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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영득 칼럼

JungYeoungDeu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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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주 (太柱) 정영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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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06-13
소통

 

CN Tower는 여전히 토론토의 명물이다. 회사의 커다란 유리창 너머로 멀리 보이는 저 탑은 어제나 그제나 아니 20 여 년이 넘도록 그대로인데, 나는 많이 왜소해진 것 같다. 이민 와 살면서 가장 힘든 일 중의 하나가 언어 소통이다. 본의가 와전되다 보니, 차라리 말 하지 않는 게 상책일 때도 있다.

단지 언어의 통행 만이 문제가 되는 건 아니다. 말의 온도, 뉘앙스, 속 뜻… 그런 것까지 모두 포함해서 우리는 소통이란 걸 한다. 마치 글 속에서 행간의 의미를 찾아내야 할 때가 있는 것처럼 언어 교감은 쉽지 않다. 세태의 흐름에 따라, 어쩔 수 없이 따라가는 것 중의 하나가 문자 교환이다. 전화로 통화하기 보다는 텍스트를 주고 받거나 카톡을 사용한다. 소통이 건조할 것 같으면 이모티콘을 이용해서 교신하기도 한다.

얼마 전에 생일이었다. 아침부터 문자가 오더니, 전화 벨이 울렸다. 목소리를 통해 축하를 받으니 그 전달력이 새롭기는 했다. 더 반갑기도 했다. 다만 어느새 습관처럼 익숙해진 틀에서 벗어난 듯하여 어색한 면도 없지 않았다. 소통 방법의 변천 과도기에 있는 걸까.  

 

 얼마 전에 여자 프로테니스 마이애미오픈 단식 준준결승전 시합을 보게 되었다. 미국의 제시카 페굴라가 러시아의 아나타시아 포타포바와 겨루었다. 페굴라는 4-6, 6-3으로 한 차례씩 패하고 이기며 1:1 동점을 이루었다. 그러다가 마지막 3세트에서 두 차례 매치포인트를 이겨내고 7-6으로 승리를 거머쥐었다. 매 게임 마다 손에 땀이 나게 하였다. 29세의 페굴라는 흔들리지 않는 정신력으로 21세 포타포바의 젊은 패기에 맞서 치열한 접전을 치렀다. 세계 랭킹 27위의 포타포바는 3위의 페굴라와 겨루며 혼신의 힘을 다했다.

테니스도 여느 구기 종목과 마찬가지로 공의 방향과 거리가 중요하다. 힘의 완급 조절도 승패를 좌우한다. 정신이 육체를 지배하고, 육체가 정신을 조정한다. 개인과 개인이 대결하는 1:1 승부의 코트에서는 특히 더 정신과 육체의 조화가 중요할 것이다. 남자 테니스 선수 중에는 앤디 머레이가 본인과의 소통으로 정신을 가다듬는다. 스스로 써놓은 메모를 주로 코트 체인지 시간을 이용해 들여다보며 마인드 콘트롤을 한다. 2015년 로테르담 경기에서 그 메모장 일부가 언론에 공개되기도 했는데, 단순하면서도 명쾌한 문구가 인상적이었다. “최선을 다하라. 다리를 많이 움직여라. 매 득점하는 과정에 집중하라…” 등 그 만의 경기 비법이 적혀 있었다.

스포츠 세계에서의 노련미는 바로 이런 소통의 능력에서 비롯되는 게 아닐까 싶다. 그렇게 해서 관록이 쌓일 것이다. 그럼으로써 나와의 진정한 소통을 이루며, 곧 대중과의 교류로 확장되는 교두보가 형성되는 것이리라. 비단 스포츠 게임에서만 그러하겠는가. 삶의 여정에서도 소통이 그렇게 작용하리라 믿는다.  문득 어릴 때 보았던 과학 티브이 프로그램이 생각난다.

