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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루터’ (Luther)(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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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교개혁 500주년 ― 세상을 바꾼 획기적 사건

 

 

 

 

 (지난 호에 이어)
 드디어 루터가 프리드리히 선제후를 접견한다. 첫 만남이었다. 루터는 위기 때마다 암암리에 적극 보호해 주었던 그 은공에 보답하기 위해 신약성서 독일어 번역본을 그에게 헌정한다. [註: 선제후(選帝侯)는 신성로마제국 황제를 선출하는 7인의 선거인단을 말한다. 선제후는 원칙적으로 백작, 공작, 대공과 같은 귀족의 지위는 없었지만 당시 봉건 제후들 가운데 왕 또는 황제 다음으로 높은 직책으로 그 힘은 막강했다.] 


 선제후는 "그걸로 우리는 로마와 끝일세. 영원히."라고 말한다. "저는 기독교의 통합을 추구해 왔지만 예속을 바라진 않습니다. 주님의 율법에는 부응하나 로마에겐 아닙니다." "로마법은 실재(實在)하네." "저는 그리스도의 실재만을 믿습니다." "타협은 없나?" "없습니다." "자네도 알겠지만 그들은 이걸 도전으로 간주할 거야. 주저없이 반격하겠지. 내가 그 선물을 받으리라 보는가?" "물론입니다." 


 로마를 재건하겠다던 교황 레오 10세는 부채만 잔뜩 남긴 채 말라리아 병으로 1521년 12월 1일 45세로 급사한다. 루터를 심문한 바 있는 카예탄 추기경은 "루터같은 거인이 필요한 때 레오는 영적 난쟁이였다"고 평한다. [註: 면죄부 제도는 1567년 교황 파이어스 5세(Pius V)의 칙령으로 폐지된다.]

 

 

 


 루터는 1525년 6월 13일 전격 결혼을 했다. 그의 나이 42세 때였다. 농민전쟁의 와중에서 그의 결혼선언은 놀라움으로 받아들여졌다. 신부는 님브쉔 수도원(Nimbschen Kloster)에서 청어 생선통에 숨어 도망쳐 나온 16살 연하의 전직 로마 카톨릭교회 수녀인 카타리나 폰 보라(Katharina von Bora, 1499~1552)였다.


 카타리나(클레어 콕스)는 루터에게 한 가지만 약속해 달라고 한다. "하느님이 아닌 다음에야 우리 결혼 침대엔 농부든 왕이든 교황이든 아무도 끌어들이지 않기로요."

 

 

 


 결혼식날 울리크가 떠난다. 자기의 고향인 네덜란드에 복음을 전하고 성서를 처음 읽고 느낀 바를 전하기 위해서다. 그러나 첫날밤 창밖에서, 울리크가 국경에서 붙잡혀 화형에 처해졌다고 카를슈타트가 알리자 금세 약속을 어기고 용수철 튀듯 밖으로 나가는 루터!

 

 

 


 1530년 카를 5세 황제가 보름스 논쟁을 끝내기 위해 제후들을 아우크스부르크로 소환한다. 알레안드로가 황제에게 제후들을 응징하면 그들의 계획은 지연되어 교착상태에 빠질 것이고, 따라서 루터도 무너질 것이라고 자문했기 때문이다. 창밖에서는 농민들이 부르는 루터의 찬송가가 울려퍼지고 있다. 


 당시 파면 당했던 루터는 이 회의에 참석이 불가하였으나 종교개혁과 함께 복음이 전파됨으로 해서 사탄이 마지막 공격을 하고 있다고 믿었다. 그는 제후 및 성직자들에게 지금은 몸을 사릴 때가 아니고 과감히 나설 때 임을 강조하고 다독인다. 


 "침묵이 우리를 구하지는 못합니다. 카를에게 대항하면 전쟁이 벌어질 것이고 엄청난 피를 흘려야 합니다. 하지만 황제가 우리의 신앙과 믿음을 보여달라 청하는 것은 악마가 지옥에서 설교해 달라는 것과 같습니다. 덫일까요 아니면 절호의 기회일까요? 명심하십시오. 제가 동행하지 않으니 여러분은 홀로 카를과 대면하셔야 합니다. 여러분께서 굴복하시면 밝은 혜성 같던 우리의 신념은 산산조각 나고 고립무원의 불씨가 되어 암흑 속에 사그라질 것입니다." 

 

 

 


 예상했던 대로 카를 5세는 새로운 성서로 설교를 할 수 없다고 못박고, 내일 성체축일 행렬에 참석을 강요하며 카톨릭 의식대로 예배를 보겠다고 강경한 태도로 나온다. 이에 정면으로 '싫다'며 강제로 복음을 빼앗기고 신앙을 부인하느니 차라리 무릎을 꿇을 테니 목을 베어달라고 모두 나서는 성직자와 제후들. 멜란히톤이 나서 "폐하, 저희는 흠잡을 데 없는 순수한 신앙을 고백하는 것입니다."라고 아뢴다. 이것이 유명한 '아우크스부르크의 신앙고백(Augsburg Confession)'이다.

 

 

 


 한편 회의 결과를 기다리며 죽음을 직감한 루터가 아내 카타리나에게 이별을 고하는 순간, 말을 타고 온 멜란히톤이 제후들이 용감하게 황제와 맞서 우리의 신앙고백을 받아주셨다고 전하면서 영화는 다음의 말로 끝을 맺는다. 


 아우크스부르크 회의는 종교적 자유의 길을 열었고 세상을 바꿨다. 마르틴 루터는 그 후 16년을 성서를 가르치고 '말씀'의 설교를 위해 살았다. 그와 카타리나 폰 보라는 행복한 결혼생활을 했으며 슬하에 여섯 자녀를 두었다. 루터는 경제, 정치, 교육 및 음악에 커다란 영향을 미쳤으며 그의 성서 번역은 독일 표준어의 초석이 되었다. 현재 5억4천만 이상의 신자들이 루터가 체계화한 방식으로 예배를 본다. [註: 여기서 언급한 기독교인의 수는 루터교를 포함한 개신교 총인구를 말하는 것으로 카톨릭 인구(약 13억)는 제외된 것이다.]


 영화 속 내용은 실제 역사적 사실과 정확히 일치하지는 않는다. 예컨대 영화 속에서 루터는 성경 구절을 장과 절로 구분하여 번역한 것으로 나오지만, 실제 성경의 절은 1551년까지는 없었고, 1560년 영어 번역서인 '제네바 성경(Geneva Bible)'이 나오면서 비로소 구분하게 되었다.


 '셰익스피어 인 러브(1998)'로 두각을 나타냈던 조셉 파인스(Joseph Fiennes•47)가 루터 역으로 열연했으나 루터의 전설적인 특질을 충분히 발휘하지 못했다는 평을 받았다. 이 영화의 진짜 공헌자는 루터의 수호천사였던 프리드리히 현자 역의 피터 유스티노프와 그의 멘토였던 요한 폰 슈타우피츠 신부 역의 브루노 간츠(Bruno Ganz•76)라고 할 수 있다. 


 2017년 ― 개혁과 변화의 시대를 이끈 위대한 지도자 '마르틴 루터' 종교개혁 500주년. 최초의 개신교는 루터교였지만 오늘날에는 3,000개가 넘는 개신교 교파가 존재한다. 영화 '루터'를 통해 우리의 진정한 삶과 믿음의 방향을 되돌아보게 한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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