의 후원으로 1401년, 동쪽 청동 문 제작 공개 경쟁이 있었다.


작품 주제는 구약성서에 나오는 <이삭의 희생>, 즉 아브라함이 하느님의 말씀대로 아들 이삭을 제물로 바치려는 순간 믿음을 확인한 하느님이 이삭을 살려주는 이야기를 주제로 출품하여 경쟁을 하는 것이었다.

 

 

 


여러 출품작 중에 마지막까지 남은 것은 당시20대 초반인 브루넬레스키(Filippo Brunelleschi)와 기베르티(Lorenzo Ghiberti)의 두 작품이었다.


피렌체의 유력 인사로 구성된 심사 위원회는 최종 후보로 남은 기베르티와 브루넬레스키에게 〈희생 제물이 된 이삭〉 패널을 시범 제출하라고 주문했고, 지금도 이 두 작품은 바르젤로 박물관에 나란히 전시되어 있다. 


우열을 가리기 힘든 두 작품을 놓고 심사위원들은 오랜 논의 끝에 청동문 작업은 기베르티에게 맡겨졌다. 구약을 주제로 기베르티가 막상 청동문 제작에 들어가자 산타 마리아 델 피오레 성당 측이 작품 주제에 대해 이견을 제기했다. 


산 조반니 세례당의 동쪽문은 산타 마리아 델 피오레 성당 입구와 마주 보고 있기 때문에 신약적 주제를 작품에 담아야 한다는 것이었다. 결국 기베르티는 총 28개의 신약 주제가 담긴 패널로 1403년부터 1424년까지 무려 21년 동안 산 조반니 세례당의 동쪽 청동문을 제작하였다.

 

 

 

 


동쪽 청동문에 이어 기베르티가 ‘공모의 주제’ 대로 구약의 내용을 주제로 삼아 28년에 걸쳐 두 번째로 만든 북쪽 청동문이 1452년에 완성되자 그것은 단순히 ‘문’ 이라고만 할 수 없는 천하의 걸작이었다. 후원자였던 의류산업길드, ‘아르테 디 칼리말라’는 기베르티에게 먼저 제작한 동쪽 청동문과 바꿔 달게 하였다.


이것은 신학적으로 문제가 많은 결정이었다. 


애초에 동쪽문을 제작할 때부터 두오모 성당과 마주 보고 있는 동쪽 문이 세례당에서 제일 중요한 위치이기 때문에 그 청동문의 주제는 예수 그리스도의 생애를 다룬 ‘신약적 주제’여야 한다는 주장으로 기베르티로 하여금 새로운 패널을 만들게 하지 않았던가! 


그런데 기베르티가 두 번째로 ‘공모의 주제’ 대로 구약의 내용을 주제로 제작한 문을 두오모 성당 맞은편에 배치하는 것은, 당시의 반 유대교적 전통이나 신약의 주제와 예수 그리스도의 우위를 강조하는 가톨릭교회의 입장에서 볼 때 문제가 많았다. 

 

 

 

 


그러나 피렌체의 의류산업길드, ‘아르테 디 칼리말라’는 기베르티 작품의 탁월함을 들어 새로운 선택을 한 것이다. 아마도 두오모를 짓고 있던 중에 필요한 재원과 타협이 되어지지 않았는가 싶다.


피렌체의 후배 조각가 미켈란젤로는 이 청동문을 보고 ‘천국의 문’이라고 높이 칭송했고, 지금도 미켈란젤로의 작명을 따르고 있는 이 유명한 문은 매일 관광객들로, 그리고 넋을 놓고 감상하는 관광객들의 지갑을 노리는 소매치기들로 문전성시를 이루고 있다.


브루넬레스키와 불꽃 튀는 경쟁에서 선택 받은 기베르티(1381-1455)는 결국 일생의 대부분을 청동 문짝만 만들다가 죽은 사람이 되었다. 그것도 같은 건물, 산 조반니 세례당의 동쪽 문으로 만들어졌다가 북쪽 문이 된 문과 북쪽 문으로 만들어 졌다가 동쪽 문이 된 일명 ‘천국의 문’, 두 짝을 만드는 데 49년의 생애를 바쳤으니 말이다.