 

투명 유리 상자 안에 큰 자갈을 우선 꽉 차게 넣었다. 그리고 조약돌이 자갈 사이 사이를 메우도록 하였다. 다음에 모래를 넣으니 모래가 빈 공간을 모두 빈틈없이 채웠다. 꽉 찬 상자에 무엇을 더 채울 수 있겠느냔 질문이 이어졌다. 프로그램 연출자는 아마 그러면서 시청자와의 교감을 유도했을 것이다. 숨구멍 하나 없이 꽉 차 보이는 상자를 보며 골똘히 생각에 잠기는 순간, 물이 부어졌다. 너무나 당연한 정답을 잠시 놓치고 있었다. 부드러움이 강직함을 이긴다는 명언도 그렇게 해서 와 닿았을 것이다. 진리와 소통한 격이었다.

 

하던 일 계속해서 성공하면 사람들이 그걸 길이라 부르게 된다. 나는 고집스레 한 직장에 계속 몸담고 있다. 전직하는 재주도 딱히 없었지만 타성에 젖어 드는 걸 막지 못했기 때문이리라. 언제부터인가 성공이란 개념을 너무 강박스럽게 다그치지도 않는다. 다만 내 한계를 남들이 결정하지 않도록 의연하게 살고자 한다. 유리 상자의 물처럼 유연하고 포괄적인 존재를 언제나 가슴에 담으며 소통하려 한다. 나다니엘 호오손의 <큰 바위 얼굴> 주인공 어네스트처럼, 소망을 가슴에 담으면 소망을 닮게 될 것이라고 생각한다. 소통의 부재는 곧 존재감 상실이라는 시대에 살고 있다. 

향기로 찾아와 스치듯 사라지는 봄, 마법 같은 계절에 주문 하나 외워본다. 소통에 스며들자!     

 

 

    

 

 

<저작권자(c) Budongsancanada.com 부동산캐나다 한인뉴스, 무단 전재-재배포 금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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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02-29
걷기와 나

 

이미 5분의 4는 올라왔다. 눈앞의 깔딱 고갯길이 발목을 잡았다. 돌발 변수였다. 경사가 그리 심해 보이지 않기에 오르기 시작했지만, 80도는 족히 넘어 보이는 가파른 산비탈 막바지 구간에서 험난한 과정을 맞았다. 뒤돌아 보면 위험할 것 같아, 일부러 앞만 보았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유용하게 사용했던 두 자루의 스틱이 오히려 장애물로 전락했다. 먼저 스틱을 앞 공간 후미진 벼랑 구석에 밀어 넣었다. 등산객들이 마셨던 음료수 병이 한두 개 눈에 띄었다. “그래, 사람들이 다니던 길이야. 나도 갈 수 있어!” 안심하면서도 손에는 땀이 배었다. 진퇴양난의 위기에서 조용히 숨을 골랐다. 침착해야 했다. 나무 뿌리가 저 멀리 상단에 보였다. 죽으라는 법은 역시, 세상에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손을 최대한 뻗어서 그 뿌리를 잡으니, 돌부리 하나를 밟고 올라설 수 있었다. 말 그대로 걸림돌이 디딤돌이 되었다. 이어서 나무 곁가지에 손이 닿았다.

 

그리고 고개 정상에 들어서며 내가 아는 전망대 난간에 다다를 수 있었다. 다리에 힘이 풀리면서 감사기도가 우선 나왔다. 전망대에서 내려다보니 아까 그 음료수 병들은 사람이 여기서 내던져 버린 쓰레기였다. 공원 입구의 주차장으로 천천히 내려오면서 떠오르는 상념을 주섬주섬 챙겼다.
친구 같았던 스틱이 훼방꾼이 되고, 위안을 주었던 음료수 병이 쓰레기였다니, 뒤얽힌 연결고리에
잠시 정신이 혼미해졌다. 속세를 떠나온 듯한 숲속 한가운데에서 철저한 속세를 체험한 격이었다. 16마일즈 크릭이라고 불리는 이곳 등산 코스는 경관이 아름답기로 유명하다. 벌써 여러 차례 다녀본 경험이 있는 지형이라, 그 날은 평소에 잘 다니지 않는 코스로 등산로를 택했다.

