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amkang39
캐나다 加人 강신봉
전 캐나다한인총연합회장, 전 토론토한인회장, 요크한국인학교 설립교장, 김치캐나다사장, 전 스코필드박사동상건립위원장,전 무궁화사랑모임창립회장, 토론토흥사단창립지부장, 대한민국국민훈장목련장, 역사문화원장

캐나다 문협회원.현 GTA한카노인대학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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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마’의 역사 500년(12)-외세의 쇄도와 국정의 혼란(1)
samkang39

 

 

 1800년대, 19세기 후반기는 외세에 의한 혼란기였고, 계속 하향곡선을 걸어 오던 국력과 부패는 이조 500년 사직의 문을 닫기에 이르렀다. 무능한 고종황제, 섭정을 하던 대원군과 민비의 알력은 외세의 농간에 휘말려 드디어 나라를 잃게 된 것이다. 휘몰아쳐 들어 오는 외세의 물결, 내치의 부패로 흔들렸던 왕조의 마지막 장면을 살펴 보자.


 1864년 1월, 후손이 없는 25대 철종이 32세의 젊은 나이에 승하하자 조대비(철종의 3째 부인)는 재빨리 흥선군의 둘째 아들 명복을 제 26대 국왕에 즉위케 하였다. 국왕이 12세의 어린 나이였으므로 조대비가 수렴청정을 하게 되었고, 흥선군을 흥선대원군으로 높여 국정을 총괄하게 하였다.


 흥선대원군은 안동 김씨의 세도정치를 철폐하여 군권을 되찾고, 조선을 압박해 들어 오는 외세에 대적하기 위하여 과감한 개혁정책을 추진하였다. 그는 당색과 문벌을 초월하여 인재를 고루 등용하였고, 토색을 일삼아 주구로 전락한 탐관오리들을 처벌하였으며 양반과 토호의 면세 전결을 철저히 조사하여 국가 재정을 충당하였다. 


무명 잡세를 없애고 궁중에 특산물을 바치는 진상제도를 폐지하였다. 이외에 조세제도와 악습의 개선, 군포세를 호포세로 하는 등 많은 개혁을 단행하였다. 또 여러 가지 법전을 편찬하여 법질서를 확립시켰고, 비변사를 폐지하고 의정부를 부활시켰다. 삼군부를 두어 군국기무를 맡게 함으로써 정무와 군무를 분리시켰다. 


 하지만 그는 한편으로 무리한 정책의 추진과 세계정세를 정확하게 읽어내지 못하여 밀려들어 오는 외세에 쇄국정책을 단행한 것이 큰 화근으로 번져갔다. 세계 각국으로부터 들어 오는 외세를 받아드릴 자세도 문제였지만 지나친 자만심과 고집으로 많은 어려움을 자초하였다. 


또한 천주교를 계속 박해함으로 1866-1872년 6년 동안 무려 8천여 명을 학살하였다. 이것이 ‘병인사옥’이다. 왕의 위엄을 세우고자 경복궁을 중건함으로 힘에 겨운 백성들의 원성을 사기도 하였다. 당시 중국이나 일본은 이미 외세를 받아들여 서양 문물과 종교적 영향력을 비교적 잘 수용해 나가고 있었지만, 조선조의 조정에서는 외세의 함정이 침입해 들어 올 적마다 쇄국정책으로 그들을 적대시 한 것은 큰 실책이었다.


 1866년 병인년, 천주교의 박해로 인하여 프랑스의 신부 9명이 죽자 프랑스는 그 보복으로 군함 7척에 병력 일천명을 싣고 들어와 강화도를 점령하였다. 이들이 후에 제주목사 양수헌의 전략으로 물러났지만 그들은 강화도의 사고(史庫)를 털어 많은 우리의 역사고전을 탈취해갔다. 이를 우리는 병인양요라고 한다. 


 2011년, 이렇게 탈취를 당했던 우리 사고의 서적들을 프랑스 사르코지 대통령이 우리나라의 이명박 대통령에게 돌려준 것을 우리는 생생하게 기억한다. 


 1871년 5월, 미국의 군함 5척, 병력 1천2백여명, 함포 85문 등으로 무장하고 강화도에 쳐들어 왔다. 이는 1866년 대동강에 들어온 미국의 상선 셜만호가 통상을 요구하자 평양군민의 화공들이 이를 불태워 버렸다. 이에 대한 손해배상문제와 개항문제를 놓고 이후 수차의 협의를 요청하였으나 이에 응수를 하지 않으니까 이번에는 군함으로 쳐들어 와서 포격을 가한 조-미간의 최초의 충돌이었다. 이들은 약 한 달 동안 강화도를 점령하다가 물러갔다. 이를 신미양요라 한다.


 병인과 신미 두 양요는 프랑스와 미국이 우리와 통상무역을 열기 위한 전쟁이었다. 하지만 이는 오히려 조선 사람들의 감정만 자극시켜 척화비를 세우는 등 대원군의 쇄국정책이 오히려 강화되는 결과를 낳고 말았다. 


