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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천 용(龍)들의 추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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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누구를 원망하기보다 모든 것은 내 탓이라는 심정이고 자책감을 느낀다…/지난 10개월 동안 견디기 힘든 고통을 겪었다. 휴일도 없이 일만 했던 사람들이 나로 인해 고통받는 것을 생각하면 잠을 이룰 수 없다." 이명박 전 대통령이 자신에 대한 구속영장이 발부되자 밝힌 소회다.  


0…나는 1985년 군대 제대와 함께 현대그룹에 입사했다. 당시엔 장교 출신이 인기가 높아 웬만한 대기업에서 서로 모셔가려 했는데, 나는 여러 기업체를 놓고 저울질하다 현장중심 체질에 맞을 것 같은 현대를 택했다. 그런데 계열사로 상선에 배치됐는데, 처음 신입사원이 하는 일은 매우 소소한, 이를테면 잔심부름 수준이었다. 그래서 가끔 “대졸에 장교 출신인 내가 이런 일이나 하려고 입사했나” 라며 속으로 투덜대곤 했다. 


 특히 주로 외국회사와 교신이 잦은 업무 특성상 낮엔 빈둥거리다 밤늦게서야 야근을 하느라 법석을 피우는 일이 반복되자 청운의 꿈을 안고 입사했던 포부는 슬그머니 사라져가고 직장생활에 회의가 쌓이기 시작했다. 그러자 당시 이사로 계셨던 선배님이 술자리에서 날 보고 “이봐, 누구나 다 그런 과정을 거쳐야 고위 임원도 될 수 있는 거니까 실망하지 말고 열심히 배워.” 라고 충고하는 것이었다. 그러면서 하는 이야기가 “현대건설의 신화로 통하는 그 분도 다 그랬어. 여기서 성공하려면 그 분을 잘 배워둬.”  

     
 그랬다. 당시 이명박 현대건설 회장은 샐러리맨들의 우상이었다. 대부분은 평사원에서 출발해 우선 (과장)대리 자리에 오르기 위해서라도 죽어라고 열심히 해도 안되는 경우가 많은데, 저 분은 어떻게 저렇게 빨리 출세할 수 있었을까… 아무튼 이명박 회장은 누구라도 열심히 노력하면 저 정도 위치에까지 오를 수 있다는 희망이요, 표상이었다. 


 선배들이 들려주는 이 회장의 근면성과 배짱, 추진력은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것이었다. 특히 그는 별다른 배경이 없는 뭍한 젊은이들, 요즘 말로 하면 ‘흙수저’들의 영웅이었다. 당대를 주름잡던 이명박을 비롯해 김우중 대우그룹 회장 등은 월급쟁이도 열심히 노력하면 성공할 수 있다는 꿈을 준 인물이었다. (그러나 나는 대기업 생활이 체질에 맞질 않았고 2년 정도 다니다 언론계로 직장을 옮겼다.)      

    
0…평사원에서 출발해 12년 만에 한국의 대표적 건설회사 사장과 회장을 거쳐 국회의원, 서울시장, 대통령까지 된 ‘샐러리맨의 신화’. 이명박 전 대통령의 인생 역정은 그야말로 롤러코스터 같은 굴곡진 삶이었으나 결국 철창에 갇히는 신세가 되고 말았다.


 올해 77세인 그는 1941년 일본 오사카에서 7남매중 다섯째로 태어났다. 해방 후엔 가혹할 정도의 가난으로 젊은 시절을 보냈다. 술지게미로 끼니를 때워야 했고, 가족이 세 살던 집은 다리도 펴기 힘든 ‘벌집’이었다. 옆방엔 거지들이 살았다. 고교 땐 뻥튀기 장사를 했고, 대학(고려대 경영학과) 시절엔 환경미화원으로 일하며 등록금을 벌었다. 가난을 피해 군에 자원 입대했지만 기관지가 나빠 강제 퇴소당했다. 전역 후 당시 박정희 대통령이 한일국교정상화를 추진하자 ‘굴욕외교’라며 학생시위를 주도했고 이 일로 6개월을 복역했다.   


 대학졸업 후 현대건설에 입사한 MB는 숱한 회사원들의 신화였다. 입사 5년 만에 이사, 10년 만에 부사장, 12년 만에 사장, 23년 만에 회장이 됐다. 신입사원 시절 태국 고속도로 건설 현장에서 근무할 때, 폭도들 습격을 받고도 금고를 품에 안고 놓지 않은 일화는 전설처럼 회자됐다. 그의  성공 스토리는 ‘야망의 세월’이라는 드라마로 전파되기도 했다.  


 정주영 그룹회장이 대선에 도전하자 그도 정치의 길로 나서 전국구 국회의원에 당선된다. 이어 96년 15대 총선에서 서울 종로에 출마, 당시 청문회 스타인 노무현, 4선의 이종찬 등과 맞붙어 승리했다. 하지만 선거법 위반으로 벌금형을 선고받자 정계를 떠나 미국으로 간다. 이때 그는 워싱턴 근교의 좁은 아파트에서 가구도 없이 빈 박스 위에 전화기를 놓고 사는 등 와신상담(臥薪嘗膽)했다. 


 2년여 만에 귀국한 그는 2002년 서울시장에 도전해 성공한다. 이때부터 인생의 새 황금기가 시작된다. 서울시장에서 퇴임한 그는 ‘한반도 대운하’ 등을 내걸며 대권에 도전, 한나라당내 경선에서 박근혜를 누르고 대선 후보가 됐다. 그리고 “밥 처먹었으니 경제는 꼭 살려라”는 CF 광고처럼 경제 부흥을 기치로 내세워 17대 대선에서 49%의 압도적 득표율로 당선된다. 


 그러나 권력의 최정점에서 신화는 흔들리기 시작했다. 취임 초부터 각종 파문에 휩싸였고, 특히 광우병 쇠고기 파동으로 홍역을 치른다. 친형인 이상득 등 측근 그룹의 각종 비리도 끊임없이 터져 나왔다. 대통령 퇴임 후엔 '사자방'(4대강•자원외교•방위사업 비리) 등이 꼬리표처럼 따라 다녔다.


 0…개천에서 난 용(龍) MB. 그의 추락은 끝이 없었다. 샐러리맨의 신화를 거쳐 대통령까지 올랐으나 종국엔 영어(囹圄)의 몸으로 마감하게 됐다. 누릴만큼 누리고 가진만큼 가진 사람이 왜 그렇게 더 큰 욕심을 부렸을까. 본인 소회대로 모든 것은 자업자득(自業自得)이다. 


 MB를 비롯해 최근 줄줄이 몰락의 길을 걷고 있는 자수성가형 인사들을 보노라면 마음이 아리기도 하다. 미천한 출신이지만 나름 열심히 노력하면 개천에서도 용이 날 수 있다는 신념을 갖고 살아가는 무수한 흙수저들의 희망마져 무너져 내리는 것 같기 때문이다. (사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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