 

새로운 길은 역시 흥미롭고 신선했다. 하지만 섣부른 도전은 만용일 수 있음을 간과했다. 숲길을 한참 걷다 보니 평소 다니던 길의 반대편 지점에 도달할 것 같다는 예측을 할 수 있었다. “계속 가다 보면 산비탈길이 나올 텐데, 거기엔 따로 등산로가 없을 거고…” 불길한 예감은 정확하게 맞아 떨어졌다. 그 낭떠러지 같은 비탈길을 만났다. 왔던 길을 그냥 되돌아오면 되었을 텐데, 그렇게 하기는 싫었다. 경사가 약해 보이는 왼쪽 부분을 타고 비탈면을 오르기 시작했던 것이다.
삶은 시간과 공간, 그리고 선택의 연속이다. 등산길에서 또 다른 인생을 체감했다. 길 위의 그날 명상은 부처님 오신 날 특집 다큐 KBS1, ‘부처님과 함께 걷다’를 얼마 전에 시청하면서 자연스레 내게 점철되었다. 108인의 스님이 43일간 1,167킬로미터의 인도 순례 도정을 성공리에 마쳤다. 발톱이 빠지면서도, 넘어져 이마를 찧고, 지팡이를 짚고 걸을지언정, 포기는 없었다. 모두 무사히 귀국했다. 불교의 설법을 감히 이해할 수는 없을 지라도, 2,500년 전 석가모니의 고행을 몸소 체험하며 부처가 되려는 스님들의 노고에 절로 숙연해졌다. 감동스러운 수행의 길을 나도 함께 걸은 느낌이었다. 뜻이 있는 곳에 길이 있고, 길이 있는 곳에 뜻이 펼쳐졌다. 번뇌의 숫자 108로 참가 인원수를 제한한 것부터 예사롭지 않았다.

 

어느 새 46년의 세월이 흘렀다. 1977년 8월에, 나도 걷고 있었다. 9박10일 동안 하루 평균 5시간씩 16킬로미터 정도를 걸었다. 한국유네스코학생회(KUSA)가 주관하는 ‘조국순례대행진’이었다. 경기도 이천에서 출발, 경북 문경새재를 넘어 장호원에 도착해서 광복절 기념식을 마친 후 해산했다. 대학 1학년 때 가입했던 KUSA 서클에서, 적극적으로 행사에 참여할 것을 권장하기도 했지만, 내심 한번 동참하려던 생각도 갖고 있었다. ‘조국의 어제와 오늘을 직접 걸으며 체험하자’는 거창한 캐치프레이즈의 취지 보다는 그저 여름 방학 동안 캠핑의 도보 대장정을 만끽해 보자는 개인 바람이 더 컸었다. 아스팔트 도로도 걸었지만, 산허리를 돌아 먼지 나는 흙길을 주로 걸었다. 아침에 일어나면 제일 먼저, 양말 바닥에 빨래 비누를 문질렀다. 지도 교사가 알려준 비법으로, 발에 물집이 잡히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다. 행진하다가 주위 동료 친구가 힘들어하면, 그 친구의 배낭을 대신 메어주기도 했다. 그 배낭은 가슴에 멘다. 그렇게 하면 가슴과 등, 앞뒤 균형이 잡혀 오히려 편해진다. 그 역시 지도 교사의 가르침, 아니 솔선수범으로 알게 되었다. 배려하면 나도 편안해진다는 걸 그러면서 조금 배웠는지 모르겠다. 뙤약볕이 내리쬐든 비가 쏟아지든 행진은 계속 이어졌다. 악조건에서도 걷는 방법을 그렇게 해서 체득했으리라. 순례 일정을 다 마친 날, 대장정의 길을 끝내 완주하였다는 정신적 포만감이, 그간의 고단함을 포용하고도 남았다. 그 후부터 걷기와 나는 자주 만나는 사이가 되었다. 오래된 앨범에서, 그 때 사진 몇 장을 발견하고는 추억에 잠긴다. 검게 타버린 내 얼굴과 조원들의 웃는 모습에서, 힘들었지만 즐거웠던 한 시절을 본다. 지금 그들은 모두 잘 지내고 있는지…

 