‘천국의 문’은 2차 세계대전 중인 1943년에는 다른 장소에 숨겨져 있었고, 1966년에는 홍수 피해를 입었으나 복원된 후, 1990년대에 복제품으로 대체되었다.


현재 ‘천국의 문’의 진품은 대성당 박물관에 소장되어 있으며 세례당에 놓인 것은 복제품이지만 진품의 세밀함과 예술성은 거의 완벽하게 되살렸단다.


세례당 내부에 들어가면, ‘최후의 심판’과 ‘창세기’를 주제로 한 모자이크 장식이 화려한 쿠폴라(cupola)를 볼 수 있다. 


기베르티에게 기회를 빼앗긴 브루낼레스키는 그후 어찌 되었을까? 그는 지금도 두오모라고 짧게 불리는 산타 마리아 델 피오레 성당 옆에 앉아 자신이 만들어 놓은 돔을 생각에 잠긴 듯한 표정으로 올려다보고 있다. (이 이야기는 다음 호에 이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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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05-17
모세의 뿔 ? 꿈 보다 해몽

 

 

 

피렌체 이야기를 하다가 미켈란젤로가 나오고, 미켈란젤로 이야기를 하다가 다윗상이 나오고, 다윗상을 이야기하다가 성경 이야기가 나오다 보니 미켈란젤로의 또 하나의 걸작인 모세상을 여기에서 이야기를 하고 넘어 가는 것이 이해를 도울 것 같다. 실제로 모세상은 피렌체가 아니라 로마에 있는 산 피에트로 인 빈콜리 성당에 있는 교황 율리오 2세의 빈 영묘를 지키고 있지만 말이다. 


산 피에트로 인 빈콜리 성당(이탈리아어: Basilica di San Pietro in Vincoli)은 사도 베드로와 사도 바울이 처형당할 때까지 묶여 있었던 쇠사슬을 성물로 가지고 있기 때문에 일명 “쇠사슬의 성 베드로 성당”이라고 부르는 로마에 있는 성당 가운데 하나이지만 미켈란젤로가 조각한 “뿔이 난 모세상”이 있는 장소로 더 유명하다.


원래 모세가 지키고 있는 교황 율리오 2세의 영묘는 현재보다 더욱 거대하게 지어질 계획이었으나 후원자였던 교황 율리오 2세의 사망으로 이뤄지지가 않았다. 


율리오 2는 교황으로 선출되기 전에 이미 사생아를 두는 등 성직자다운 면모는 하나도 갖추고 있지 않았으나 여차여차하여 1503년, 율리오 2세로 교황이 된 후 교회의 위엄에 관심을 쏟으며 예술을 가장 크게 후원한 교황으로서 당대의 강력한 군주들 가운데 한 사람으로 기록이 되었다. 


성 베드로 대성당을 새로 건축하려는 생각을 품은 율리오 2세는 첫 모형을 브라만테에게 주문했고, 1506년 4월 18일 머릿돌을 놓았다.


그가 1506년 스위스 용병으로 근위대를 창설하며 미켈란젤로가 디자인한 유니폼을 입혀 교황을 최 측근에서 지키게 한 것이 오늘날까지 바티칸을 지키고 있다.


미켈란젤로에게 시스티나 성당에 그림들을 그리게 했고, 또한 자신의 영묘를 위해 '모세'상을 만들게 하며, 라파엘에게는 바티칸 궁에 있는 프레스코들을 그리게 하는 등 로마에 훌륭한 건물들을 많이 세웠다.


1506년 시작된 교황과 미켈란젤로의 교제는 두 사람의 성격이 너무나 비슷하여 자주 긴장 관계가 조성되었음에도 꾸준히 지속되어서 교황이 미켈란젤로의 정신적인 동역자가 되었을 정도였다. 


