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난설헌(蘭雪軒)을 찾아서
leed2017

 

 꽃 피고 새 우는 봄날이라고 해서 사람 마음을 반드시 명랑한 쪽으로만 끌고 가는 것은 아니다. 하늘에 떠가는 한 조각 구름, 무심한 물소리, 바람 소리, 피고 지는 꽃잎 같은 것들이 서로 어울려서 일순간에 무슨 슬픈 노래라도 듣고 싶은 그런 마음으로 돌려놓을 때가 있다.


 바로 이런 생각이 찾아든 1998년 3월 하순, 이른 봄치고는 제법 훈기가 도는 어느 날, 나는 몇몇 문우들과 함께 K 여사를 인솔단장 겸 운전기사로 하고 경기도 광주군 초월면 지월리로 차를 몰았다. 허초희(許楚姬) 난설헌(蘭雪軒)의 묘소를 참배하기 위해서이다.


 허난설헌은 여성의 사회진출을 외면하던 조선사회에서 송도의 황진이, 부안의 매창과 더불어 화려한 예술 꽃을 피운 3대 여류시인이라 할 수 있다. 그가 황진이나 매창에 비해서 후세 사람들 입에 더 자주 오르내리지 못하는 것은 남녀가 서로 그리워하는 정을 노골적으로 표현한 단가(短歌) 형식의 노래, 대중들이 좋아할 우리말 시조를 내놓지 못했기 때문인 것 같다. 


 난설헌 문학에 대한 연구로 박사학위를 받은 김명희(金明姬) 교수에 따르면 난설헌의 시(詩)중에는 [공부하러 간 남편을 기다리며] 같이 중국판 시집에는 수록이 되어 있으나 한국판 [난설헌 집]에는 들어있지 않는 것도 있는데 그 이유는 외설에 가까운 것으로 간주되어서 그렇다는 것이다.


 나는 난설헌의 이름은 들은 지 오래지마는 정작 그의 작품을 대한 것은 훨씬 뒤의 일이었다. 그녀의 묘소가 서울에서 그다지 멀지 않은 경기도 광주에 있다는 것을 안 것은 더더욱 최근 일이니 묘소 참배는 생각을 품은 지 오래지 않아 곧 실행으로 옮겨진 셈이다.


 생각과는 달리 묘소는 초월면 지월리, 무갑산 연봉이 저 멀리 바라보이는 경수마을 안동김씨 묘역 맨 아래, 산 밑바닥에서 몇 발자국 되지 않을뿐더러 고속도로를 달리는 자동차의 소음이 종일 끊이지 않는 그런 시끄러운 곳에 우리의 외로운 시인은 누워있었다.


 난설헌은 조선 중기 명종 때 양천(陽川) 허엽의 딸로 태어났다. 아버지는 물론 두 오빠도 당대를 휩쓸던 대 문장가요, 성리학자들이었고 동생은 [홍길동전]을 쓴 허균(許筠)이었으니 실로 명문대가, 책의 향기가 끊이지 않는 부러운 환경에서 태어난 것이다.


문학적 재능으로 말하면 사방에 이름을 떨치고도 남을 재주였지마는 출생신분이 그다지 화려하지 못하다는 이유 하나로 변변한 벼슬자리 한 번 못해 본 이달(李達) 문하에서 시(詩)를 공부했다. 이러한 연유로 해서 동생 균과 함께 설움 받는 계층에 대한 동정의 정이 남달랐다고 한다.


 어릴 때부터 신동이라는 이름이 붙었던 난설헌은 14살 때 안동 김씨 김성립(金誠立)에게 출가했다. 강대욱 님에 따르면 결혼 초기는 재주와 미모를 겸비한 신부로 시가(媤家)의 기대와 총애를 한 몸에 받았으나 평범한 주부가 아닌 보기 드문 천재였던 난설헌의 시(詩)적 재능과 감성은 시어머니 눈 밖에 나게 되었고 시어머니와 며느리 간에 극심한 불화를 일으켰다고 한다. 


 남편은 보통 남성이었으니, 타고난 미모에 천재적 시인의 재질을 가진 부인에 대한 열등감 때문에 아내를 멀리하고 기생방 출입으로 집을 비우기가 일쑤였다고 한다. 공부를 게을리 하고 자기 아닌 다른 여자들에게 정을 쏟는 남편이 얼마나 원망스러웠을까, 난설헌은 "남편 김성립을 이별하고 죽어서는 영원토록 두목(杜牧)을 따르겠노라"고 했다 한다(人間願別 金誠立 地下長從 社牧之). 이는 성실치 못한 남편에 대한 노골적인 불만의 표시도 되겠지마는 시(詩)에 대한 그녀의 열정과 애착이 얼마나 뜨거웠던가를 말해주는 바로미터(barometer)가 된다고 볼 수 있다.