나이 들어 점점 귀 안 들리고 눈 안 보이고 신체 약해지고 있지만, 그럴수록 걷는 것이 좋을 것이다. 걸을 수 있다는 건 얼마나 복 받은 일인가. 장 폴 사르트르의 BCD 명언(Life is Choices between Birth and Death)처럼, 인생길에서 선택의 중요성은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을 것이다. 시간이 흐르고 공간이 바뀌어도 선택은 나의 몫이다. 그러나 선택만큼 소중한 것이 제대로 가기 아닐까. 오늘로 이어진 이 길 위를 자신 있게 걸어가자. 그래야 볼 수 있고 들을 수 있다.
새벽 안개가 걷히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새 발걸음을 옮긴다. 걷기와 나는 하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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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10-13
해바라기의 일탈

 

 그것은 말 그대로 일탈이었다. 해를 벗어나다니 과감한 탈출 아니, 이해가 안 되는 무리수였다. 일탈(逸脫)은 국어사전에서, "정해진 영역 또는 본디의 목적이나 길, 사상, 규범, 조직 따위로부터 빠져 벗어남"으로 정의하고 있다. 하지만 내가 본 어느 날 해바라기의 일탈은 해(日) 벗어남(脫)의 의미로 먼저 다가왔다. 사진을 찍을 때만 해도 전혀 눈치채지 못했다. 그저 황홀한 꽃에 취해 태양의 존재는 잠시 잊었다. 집에 와서 하나하나 사진을 들여다보면서 비로소 내 눈이 휘둥그래졌다. 세상에, 해바라기가 해를 등지고 있다니!

 해바라기를 그동안 수없이 많이 봐왔고 사진에 담기 위해 동네 거리를 일부러 돌아서 오가기도 했건만, 등진 태양을 배경 삼은 광경은 아이러니 그 자체였다. 오죽하면 해바라기라는 이름이 붙었을까. 한글 만이 아니다. 금방 생각나는 영어도 그렇다. 중국어, 일본어, 스페인어, 독일어 등에서도 태양이라는 뜻을 지닌 형태소가 포함된 복합어로 나타난다고 한다.

다만 터키어에서는 '달꽃'이라고 한다니 해가 아닌 달에 비유되는 점이 특이하다. 마치 우리나라의 '달맞이꽃'이 연상되는 대목이다. 그러니까 반드시 태양과 연관되어 이름 지어진 식물은 아니겠다고 생각은 했었지만, 그래도 해바라기는 해를 바라보리라는 믿음이 강했다.

 다음날 다시, 해바라기를 찾아갔다. 혹시 사진이 잘못 찍힌 건 아닐까. 그랬기를 바라면서 그 장소에 갔다. 나의 실망에는 아랑곳하지 않는다는 듯이 해바라기는 해를 뒤에 두고, 방긋방긋 웃고 있었다. 태양을 향해 있어야만 한다는 고정관념이 흔들리며 한동안 자리를 뜰 수가 없었다. 나는 그렇다손 치더라도 사회적 통념은 어떻게 할 것인가. 지구상에 퍼져있는 오해를 사람들은 알고도 모른 척하는 걸까. 아니면, 요즈음 들어 심각해지고 있는 기후 변화나 환경 오염 탓일까?

해를 등진 모습은 꼿꼿한 오만함의 표출이었다. 젊은 날의 내가 보였다. 자라면서 그렇게도 부모의 은혜를 많이 받았지만, 다 커서는 제 혼자 이룬 듯이 의기양양했다. 자신감 넘쳐나는 강건함보다는 불손한 내면이 부끄러웠다. 산을 넘고 바다 멀리 부모를 떠나와서 제대로 모시지도 못하며 살고 있다. 자식들이 부모의 해바라기이거늘, 나는 그 역할을 일체 못하고 있다. 어머니 돌아가시고 아버지 홀로 계시니 미어지는 가슴은 늘 그리움으로 아리다. 해바라기를 바라보며 어머니와 아버지, 그리고 나의 삼중 영상이 파노라마처럼 스쳐 갔다. 내 가족의 모습이 겹치며 사중 화면이 되는 데는 시간이 오래 걸리지 않았다. 모두 해바라기다. 햇빛은 성숙의 밑거름이다.