 1873년, 12세에 등극한(1863년) 고종이 20세를 넘겨 성인이 되니 친정체제가 성립되었고, 중전 민비의 간섭으로 대원군이 정계에서 물러나야 한다는 하야 공세가 벌어졌다. 이때부터 시아버지 대원군과 며느리 미비간의 알력이 시작되었다. 


 1876년, 민씨, 고종의 처족들이 장악한 조정은 대원군과는 달리 대외적 개방정책을 펴기 시작하였고 일본의 무력시위에 따른 요구사항을 받아들여 강화도에서 ‘병자수호조약’을 맺게 되었다. 이에 따라 조선은 제물포항, 부산항, 원산항을 개항하게 되었다. 이후 러시아 등 구미열강과도 조약을 맺고 통상을 시도하였다. 


 1882년, 임오군란이 일어났다. 이는 일본군에 의해 신식 훈련을 받는 신식 군대와 수구세력으로 남아 있는 군영간의 싸움이었다. 신식 군대에게는 좋은 쌀을 배급하였고, 구식 군대에게는 모자라는 배급량을 보충하기 위하여 쌀에다가 모래를 섞어 배급함으로 군에서 반란이 일어났고 싸움으로 번진 것이다.


 참으로 한심스럽고 악덕한 나라로 변모하고 있었다. 격분한 흥선대원군이 반란세력을 등에 업고 궁중에 들어와 대권을 장악하였으나 곧 청나라 군에 의하여 납치됨으로 임오군란은 잠잠해졌다.


 1884년, 갑신정변이 일어났다. 당시 신흥 사회계층과 상인 지식층으로 형성된 독립협회를 대표한 김옥균 윤치호 서재필 등이 조정에서 3일천하로 정치개혁을 단행하였으나 청군에 의하여 실패로 돌아가자 그들은 일본으로 줄행랑을 하였고, 왕권은 말할 수 없이 실추되었다. 


이러한 사건들로 인하여 청나라와 일본이 조선에 군대를 진주하고 세력다툼을 벌이게 되였다. 이 때부터 조선의 자주권은 침해를 당하였고 어느 면에서 보면 국권이 외세에 넘어가기 시작하는 양상이 벌어진 것이었다. 


 1894년 3월, 동학혁명이 폭발하였다. 위의 임오군란과 갑신정변 이후 민비의 세력과 고종은 친청 정책을 펼치면서 새로운 국면을 모색했지만 급격하게 변화하는 동북아의 정세에 효과적으로 대처할 수가 없었기에 혼란은 점차 가중되었고 전국 곳곳에서 반봉건주의와 반외세 기치를 내건 민란이 끊임없이 일어났다. 


급기야 동학란으로 폭발되어 관군과 농민 사이의 전면전으로 발전하였다. 청군, 일본군, 동학군, 관군 모두가 아우성 치며 제각기 전투태세를 하고 있으니 한반도는 아비규환 불구덩이로 변하였다. 


 ‘보국안민’과 ‘폐정개혁’을 기치로 내건 농민들의 세력이 걷잡을 수 없이 전국으로 번지게 되니 고종과 민비는 청에 원군을 청하였다. 청이 이에 응하여 군세를 넓히니 일본 역시 그들간의 조약을 빌미로 군대를 증원하였다. 이처럼 외세가 국정에 직접적으로 개입하자 외세와 관군의 화력에 밀린 농민군의 봉기는 그 해 12월에 실패로 돌아갔고 동학란은 끝을 맺었다.


1894년 갑오경장: 이렇게 조선 땅에 진주한 청 일 양국군은 돌아가지 않고 조선의 내정에 본격적으로 간섭하기를 시작하였다. 일본이 청에게 조선의 내정을 개혁하자고 제의하였으나 청이 이를 거부하자 일본은 단독으로 민씨 정권을 몰아 내고 흥선대원군을 꼭두각시로 내세워서 김홍집 내각을 발족시켰다. 


그 뒤 개혁추진기구로서 군국기무처가 설치되었고, 김홍집 내각이 단행되었다. 이것이 소위 갑오경장이다. 하지만 너무 급작스런 단발령(斷髮令)과 동학란, 이듬해의 민비 살해사건 등으로 민심이 배반됨에 그는 개혁정책을 더 실현할 수가 없었다. 


이어서 고종이 상당한 공포를 느끼고 목숨을 의지하기 위하여 러시아의 공관으로 아관파천하여 들어감에 김홍집은 친러파에 의하여 사살되고 말았다. 판세가 이렇게 돌아가니 일본군은 조선에 주둔한 청군을 공격하여 승리를 거두었고, 7월에는 정식으로 청일전쟁을 선포하였든 것이다. 


설마, 설마를 믿고 살아온 조선조의 말로는 이렇게 나날이 해마다 바닥으로 떨어져가고 있었다. 

 

 


 

▲병인양요(프랑스), 신미양요(미국) 함대들의 진입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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