 남편과의 소원해진 관계, 어린 자식들의 잇단 죽음, 오빠들의 귀양으로 풍비박산이 된 친정, 이 엄청난 비극을 외면하기에는 그녀의 프라이드가 너무 컸던가, 스스로 강물에 몸을 던져 한 많은 생을 마감하고 말았다. 구라파에서는 25살 된 셰익스피어의 명성이 잉제 막 드날리기 시작하고 조선에서는 임진왜란이 일어나기 3년 전인 선조 22년의 일이었다.


 [한국 묘지 기행]이라는 책을 펴낸 고제희 님에 따르면 213수의 난설헌 시(詩) 가운데 신선이 되고 싶다는 내용이 128수라 한다. 잇단 비극에 위안을 얻을 안식처라고는 오직 한 곳, 신선 세계였음은 너무도 당연하다는 말이다.


 발아래에 뻗은 고속도로 때문에 원래 무덤을 옮겨서 그렇게 되었다 하나 어느 왕릉 못지 않는 호석을 둥글게 두른 화려한 무덤, 애당초 그녀 무덤이 이랬을까 의심이 들 정도였다. 다 같은 시인이라도 전라북도 부안 기녀 매창(梅窓)의 초라한 무덤과는 너무나 대조적이어서 회고(懷古)의 정마저 식는 듯한 그런 느낌이 들었다. 무덤 옆으로 1978년 4월에 세웠다는 어른 키만 한 높이의 화강암에 새겨진 이숭녕 님 비문은 같은 문학인으로서 선배 난설헌에 대한 존경과 찬사가 그녀의 슬픈 생애와 함께 나란히 적혀있다.


 굴종만이 강요되던 질곡(桎梏)의 생활에 숨막혀 자취도 없이 왔다가 간 이 땅의 여성들 틈에서도 부인은 정녕 우뚝하게 섰다. 난(蘭)처럼 청아한 용자에 재예(才藝) 비범했던 부인은 가슴 가득한 한(恨)과 곱게 가꾼 꿈을 작품으로 승화시켰으니 인구에 회자되는 시와 문으로 해서 부인의 참 모습은 오늘에 살아있다. 스스로 버리려 해도 주옥은 제 빛을 잃지 않아서 나라 안팎에서 책이 되어 나오고 오늘의 국문학계에서 부인을 추앙하는 소리 날로 더해가고 있으니 문학사상 부인의 영명(令名)은 영겁에 빛나리라.
 무덤의 왼편에는 동호인들이 세운 화강암으로 된 기단과 오석으로 세운 비신 위에 자연석으로 된 시비가 하나 있다. 앞면에는 그가 겪은 비극 중에서 분명 그녀의 이승 하직을 재촉했을 어린 남매를 잃은 슬픔을 적은 [곡자(哭子)]가정양완 님의 소담하고 복스런 글씨로 새겨져 있다.

 

 

지난해 귀여운
딸애 여의고
올해는 사랑스런
아들 잃다니
서러워라 서러워라
광릉땅이여
두 무덤 나란히
앞에 있구나


.


알고 말고 너의 넋이야
밤마다 서로서로
얼려 놀 테지.

 

 

 왜 이러한 걸출한 시인, 행복의 객관적인 조건이란 조건은 다 갖춘 시인이 한과 눈물로 살다 갔을까. 그녀의 천재적인 예술적기질 때문에 남편과 시부모과 불화했고 정신적으로나 학문적으로 너무 뛰어난 가문에서 태어났기 때문에 두 오빠를 잃는 비극을 맞았을 것이라는 생각이 머릿속을 스쳐갔다.


 난설헌의 시는 남매간에 우애가 극진했던 동생 균이 그가 죽은 후 남은 시편들을 모아 목판본으로 간행하였다. 그러나 허균 그 자신도 끝내는 형장의 이슬로 사라지는 비극의 주인공이 되지 않았는가. 만약 누나보다 동생이 먼저 이승을 하직했다면 오늘날 우리가 읽는 난설헌의 시는 찾아보기가 힘들었을지도 모른다.


 M여사가 준비해온 제물을 펼쳐놓고 문배주 한 잔으로 음복(飮福)했다. 그리고는 어린아이들처럼 모두 마른 봄 잔디에 누워 하늘을 보며 놀았다. 찔레 순이 고개를 내밀 채비를 하고 있을 이른 봄, 그녀 생애의 두 배가 넘는 나이를 바라보는 사람들이 지월리 낯선 길을 물어물어 찾아온 그 피로를 400년 넘은 시의 향기로 풀고 있는 것이다. 오늘 난설헌은 외롭지 않다.(1998.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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