 해바라기뿐만 아니라 일반 식물 모두가 광합성 기능을 갖추고 있다. 자라면서 해를 바라보며 자양분을 취한다. 캘리포니아 대학 연구진에 따르면 태양을 향하는 것은 해바라기 꽃이 아니라, 꽃이 피기 전의 줄기 윗부분이다. 해바라기는 24시간 태양 시계의 리듬에 맞춰, 체내에 함유된 성장 호르몬인 옥신의 농도를 조절함으로써 줄기의 방향을 바꾼다고 한다. 밤에는 줄기를 동쪽으로, 낮에는 점차 서쪽으로 향하게 한다.

그러니까 성장할 때만 해를 향하고 꽃이 피면 동쪽을 바라보는 격이 된다. 자라는 동안 온종일 태양을 따라 고개를 움직이던 해바라기가, 성장이 끝나면 마침내 스스로 태양과 같은 모습으로 꽃을 피워 그 자리를 비춘다. 해바라기가 해로 변한 것이다. 찬란한 태양의 꽃, 그대 이름은 해바라기! 아낌 없이 주는 태양은 이제 꽃 뒤로 물러나 있다. 꽃의 영광을 위하여 지금 그 자리에서 최선을 다하라는 메시지를 온몸으로 전한다.

자식바라기가 된 입장에서 우리 아이들에게 내가 바라는 꿈도 마찬가지다. 각자가 소망스럽게 피어나길 축원한다. 해바라기는 '해' 와 '바라' 그리고 '-기'에서 왔다고 한다. 옛말 '바라'는 '바라다'와 '바라보다'의 뜻을 다 지녔다고 하니, '바라다'의 의미로 보면 해가 뒤에 있는 이유로도 작용할 것이다.

호기심으로 시작된 궁금증은 풀렸으나 어떻게 된 영문이지 개운하지 않다. 해바라기는 언제나 해를 향해 움직인다는 애초의 잘못된 상식이 차라리 진실이면 좋겠다는 생각마저 든다. 변함 없는 일편단심의 의지를 그렇게라도 긍정 삼고 싶은 마음일까.

 지난 3년간 일탈은 언감생심 사치였다. 세기적 감염병 유행 자체가 이미 총체적 일탈이었기 때문이다. 일상생활을 잃어버리고 나서야 새삼 그 소중함을 체득하고 너나 할 것 없이 일상을 동경했었다. 이제라도 일상으로 점차 복귀하는 게 얼마나 다행스러운 일인가.

그런 즈음에 해바라기 일탈과 마주친 것이다. 어쩌면 처음부터 일상과 일탈은 이처럼 유기적 연동체였는지 모르겠다. 그러고 보니 해바라기의 일탈은 그들로서의 일탈이라기보다는 나 자신의 고정관념 일탈을 위한 발로가 아니었나 싶다. 때로 지난한 삶과 맞부딪친다 할지라도 용기를 잃지 말라는 위로 소리가 들린다. 나란히 도열하여 나를 맞이하는 해바라기 물결 속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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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10-16
시차(時差)

 


해마다 봄 가을이면 이곳에는 일광절약시간제(Daylight Saving Time)가 시행된다. 3월에 한 시간 당기고, 11월에 한 시간 늦춰서 낮의 시간을 효율적으로 쓰는 효과를 기대하는 것이다. 실제로 낮 시간을 그럭저럭 유용하게 사용하고 어두워지면 활동을 자제하게 된다. 


가을 끝 달 초순에서부터 봄의 첫 달 중반 무렵까지 잠을 매일 한 시간 더 잘 수 있는 건 분명히 좋은 점이다. 나머지 기간에는 잠을 한 시간 줄여야 하는 반대급부에 승복해야 한다. 이 제도는 수면 시간을 연중 두 차례나 인위적으로 조정하기 때문에 교통사고 유발, 건강 악화, 인지 능력 훼손 및 업무 생산성 저하 등 부정적인 영향을 초래한다고도 한다. 그러니 시차는 복병(伏兵)이라 아니할 수 없는 걸까? 