그러나 산 피에트로 인 빈콜리 성당의 율리오 영묘 가운데 미켈란젤로가 완성한 것은 계획보다 작아진 '모세' 뿐이었고 그나마 교황은 이곳이 아닌 성 베드로 대성당에 삼촌인 식스투스 4세와 나란히 묻혔기 때문에 막상 모세는 빈 영묘를 지키고 있는 셈이 된 것 같다. 그래서일까? 빈 영묘를 지키고 있는 모세의 머리에는 뿔이 두개 나 있다.


프랑스, 디종 서쪽 교외에 있는 샤르트뢰즈 드 샹몰 수도원(1383년 건립)에 ‘모세의 우물’(1395~1406)이 있는데, 그 우물에 네덜란드의 조각가 슬뤼테르(Claus Sluter 1385~1406)가 커다란 기둥을 세우고 상부에는 구약성서에 나오는 6인의 예언자를 조각한 조각군이 있다. 

 

 

 

 


그 중에 모세의 상도 조각되어 있는데 거기에도 뿔이 달려있다. 왜 뿔이 돋아났을까? 정통적인 성서학자들의 해석은 이렇다. 


기원 전 300년경, 헬라어가 국제 공용어일 때, 이집트에 있는 유대인 공동체들이 사용하도록 히브리어로 기록이 되었던 구약성경을 헬라어로 번역하기 위하여 유대의 각 지파에서 6명씩 차출되어 제작한 것이 최초의 번역본인 70인 역으로, 현재까지도 그리스 정교회에서 공식 전례 본문으로 인용하고 있다.


세월이 흘러 로마가 세상을 지배하며 기독교가 공인이 되자 성경은 다시 라틴어로 번역이 필요하게 되었는데 이 때에 히브리어에서 헬라아로 번역된 70인 역이 기초가 되어 여러 사람들이 번역을 하다 보니 많은 오역을 발견하게 되었단다.


382년 교황 다마소 1세가, 기존의 옛 라틴어 성경을 개정하고자, 히에로니무스 (예로니모)에게 성경 번역을 지시하였는데 그는 오류가 많은 70인 역이 아니라 히브리어 성경에서 라틴어로 번역하였다. 이를 불가타 성경(Vulgata Clementina)이라고 하며, 이 과정에서 뿔이 생겨나게 되었던 것 같다고 한다. 


히브리어 QARAN (광선이 나오다. To send out rays)를 QEREN(뿔이 나오다. To grow A Horn)로 오역을 하였단다. 왜냐하면, ′빛′이나 ′뿔′의 자음이 같기 때문이란다. 히브리어도 한자처럼 점 하나를 어디에 찍는가에 따라서 전혀 다른 의미가 된다고 한다. 그래서 모세의 얼굴에 “빛난” 광채가 “뿔난” 것이 되었단다. 


그러나 이것은 단지 번역상의 오류가 아니라는 주장도 만만치가 않다. 고대 사회에서 ‘뿔’은 대개 ‘영적인 힘’을 상징하였단다. 신명기 33:16-17 . 이런 것들이 요셉의 머리에, 그의 형제들 중에서 따로 구별된 자의 정수리에 임할지로다. 그는 첫 수송아지같이 위엄이 있으니 그 뿔(QEREN)이 들소의 뿔(QEREN)같도다, 라고 한 것 처럼….


그래서 모세의 얼굴에 “빛난 광채”를 “모세의 머리에 뿔이 났다”는 뜻으로 옮겼던 것이란다. 위엄을 더하기 위해서….


또 있다. 모세가 기껏 시내 산에 올라 하느님으로부터 훈계를 듣고 무거운 십계명 돌판을 받아왔는데, 내려오니 백성들은 황금 송아지를 섬기며 춤추고 노래를 부르고 있었다. 그러니 모세가 얼마나 화가 났을까? 


그 앉아 있는 자세며, 노려보는 눈매며 힘이 들어간 근육이 화가 단단히 난 모양이다. 왜 우리도 흔히 화가 날 때 “뿔이 났다!”고 하지 않는가? 아무래도 이건 좀 한국에서 생긴 역설 같지만.


그 외에도 여러 가설들이 있지만 나는 아무래도 이런 심오한 뜻보다는 오역이라는 쪽에 더 수긍이 간다. 그 당시 교황들의 작태와 다윗의 고추를 보면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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