시차란 말은 내 사전에 아예 없는 단어였다. 불과 몇 년 전까지만 해도 그랬다. 열너덧 시간 비행기를 타고 먼 곳까지 날아와 우리나라와는 정반대의 시간대를 접하는 캐나다의 처음 며칠 간도 그다지 힘들지 않았다. 낮에 쏟아지는 잠을 잘 참고 있다가 밤에 푹 자면 그뿐이었다. 2-3일 쉬고 나면 거뜬히 직장으로 출근하고 정상을 되찾곤 하였다.


그러다가 내 몸을 세월에 고스란히 내어 줄 수밖에 없는 처지라는 걸 알게 되는 데에는 그다지 시간이 오래 걸리지 않았다. 불과 1년 사이에 신체가 변한 것을 느꼈다. 지난해 이맘때에는 고국에 다녀오고 나서 꼬박 일주일을 고생했다. 하지만 올해는 자그마치 보름 동안이나 제대로 시차에 적응하지 못했다. 


낮에 피곤해서 잠을 자도 잔 것 같지 않고, 밤에는 말똥말똥 한국 시간에 맞춰 내 몸이 작동했다. 그렇다고 고국에 오래 머문 것도 아니고 기껏 2주였는데 내 육체는 그 2주를 고스란히 보상이라도 받으려는 듯 떼를 썼다. 


다시 일상으로 복귀하는 기간이 한 2년은 더 지난 느낌이었다. 거울에 비친 내 모습이 그만큼 야윈 잔상을 드러냈다. 그러고 보니 거울을 한동안 들여다보지 않았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그 거울에 내가 아닌 다른 사람이 들어가 있었다. 


실제로 사람을 오랜 시간 동안 계속 바라보고 있으면 그 사람에게서 다른 얼굴을 볼 때가 있었다. 6학년 교실에서 동무가 앞에 나와 숙제를 발표할 때, 시간이 지나면서 그가 전혀 모르는 얼굴로 보이던 일이 그랬고, 어느 날 수업 중에 중학교 선생님의 모습이 점차 낯설게 보이던 일이 그랬다. 


어떤 사람을 똑바로 오랫동안 바라볼 기회가 줄어서 그런지 요새는 그런 일이 별로 없다. 하지만 오래 쳐다보면 분명히 그렇게 보일 것이라는 생각에는 변함이 없다. 동일한 등장 인물이 다른 얼굴로 출연하는 것이다. 


안방에 우리 부부의 사진이 액자에 한 장 걸려 있다. 강남의 도산공원에서 야외 촬영한 웨딩 사진이다. 풋풋한 젊은 날의 봄이 찍혀있다. 얼마든지 기뻐해도 좋은 시간이 벽에 걸려있다. 지난 주말에 그 액자 곁을 지나가다가 유리 면에 반사된 내 모습을 얼핏 보게 되었다. 


예전의 그때와 지금 다른 건 계절만이 아니었다. 무려 30여 년의 시간과 공간 차이가 실려 있었다. 시간은 공간을 동반해서 지금 여기라는 상황을 만들어 놓았고 현재도 그 진행을 멈추지 않고 있다.


그래서 시간과 공간은 언제나 한 개념이요 곧 생활의 방식으로 발전한다. 본가에 며칠 묵으면서 오랜만에 옛 사진 앨범을 보게 되었다. 흑백 사진에서 컬러 사진으로 페이지가 넘어갔다. 소년에서 청년으로 변해가는 시간과 장소가, 추억이라는 이름으로 사진첩을 채우고 있었다. 


떠나오는 날 어머니는 내게 말씀하셨다. “뭐 놔두고 가는 거 없는지 잘 살펴봐라.” 내가 처음 이민 떠나는 날 하신 말씀과 하나도 다르지 않았다. 어머니는 그 시간이 지나면 내가 곧 다른 공간에 가 있을 것이라는 사실이 미리 서운하셨던 게다. 나는 또 하나의 시공간을 남겨 놓고 설운 발길을 돌렸다. 


“세월, 아! 그렇게도 좋았던 시절이여. 어디로 갔는가? (Time, Oh good good time. Where did you go?)” <Time>이라는 팝송 가사의 후렴구다. 내가 요즈음, 이 노랫말에 푹 빠져든 까닭은 바로 절묘한 시공간적인 표현 때문이다. 


시간한테, 도대체 너 어디로 간 거냐면서 장소를 묻고 있지 않은가. 이 한 소절에서 이미 심오한 철학이 겹겹이 묻어 나온다. 그냥 흥얼거리며 지나쳤던 가사에서 보석을 만났다.


지나간 일에 연연해 하기보다는 지금이라는 시간에 충실하기를 바란다. 그러다 보면 오늘이 쌓이고 켜켜이 그 자리에 걸맞은 새로운 공간들이 순차적으로 형성되리라. 사랑할 수밖에 없는 시공간의 연속이다.


이제는 타임머신을 타고 수시로 우주를 넘나들 생각이다. 시차라는 시련은 곧 시공을 뛰어넘는 원심력을 불러일으키고, 그로 인해 나는 잠자고 있던 자유로운 영혼을 깨워 훨훨 날아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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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10-03
‘주담대’

 
 
 며칠 전에 신문을 펼치다가 커다란 기사 제목 하나에 눈길이 머물렀다. 한동안 그 뜻을 헤아리지 못해 답답함이 밀려왔다. “1%대 주담대 갈아타기, 홈피에 첫날 8만 명 몰려”


 주담대가 뭐지? 내가 모르는 어느 대학교 이름인가? 아니면 줄임말, 합성어? 궁금증을 풀기 위해 기사를 읽어 내려갔다.


 “....서민형 안심 전환 대출은 기존 변동 금리 또는 준고정 금리 주택 담보 대출 이용자가 최저 1%의 저렴한 고정 금리로 갈아탈 수 있는 상품이다...” 결국 주담대는 주택 담보 대출의 줄임말 신조어였다. 주담대란 용어가 우리나라 3대 일간지 중의 하나인 매체에 대문짝만한 제목으로 사용될 정도면 그 단어 자체가 상당히 인지도가 있다는 얘기일 것이다. 나만 모르고 있었다는 자괴감이 드는 것 같았다. 내가 시대에 뒤떨어져도 많이 뒤떨어졌다는 소외감마저 스쳤다.


 그러다가 그 어두운 골목에서 빠져나오는 데 제일 먼저 아내가 손을 내밀었다. 그 말을 처음 들어본단다. 주위 사람들 몇 명에게 물어봐도 모르는 말이라고 했다. 골목을 벗어나 큰길로 들어서자 점차 안도감과 함께 당혹감 같은 것이 올라왔다. 도대체 우리나라 말과 글을 어디까지 망치려고 저러는 걸까?


 인터넷 검색을 해보니 그야말로 말이 말같이 쓰이는 건지 잘모를 정도로 말이 수난을 당하고 있었다. 사람들이 마구 만들어낸 말장난에 정말 말문이 막혔다. 요새 자주 통용되는 '가성비(가격 대비 성능)'나 '소확행(소소하지만 확실한 행복)'이란 말 등은 차라리 애교로 봐줄만한 정도였다.  '복세편살(복잡한 세상, 편하게 살자)'이나 '워나벨(Work and Life Balance, 일과 삶의 균형)' 같은 말은 도저히 알아들을 재간이 없다. 특히 '워나벨' 같은 표현은 좋은 직장의 조건으로 중요시되고 있는 실정이라고 하니 기가 막힐 노릇이다.  그렇게보면 주담대 같은 신조어는 또 아무 것도 아닐 지 모르겠다. 


 '자만추'는 무얼 말하는 걸까? 이번에는 지상파 텔레비전 방송에서 이 말을 만났다. 오락 프로그램 출연진 중에 한 사람이 이런 말을 쓰니 거기 나오는 출연자 중에 그 뜻을 아는 사람도 있었고 모르는 사람도 있었다. 자연스런 만남 추구란다. 흔히들, “그 사람은 내 취향이 아냐”라는 말을 하는 경우가 있는 것처럼 새로운 이성 친구를 만나는 단계에서 쓰이는 줄임말인가보다.  공영 방송에서 이렇게 신조어를 남발하다 보니 그 말들이 신조어인지 신종 언어인지, 정식 언어이지 아닌지 조차 종잡을 수 없다. 새로운 줄임말이라는 게 결국 누가 먼저 그 말을 만들어내느냐의 차이가 있을 뿐이라는 생각이 들 정도다.


 한류 바람을 타고 전 세계적으로 우리나라 한글을 배우겠다는 젊은이들이 늘어나고 있다는 소식을 반갑게 듣는 요즘이다. 지난 평창 동계올림픽에서도 닿소리 'ㅍ'과 'ㅊ'으로 형상화한 엠블렘을 사용한 것은, 가장 한국적인 것이 가장 세계적인 것을 만든다는 취지에서였다고 한다. 'ㅍ'이 상징하는 의미는 하늘과 땅, 그리고 그 사이 사람들의 화합, 즉 천지인이다. 'ㅊ'의 의미는 눈과 얼음, 그리고 스포츠 스타들을 말한다. 올림픽 출전 선수들과 대회 관계자들 뿐만 아니라 일반인들 사이에서도 엠블렘 티셔츠가 유행했던 것을 기쁘게 생각한다. 연초에는 뉴욕, 밀라노, 파리 등지에서 한글 옥외 광고가 실시되었다는 뉴스도 들었다.


 올해로 573돌을 맞는 한글날 노래를 이제 나는 고집스럽게라도 3절까지 다 옮겨볼 생각이다;

 

1절


강산도 빼어났다 배달의 나라
긴 역사 오랜 전통 지녀온 겨레
거룩한 세종대왕 한글 펴시니
새 세상 밝혀주는 해가 돋았네
한글은 우리 자랑 문화의 터전
이 글로 이 나라의 힘을 기르자

 

2절


볼수록 아름다운 스물넉 자는
그 속에 모든 이치 갖추어 있고
누구나 쉬 배우며 쓰기 편하니
세계의 글자 중에 으뜸이도다
한글은 우리 자랑 민주의 근본
이 글로 이 나라의 힘을 기르자

 

3절


한 겨레 한 맘으로 한 데 뭉치어
힘차게 일어나는 건설의 일꾼
바른길 환한 길로 달려나가자
희망이 앞에 있다 한글 나라에
한글은 우리 자랑 생활의 무기
이 글로 이 나라의 힘을 기르자

 

 구구절절이 새록새록 한글의 독창성과 우수성을 드러내고 있다. 자긍심이 절로 든다.


 '그녀'라는 말이 외국식 표현에 근거한 것이니 되도록 쓰지 말아야 한다는 국어 학자의 주장이 이제는 시대에 맞지 않는다는 논리를 펴는 지인이 있다. 표준말의 정의가, “교양있는 사람들이 두루 쓰는 현대 서울말”이라는 원칙을 근거로 그리 반론을 제시했다. 똑같은 이유에서, 이제는 표준말의 기준도 바뀌어야 할 것이다. 그렇지 않으면 무수히 발생하고 범람하는 신조어 등을 어떻게 할 것인가? 그 말들도 위 세 가지 원칙에만 맞으면 표준어로 삼아야 한단 말인가? 갈릴레오가 얘기한, “그래도 지구는 돈다”나 코페르니쿠스적 전환이 요구되는 시대를 맞고 있다.


 이제는 방송이나 신문에서 한글사랑운동을 제대로 전개해야 할 시점이다. 그리고 소위 글 쓰는 사람들부터 앞장서서 우리 말을 잘 써야 할 것이다. 그것은 책무이자 사명이다. 독초처럼 자라나는 언어 유희성 말들을 지금부터라도 뽑아내야 한다. 


 민통선(민간인 출입 통제선)에서 근무하던 시절, 바로 코앞에 철책선이 가로 놓여 있었다. 우리말을 망가뜨리는 요소요소에 그런 철책 경계선이라도 쳐야 할지 모르겠다. 
 오늘 밤에는 우리말에게 연애 편지라도 한 장 쓰고 싶은 심정이다. 

 

2019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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